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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흠잡는 것이 옳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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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흠잡는 것이 옳읍니까?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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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파63 2/1 44-46면

하나님을 흠잡는 것이 옳읍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해 못할 때 하나님을 흠잡고 그의 의로우심을 의심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러스운 종인 「욥」으로 부터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읍니다. 「사단」이 「욥」의 충성을 시험하여도 괜찮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욥」은 알지 못하였읍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읍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포함 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한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라 하였읍니다.—욥 32:2; 34:5.

그러나 「엘리후」는 「욥」이 옳지 않은 점을 가리켜 말하였읍니다.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하였느니라.』—욥 33:8-12.

「욥」이 사물을 옳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전능자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읍니다. 전능자께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의 창조 사업에서 볼 수 있는 지혜를 「욥」이 다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읍니다. 그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읍니까? 동물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창조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예로써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길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욥」에게 보이셨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과 그의 특징

에 관한 질문으로써 유익하게 될 수 있읍니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욥 39:19-25.

「욥」이 말에게 이러한 뛰어난 특징을 주었읍니까? 그가 말에게 힘을 주고 흩날리는 갈기를 목에 입혔읍니까? 메뚜기처럼 뛸 수 있는 능력을 누가 말에게 베풀었읍니까?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심지어 예레미야 8:16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옛날부터 전마의 그림은 자주 묘사되었고 성경에서도 흔히 말을 사용하여 병기를 상징하고 있읍니다. 말은 병거를 끄는데와 또 기사(騎士)들을 태우는데 사용되었읍니다. 병거에는 모리와 한두명의 투사가 탔었읍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말없이도 전쟁에 이겨왔지만 후에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말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고 전쟁에 사용되었읍니다.—열왕 상 22:4.

전마(戰馬)는 전쟁터에 나가기까지 참지 못하여 울며 굽을 찹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칼을 당할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며 전동과 창과 기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전진하여 적의 갑옷을 대하고자 날뛴다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영국 고고학자 「오스틴 래이야-드」경은 기록하였읍니다. 『비록 어린양처럼 순하여 굴레만 가지고도 인도할 수 있으나 「아랍」의 말은 족속의 전투 소리를 듣고 기사의 진동하는 창을 보기만 하면 눈이 불꽃처럼 번쩍이고 피같이 불근 코가 크게 버러지며 목은 고상하게 구부러지고 꼬리와 갈기는 쭈뼛하게 되며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면 말은 기쁨에 넘쳐서 들은 것을 믿지 못한 것처럼 날뜁니다. 그러나 나팔 소리가 참말이라는 것을 알면 『아하』하고 날칩니다. 그는 히힝대며 기뻐합니다. 그는 『땅을 삼킬듯』이 전진합니다. 「아랍」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말의 신속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용맹한 동물은 사람에게 쉽게 순종하며 탄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신속한 말을 지어서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갖게 한 사람이 도대체 있읍니까?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며 그는 자기의 보좌에 앉은 왕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천사들과 더불어 이 전마에 타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읍니다. 그들은 「아마겟돈」에서 전쟁 나팔 소리를 듣고 용감히 또 신속히 전진하며 하나님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 . .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시 19:11, 14.

매와 독수리

여호와께서는 「욥」의 생각을 교정하시기 위하여 더욱 예리한 질문을 계속하셨읍니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펄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욥 39:26-30.

매가 날으는 힘이 큰 것으로 이름난 것이 사람의 이해로 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매가 남쪽 바람에 날개를 펼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날개는 참으로 힘셉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독수리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이는 때때로 조류의 왕자라고도 불리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수의 왕자인 사자를 위시하여 동물 창조에 관한 일련의 질문을 하셨읍니다. (욥 38:39) 말씀의 끝으로서 전능자께서는 조류의 왕자에 관하여 「욥」에게 질문 하셨읍니다. 독수리가 네가지로 뛰어난 것이 「욥」으로 인한 것입니까?

첫째로 독수리가 높이 날은다는 사실입니다. 독수리는 굉장히 높은 곳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이 떠오르며 기운센 날개를 가진 새가 이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런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독수리의 보금자리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새들은 얕은 곳에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가까이 하기 힘든 높이에 집을 짓고 어린 것의 안전을 도모합니다. 사람이 명령하여서 이 새가 보금자리를 성읍처럼 낭떠러지에 짓게 되었읍니까?

세째는 독수리가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눈이 멀리 봄이며』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읍니다. 멀리 골짜기 틈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예민한 시각을 독수리에게 준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독수리는 신속히 눈의 초점을 바꾸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이것으로써 먹을 것을 잘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력에 관하여 「러더포-드 프랫」씨는 「생명의 강」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동물 중에 가장 예민한 시각을 가진 자들을 우리는 낮에 높은 하늘에서 찾아 볼 수 있다.—그것은 독수리와 「콘도르」와 매의 눈인 것이다. 그들은 천「피트」나 떨어진 공중으로두터 반쯤 숨어있는 토끼나 들꿩의 무리를 찾아낼만치 예민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냥군의 눈의 예민한 시각은 뾰족하고 원추형의 세포의 밀접한 덩어리에 비추는 물질의 반영(反映)으로 인한 것이다. 눈앞 뒷쪽에 있는 이 조그만 점은 물질로부터 오는 광선을 수천의 점끝을 통하여 받고 특별한 방법으로 뚜렷한 물상으로써 머리에 그리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냥군, 즉 「스캉크」나 「쿠우가」나 우리 인간들은 단 하나의 원추의 점끝 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똑바로 보며 대상물을 직선으로 본다. 그러나 독수리나 매의 눈은 그렇지 않다. 풀 속에 있는 토끼를 예민한 원추들은 초점을 맞추어 찾아 놓은 다음에 장거리를 비스듬히 내려 날아온다. 이로 말미암아 목표의 물상이 곡선으로 눈알 이면에 달하게 된다. 독수리의 눈은 이것에 알맞게 지어저 있다. 원추의 덩어리 대신에 급강하 하는 새의 눈에는 원추가 곡선으로 그려진다. 독수리가 급강하는 동안에도 풀 속에 있는 토끼에게 둔 초점은 움직이지 아니한다. 초점을 정하는 눈알의 세포가 곡선처럼 놓인 것이 새의 강하하는 곡선과 일치한다는 것이 미소한 점일지는 모르나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누가 이렇게 지혜로운 설계를 하였을까?』

창조주께서 하셨읍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독수리에게 이 훌륭한 시각을 주신 것입니다.

네째는 독수리가 자기와 어린 것들을 유지하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어떤 종류의 독수리는 죽은지 얼마 안되는 동물의 시체를 멸시하지 않읍니다. 따라서 그들의 식량이 두군데로부터 옵니다. 즉 이미 죽은 것과 그들이 잡는 것으로부터 입니다. 독수리는 작은 동물을 잡아 어린 것들에게 갖다 줍니다. 살을 먹기에 너무 어린 독수리 새끼는 희생물의 피를 빨아 먹읍니다. 그러므로 독수리는 신속한 날개와 예민한 시각과 또 동물을 잡는 능력과 시체를 찾아내는 것으로써 자신과 어린 것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옳은 견해를 가짐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창조에 관하여 말씀하신 후에 폭풍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질문하십니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대답할찌니라.』—욥 40:1, 2.

여호와께서 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대자연에 관한 말씀은 「욥」으로 하여금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고 창조주에 비하면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하였을 때 「욥」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창조물에서 그의 크신 권능과 지혜를 보이셨으며 사람의 이해로써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매우 많으므로 하나님께 절대적 신뢰를 둘 수 있읍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든지 또 인간이 그것을 곧 이해할 수 있건 없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올바른 일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써 하나님의 행실을 일부분이라도 의심한다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동입니다. 그러면 누가 전능자를 흠잡을 수 있읍니까? 물론 「욥」이 그럴 수는 없었읍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 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욥」의 반성은 말이 많은 것이 아니었읍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읍니다. 단순히 『나는 미천하』다고 말할 뿐이었읍니다.—욥 40:3-5.

다음에 여호와의 말씀은 「욥」이 한말의 지혜로움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네가 내 심판을 페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 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6-14.

하나님의 우주 주권자되시는 권리를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 하나님이 「아마겟돈」 전쟁시에 행하시듯 『하나님 처럼 팔』을 가지고 교만하고 악한 자를 낮추며 그들을 진토에 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읍니까? 그렇다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악인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여호와의 팔과 오른손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마겟돈」은 하나님의 지고하심을 밝히는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 때에는 지상의 피조물이 그를 도와 싸울 필요가 없읍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이상 그가 일을 잘 행하지 못한다고 할 권한이 인간에게 어디 있읍니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행동을 비난할 권리가 도무지 없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치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그의 하시는 일에 흠잡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린도 전 10:22) 이사야 45:9의 말을 기억하십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읍니까?

「욥」처럼 우리도 자기의 위치를 인식합시다. 새로운 지식을 얻은 「욥」은 인간의 미소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하였읍니다. 「욥」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명(聖名)과 지존성을 밝히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의가 얼마나 미소한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흠잡지 마십시오. 우리가 말하기를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 보내리라.』말하십시오.—욥 3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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