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말씀”—‵요한’에 의하면 그는 누구인가?
1, 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필생의 기록 [중에서 「요한」은 첫째로 누구를 우리에게 소개하며, 따라서 독자들은 당연히 무엇을 알고 싶어합니까?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이었다. 같은 이분이 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기록한 처음 두 귀절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로마 가톨릭」 「듀웨이」역과 흠정역에 의한 것입니다.
2 이와 같이 「요한」은 기록의 맨 처음에서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분을 첫째로 우리에게 소개하였읍니다. 말씀을 갑자기 소개받은 독자는 누구나 이 말씀이 누구며 어떠한 분인가를 당연히 알고자 할 것입니다. 사실상, 주후 이세기부터 이 말씀이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을 해왔읍니다. 그리고 특히 사세기부터는 이에 대하여 논쟁하는 소수의 사람들 위에 많은 종교적 핍박을 가하여 왔읍니다.
3. 「요한」은 그의 기록을 어떤 언어로 기록하였으며, 「요한」의 머릿말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왜 난관을 가지고 있읍니까?
3 사도 「요한」은 그의 기록을 제 일세기의 일반 희랍어로 기록하였읍니다. 그러한 희랍어는 당시 국제적 언어였읍니다. 「요한」이 위하여 기록한 사람들은 희랍어를 말할 수 있었으며 읽을 수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의 머릿말을 읽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읍니다. 그렇지 못하였다면, 적어도 그들은 원 희랍어로 기록된 「요한」의 기록의 나머지 전부를 읽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머릿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근대 영어로 하게 된다면, 정확한 뜻을 나타내도록 번역하는데 난관이 있게 될 것입니다.
4. 현대의 모든 번역자들은 오래된 성경 역본들처럼 번역하였읍니까? 우리는 그 여부를 예시하기 위하여 어떠한 실례들을 가지고 있읍니까?
4 물론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본이나 번역을 사용하는 성경 독자들은 즉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말씀이 누구인가를 아는데 문제가 없을 것인데요. 말씀은 하나님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명백히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희랍어 학자들에 의한 모든 새로운 근대 번역들이 꼭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야 하겠읍니다. 다음의 예를 살펴 보십시오. 1961년 3월에 발행된 「신 영어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이었던 분이 말씀이었다.』고 하였읍니다. 『말씀』이라고 번역된 희랍어는 「로고스」(Lógos)입니다. 그러므로 「제임스 모」 「성경의 새로운 번역」(1922은 『「로고스」(Logos)는 신성이었다.』고 하였읍니다. 「와전 성경」—「한 미국인 역」(스미스-굳스피드)에는 『말씀은 신성이었다.』고 되어 있읍니다. 「휴 제이 ・ 필드」의 「권위 있는 신약」에도 그렇게 되어 있읍니다. (독일인들에 의함) 다른 번역들을 보면 이러합니다. 즉 「뵈머르」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굳게 맺어져 있었다. 그렇다, 신성의 존재 자체였다.』a 「슈타게」에 의하면, 『말씀은 신성의 존재 자체였다.』b 「멩게」에 의하면 『그리고 하나님(=신성의 존재)은 말씀이었다.』c 「플린」에 의하면 『그리고 신성의 무게를 가진 분이었다.』d 또한 「팀메」에 의하면, 『그리고 말씀은 일종의 하나님이었다.』e 로 되어 있읍니다.
5. 두가지 예로 표시된 바와 같이 그 중에서도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무엇이며, 「토레이」 교수의 번역을 이상의 번역들과 함께 둘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요한 1:1, 2의 다음과 같은 기록입니다.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God)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한 하나님(a god)이었다. 이 말씀이 시초에 하나님(God)과 함께 계셨다.』 이것은 1808년f에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신약 진보역(The new testament in An Improved Version)」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비슷한 기록을 전 「로마 가톨릭」 사제의 기록에서 볼 수 있읍니다. 즉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한 하나님이었다. 이분이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창조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요한 1: 1-3)g 그 기록에서 많이 논의된 『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찰스 커틀레 토레이」 교수에 의한 「신약-사 복음」 1947년도 재판에서도 볼 수 있읍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읍니다.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God)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god)이었다. 시초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때 모든 것은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요한 1: 1-3) 여기에서 말씀이 누구인가를 말한 글자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지 않고 단지 소문자로 『하나님』(god)로 철자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6. 위의 인용된 번역에서 우리는 어떤 상이한 표현들과 직면하게 되며, 따라서 이제 우리는 누구의 신분을 알아내야 합니까?
6 그러므로 위에 인용된 성경 번역들은 『하나님』, 『신성』, 『일종의 하나님』, 『하나님』(god), 『한 하나님』의 표현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나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은 『한 하나님』이라는 번역에 대하여 강한 이의를 내세웁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다신교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혹 유일신설 또는 「아리우스」설이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유럽」, 북미, 중미, 남미, 「오우스트랠리아」에 사는 사람들 즉 기독교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4,000,000명의 「파수대」 독자의 대부분은 같은 지방에서 살고 있읍니다. 다른 지방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독자들은 기독교국의 선교인들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가르침에 접하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들이 『말씀』 즉 「로고스」가 누구신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명백히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7, 8. 기독교국은 하나님께서 어떠하시다고 말하며, 그러나 이 동의어를 요한 1: 1, 2에 적용시킴으로써 우리는 무엇에 걸리게 됩니까?
7 기독교국은 자기의 가르침의 기본 교리가 삼위일체라고 믿읍니다. 기독교국이 삼위일체라고 할 때 그것은 한 하나님 안에 삼위 즉 셋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 하나님 안에 삼위인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삼위가 있는 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상,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와 하나님은 교체할 수 있는 말일 것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요한 1:1, 2를 인용하고 하나님 대신에 동의어를 사용하여 그것이 어떠한가 보기로 합시다.
8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삼위일체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삼위일체이셨다. 같은 이분이 시초에 삼위일체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읍니까? 만일 말씀이 한 위였고 삼위일체와 함께 있었다면 사위가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봉자들은 말씀은 삼위일체의 제 이위 즉 『아들 하나님』h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드라도 「요한」은 아들 하나님인 말씀이 삼위로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읍니까? 일위가 어떻게 삼위가 될 수 있겠읍니까?
9. 만일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까?
9 그러나 삼위일체 신봉자들로 하여금 요한 1:1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제 일위인 『아버지 하나님』 뿐이었기 때문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말하게 두십시오. 하나님에 관한 이 정의에 의하 여 보건대, 그들이 『아들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이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그리고 그들의 『성신 하나님』은 이중 어디로 들어갑니까?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면, 말씀이 시초에 『성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도 함께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10. 만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를 의미한다고 하면 어떠하며, 어떤 설명을 시도한다 하드라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읍니까?
10 가령, 이제 그들이 요한 1:1, 2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다 른 두위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초에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신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즉 말씀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인 아버지 하나님과 성신 하나님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즉 『아들 하나님』인 삼위일체의 제 이위는 또한 삼위일체의 제 일위이며 제 삼위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었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였으나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한다고 난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말씀은 성신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어야 하며 성신 하나님과 동등 하여야하나 성신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 뒤 따라야 합니다.
11, 12. 삼위일체에 의하면 하나님의 얼마의 부분이 말씀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성격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을 하여야 합니까?
11 그럼에도 삼위일체 신봉자들은 요한 1:1, 2의 하나님은 유일의 하나님이며,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단지 삼분의 일이 되는 하나님입니까?
12 과학적으로 1 하나님(아버지)+1 하나님(아들)+1 하나님(성신)=1 하나님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이상, 1/3 하나님(아버지)+1/3하나님(아들)+1/3하나님(성신)=3/3 하나님 즉 1 하나님으로 계산하여야 합니다. 더나아가서, 요한 1:1, 2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 말의 성격이 변화한다 즉 한 문장 내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성격이 변화한다고 결론을 맺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는 변화하십니까?
13, 14. (ㄱ)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요한 1: 1, 2의 의미를 어떻게 합니까? (ㄴ) 말씀과 하나님께 관한 「요한」의 마음 상태는 어떠하였읍니까?
13 이제는 「파수대」 독자들이 혼란을 일으켰읍니까?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누구라도 삼위일체의 가르침음을 구명하고자 한다면 정신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요한 1:1, 2의 의미를 혼돈하게 합니다. 즉 삼위일체는 그것을 단순화 하거나 명백하게 하거나 쉽게 이해하도록 하지 않읍니다.
14 사도 「요한」이 그러한 말들을 국제적인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하여 19세기 전의 일반 희랍어로 기록하였을 때 이 문제는 그의 마음 가운데서 조금도 혼란된 것이 아니었읍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기록을 시작하였을 때 그는 말씀 즉 「로고스」가 누구며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관하여 마음에 혼란이 없었읍니다.
15. 우리는 누구로 하여금 이 증명을 하는데 돕도록 할 수 있으며, 일들에 관한 설명을 넓히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기록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읍니까?
15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 자신으로 하여금 말씀이 누구시라는 것을 입증하며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설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요한」이 바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필생 기록의 다른 부분뿐아니라 기타의 영감받은 기록 중에서 행합니다. 소위 요한복음 외에도 그는 세통의 편지 즉 서간과 또한 계시록 즉 묵시록(아포칼맆스)를 기록하였읍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계시록을 첫째로 기록하였고 그 다음으로 그의 세통의 편지를 기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복음을 기록하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어네스트 롸」(1957년)저 「성경 고고학」은 238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한」은 보통 소「아시아」의 「에베소」와 관계가 있었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후 약 90년경이라고 일부되었다.』 「파수대」는 요한복음의 일자를 98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된 일들에 관한 설명을 넓히기 위하여 우리는 그가 더 일찌기 기록한 것 즉 계시록 즉 「아포칼맆스」와 그의 세 편지 혹은 서간으로부터 살펴볼 수 있읍니다.
16. 이것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우리는 그것을 살펴보겠읍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 즉 「로고스」가 누구신가에 관하여 얻은 동일한 결론에 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피겠읍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한다는 것은 현재 너무나도 가까운 하나님의 의로운 신 세계의 행복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그가 가졌던 온갖 지식을 직접 얻고 교제를 가졌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올바른 결론에 달할 수 있는 이유 혹은 기초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독자들인 우리가 올바른 결론에 달할 것을 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직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그의 각각 다른 다섯가지의 기록에 사실들을 제공하였읍니다. 그것은 그가 그와 동일한 결론에 달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의 증거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를 끝없는 축복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듀웨이」역과 홈정역의 요한 1서 5:7은 어떠한가?
17. 삼위일체 신봉자들이 뒤떨어져 있다면 무엇을 질문할 것이며, 그들의 성경에서 지적하는 성귀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읍니까?
17 만일 삼위일체 신봉자들이 현대적이 아니라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입니다. 「요한」 스스로가 삼위일체 즉 셋이 하나라고 가르치지 않았읍니까? 그들은 자기 성경으로부터 요한 1서 5:7을 지적하며 이렇게 읽을 것입니다. 『대저 하늘에서 증거하는 자가 셋이 있나니 곧 성부와 말씀과 또한 성신이며 그리고 이 셋은 하나에 합치 하시나니라.』 「로마 가톨릭 듀웨이」역과 흡사한 것으로 흠정 즉 「제임스」왕역 요한 1서 5:7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 . . 성부와 말씀과 또한 성신이며 그리고 이 셋은 하나에 합치하시나니라.』라는 말은 가장 오래된 희랍어 사본들에는 없읍니다. 그러므로 최신의 현대 성경 번역은 그러한 말들을 빼버립니다. 「그리스도인 교리 단체 「로마 가톨릭」감독 위원회」에 의한 성경 판은 설명적인 난외주와 함께 그 말들을 괄호로 묶어 넣었읍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읍니다. 『「바티칸」은 현재의 기록의 기원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전할 권리를 보유한다.』
18. 「마이우스」주교는 「바티칸」 사본 1209호를 발행하는데 있어서 요한 1서 5:7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읍니까?
18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 성서의 희랍어 사본은 많은 사람들의 판단에 의한다면, 「바티칸」 사본 1209호며 이것은 제 사세기 전반기에 기록되었읍니다. 1859년에 주교 「안겔루스 마이우스로」 말미암아 발행된 이 희랍어 사본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이 사본에 희랍말로 삽입하였으나, 앞 귀절의 마지막에다 난외주의 한 표식을 더하였읍니다. 난외주는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번역된 것은 다음과 같읍니다.
이제부터 가장 오래된 「바티칸」 사본 내에 있는 것을 본 판에 재생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증거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그리고 셋은 하나를 위하여 있다. 만일 . . . 증거』등. 그러므로 거룩한 삼위에 관한 「요한」의 축복받은 증거는 결핍되어 있다. 그 사실은 이미 비평가들에게 오래 동안 알려져 왔다.i
19. 「이 제이 굳스피드」박사는 요한 1서 5:7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으며, 말씀과 하나님의 신분을 시험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기초로 진행시킬 수는 없읍니까?
19 성경 번역가인 「에드가 제이 굳스피드」박사는 요한 1서 5:7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귀절은 제 십삼세기 그 이전의 신약의 어떠한 희랍어 사본에서나 기타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제 십오세기 이전 어떤 희랍어 사본에도 요한 1서에 관하여 나오지 않았다. 그 때 흘림 글씨로 된 것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는 십 육세기의 것이 그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희랍어 신약 사본에서만 그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대 희랍어 사본이나 희랍어 그리스도인 필자, 혹은 어떤 동양 사본에도 없다 . . . 그것은 희랍어 학자들과 신약의 희랍어 사본의 발행자들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불신임을 받은 것이다.』j 그러므로 말씀과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하여 「요 한」의 기록을 살피는데 있어서, 요한 1서 5:7에서 말하는 바 가짜를 기초로 진행시킬 수는 없읍니다.
지상에 인간으로 탄생
20, 21. (ㄱ) 말씀은 언제 하나님의 몸소 계시는 곳을 떠나셨으며, 말씀이 갖게 되신 몸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ㄴ) 말씀이 가지신 몸에 관하여 「요한」은 어떻게 말하였으며,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20 때가 이르러, 말씀 즉 「로고스」는 그가 시초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몸소 계시는 곳을 떠나셨읍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지상에 내려오시어 인간들과 섞이셨을 때입니다. 요한 1:10, 11은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말씀이 내려오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이 행한 것처럼 동일하게 행하시어 영자로서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인간 육체를 입으시고 인간과 섞여, 이 육체를 통하여 일하셨읍니까? 혹은 말씀이 영의 몸과 육신의 몸의 한 혼합 즉 혼합물이 되셨던가요? 그것을 추측하느니 보다, 「요한」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말하게 합시다.
2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1:14) 다른 성경 번역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점에 일치합니다. (개역 표준역, 미국역, 「로더함」역, 신영어역) 이것은 그가 영의 체현화한 즉 화신하여 육체를 입으셨다고 말하는 것과는 너무나 판이 합니다. 그것은 육과 혈을 가진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의 얼마를 조사한다 하드라도 말씀이 하나의 신성-인간(God-Man) 즉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 라고 말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볼 수 없읍니다.
22. 그의 인간성에 관하여, 말씀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부르셨으며, 그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사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2 신성 인간이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신봉자들의 발명이며, 전체 성경중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읍니다. 말씀이 지상에 계셨을 때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읍니다. 그것은 신성 인간과 매우 판이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나다나엘」이라고 이름한 「유대」인을 만나셨을 때 이 「유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요한 1:51) 「유대」인의 「바리새」교인 「니고데모」에게 그는 말씀하셨 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3:14, 15) 「요한」의 기록 중에서 『인자』라는 표현은 말씀에 열 여섯번 적용되었읍니다. 이것은 그가 『육신이 되』신 땅위의 인간 탄생으로 된 것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가 육신으로 되셨다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그가 영자로서 존재하시지 않게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23, 24. 육신이 되심으로써 말씀은 인간의 감관에 대하여 어떻게 되셨으며 「요한」은 말씀과의 함께한 자기 자신의 경험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보도합니까?
23 육신이 되심으로써, 이전에 보이지 않는 영이셨던 말씀은 지상의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셨으며, 들을 수 있게 되셨으며, 느낄 수 있게 되셨읍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들은 그리하여 그와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었읍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으로 존재하셨을 때 그와 접촉한 자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보도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우리와 함께 그 축복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 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 1서 1:1-3.
25, 26. (ㄱ) 「요한」은 예수를 돌본 땅의 아버지에 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ㄴ) 「요한」은 예수의 인간 어머니를 돌보는 자가 된 후에 그 여자에 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25 「요한」은 인자의 인간 어머니에게 우리의 주의를 돌립니다. 그러나 결코 개인의 이름으로 하지 않읍니다. 「요한」은 결코 그 여자의 맏아들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읍니다. 「요한」은 기록 첫머리에서 돌본 인간 아버지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한 1:45) 이 후에 예수께서는 다섯개의 떡과 두마리의 물고기로 5천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셨읍니다. 예수의 배경을 멸시하고자 힘쓴 「유대」인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하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6:42) 이처럼 「요한」은 다른 여자들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부르는 반면에 예수의 어머니는 무명으로 두었읍니다. 언제나 그 여자에 관하여 말할 때 마다 결코 『마리아』라든가 혹은 『어머니』라 하지 않고 항상 『여자』라고 하였읍니다.
26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의 땅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그를 보고 서 있었을 때 「골고다」의 형중에서 마치 죄인과도 같이 사망하여가고 계셨읍니다. 그는 마지막 말씀에서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 19:25-27) 그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얼마 동안이나 돌보았는가에 관하여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읍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예수의 어머니라 하여 그 여자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혹은 아름답게 하거나 이름마저 붙이거나 하지 않읍니다.
27, 28. 삼위일체 신봉자들은 「마리아」가 누구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어떤 질문으로 인도합니까?
27 그러나 삼위일체 선생들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이상, 「유대」의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삼분의 일의 어머니가 된데 불과합니다. 그 여자는 정식으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신 하나님』 중의 제 이위에 놓인 위 즉 하나님의 한 위의 어머니가 된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아들 하나님의 어머니에 불과하였지 『아버지 하나님』의 어머니도 아니요 『성신 하나님』의 어머니도 아니었읍니다.
28 그러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나 혹은 다른 자들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였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아버지는 누구였는가? 하고 질문을 아니할 수 없읍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머니를 가졌었다면 그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어떻게 비웃음거리가 되는가를 알 수 있읍니다.
29. 계시록 4:8, 11에서 「요한」은 어떻게 주 하나님을 묘사하였으며, 「마리아」가 하나님을 자기의 배에 잉태하였다는데 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29 더 나아가서 사도 「요한」은 한 환상가운데서, 어떤 천적 피조물들이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그리고 다른 자들은 말하였읍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시 4:8, 11, 「듀웨이」역 참조) 성경은 명명백백하게도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를 용납하지 못하며, 왕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지은 엄청나게 훌륭한 성전도 유일하신 주 하나님 전능자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로 되기 위하여 그 여자의 배에 있는 현미경적인 한 난자에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었겠읍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시하지 않도록 우리의 가르치는 바에 주의합시다.
그의 탄생지
30, 31. (ㄱ) 명백하게 「갈리리」 지방의 「나사렛」으로부터 오신 이 예수에 관하여 「유대」인들 사이에는 어떠한 질문이 일어났읍니까? (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타고 승려적으로 들어가셨을 때 큰 무리는 그의 탄생지를 어떻게 암시하였읍니까?
30 「유대」인들 사이에 「갈리리」지방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의 탄생지에 관하여 토론이 벌어졌었읍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그가 「베들레헴」에서 탄생되신 것을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한 7:41-43) 그러나 예수께서 주후 33년봄에 「예루살렘」으로 타고 승리적으로 들어가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약속된 즉 「베들레헴」의 「다윗」왕의 아들로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읍니다. 요한 12:12-15(신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어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스가랴 9:9)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시 118:25, 26, 참조.
32. (ㄱ) 「나다나엘」은 예수의 왕 관계를 어떻게 표시하였읍니까? (ㄴ) 계시록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자기 왕 관계를 표시하셨으며, 그의 천국은 어떻게 그의 조상의 왕국과 비교될 수 있겠읍니까?
32 그러나 그보다 삼년전,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그의 공개적 사업을 시작하셨을 때, 「나다나엘」은 예수의 「다윗」 왕과의 관계를 인정하여 그에게 말씀드렸읍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 1:49)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보인 환상 중에서 예수의 왕 관계는 수차 강조되었읍니다. 계시록 3:7에서 예수께서 친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록 5:5에서는 한 장로가 예수께 관하여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록 22:16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읍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비록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자신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으나 정말은 「다윗」 왕의 고향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으며, 단지 「나사렛」에서는 성장하셨을 뿐 입니다. (요한 18:5-7; 19:19) 그곳에서 그를 돌본 분인 「요셉」은 아버지로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조상인 「다윗」은 지적인 왕국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예수의 천적 왕국은 더 장엄한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33, 34. (ㄱ) 교직자들은 요한 1:14의 단어가 말씀이 화신하셨다는 것을 암시 한다고 어떻게 주장합니까? (ㄴ) 「베드로」가 그 관건이 되는 단어를 사용한 것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의 사용은 그 점을 어떻게 주장합니까?
33 말씀 즉 「로고스」였던 분께서는 인간 중에 잠간 동안만 계셨읍니다. 즉 「다윗」 왕의 후손인 「유대」의 처녀의 배에 잉태된 때로부터 삼십오년도 채 못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역」은 요한 1:14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얼마 동안 거하시매.』 화신과 신성 인간을 믿는 목사들은 『[얼마 동안] 거하시매』라고 번역한 희랍어 동사가 『천막』 혹은 『장막』(태버내클=tabernacle)의 의미를 가진 어원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돌릴 것입니다. 사실, 「로버트 영」 박사는 그것을 번역하는데 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시로 사시니.』 (영어로는 동사 「태버내클」) 목사들은 천막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천막에 살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래도 영자이셨고 육의 몸에 임시로 거주 하신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화신 즉 신성 인간이였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자신에 관하여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오른 줄로 여기노니 . . .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내가 앎이라.』 (베드로 후 1:13, 14, 「듀웨이」역 참조) 「베드로」가 그러한 말로써 자신은 화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은 확실합니다. 「베드로」는 단지 육신의 피조물로써 땅 위에 좀 더 살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34 요한 1:14에 사용된 동일한 희랍어가 계시록 12:12; 13:6의 화신하지 않는 자들에 관하여도 사용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요한 1:14의 말씀은 화신의 교리를 지지하지 않읍니다.
[각주]
a 『Es war fest mit Gott verbunden, ja selbest goettlichen Wesens.』 1910년 Rudolf Boehmer, 신약.
b “Das Wort war selbest goettlichen Wesens,” 1907년 Curt Stage, 신약.
c “Und Gott (goettlichen Wesens) war das Wort,” 1951년 제12판 Hermann Menge 신학박사, 성서.
d “Und war von goettlicher Wucht,” 1949년 Friedrich Pfaefflin, 1949년, 신약.
e ”Und Gott von Art war das Wort,” Ludwing Thimme, 1919년, 신약.
f 표제면은 다음과 같다. 『「신약 진보역」은 개정된 사본을 가진 주교 「뉴컴」의 새로운 번역에 의거한 것이다. 그리고 평론과 설명서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지식과 덕의 실천을 촉구하기 위하여 한 협회가 발행하였다. 서적을 배부하기 위해서이다.』—유일교도.
g 신약—Johannes Grebes에 의한 최고의 사본에 기초한 신약과 설명(독일어로부터 영어로 번역한 것) 1937년판 이 번역의 겉장에는 금십자가가 찍혀있다.
h Maredsous의 승려들로 말미암은 새로운 번역 원본 La Sainte Bibl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9 Maredsous의 개정판이 나왔다. 『요한 1:1에 난외 주가 있다. 1:1 말씀 : 아버지의 본질이며 영원인 말씀은 성 삼위일체의 제 이위로써 구성된다.』 (1:1 Le Verbe : Ia Parole substantielle et eternelle du pere, consituant la seconde personne de la sainte Trinité.)
BIBLIA SAGRADA, (belgium) Maredsous의 Benedictine승려들의 불어역에 의한 원 「히브리」어 「아랍」어 희랍어에서의 번역이며, São Paulo의 「가톨릭」성경 중앙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1960년에 제 이판이 나왔다. 그것도 이상과 같은 것을 말하며, 다음과 같다. Cap. 1:—1 O Verbo: a palavra substancial e eterna do Pai, que constitui a segunda pessoa da Santissima Trindade.』
i 「라틴」어 난외는 다음과 같다. 『Exin in antiquissimo codice vaticano quem hac editione repraesentamus legitur tantum: οτι τρεις εισιν οι μαρτυρουντες, το πνευμα, και το υδωρ, και το αιμα· και το τρεις εις το εν εισιν. Ει την μαρτυριαν etc Deest igitur celebre Iohannis de divinis tribus personis testimonium, quae res iamdiu criticis nota erat.』—318면.
j 「굳스피드」의 「평행 신약」 557면으로부터 인용함.—미국역과 흠정역. 1943년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