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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63 7/15 267-272면
  • 하나님의 숨겨 있는 지혜—거룩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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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숨겨 있는 지혜—거룩한 진리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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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파63 7/15 267-272면

하나님의 숨겨 있는 지혜—거룩한 진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린도 전 2:14, 15.

1, 2. (ㄱ)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 움직임이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틀잡게 되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 성경 필자들의 견해로 볼 때, 어떠한 질문들이 생깁니까?

십오 세기 이상에 걸치어,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나 여호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도구가 되도록 운명이 예정된 것으로 보였읍니다. 그들은 그의 선민이었으며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소중히 간직하여온 성경에 크게 의뢰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 일어났읍니다. 한 새로운 전파자가 나타났는데 그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삼년 반 후 이 새로운 움직임은 제거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실패된 듯이 보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 통치자들은 그 인도자를 대중 앞에서 망신을 시키고 형주에 못박음으로써 그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읍니다. 그의 소수의 추종자들은 지하로 잠입하였고 닫혀진 문 뒤에서 만났읍니다. (요한 20:19) 그러나 그것이 소멸되었읍니까? 꼭 오십 일 일이 지난 다음에 더 방해가 되는 일이 벌어졌읍니다. 그 새로운 움직임이 되살아나서는 삽시간에 확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베드로」 라고 이름한 그 움직임의 대변인은 자극적인 공개 강연을 하여 자기의 모든 논점을 「유대」인들 자신의 성서로부터 입증함으로 청중으로 『마음에 찔』리게 하였으며 그 결과로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그 움직임에 『삼천이나 더하더라.』 다음 삼년 반 동안 이 움직임은 자라났으며 퍼져나갔읍니다. 그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읍니다. 그 움직임 자체도 그것으로 놀랬읍니다. 그 동일한 대변인인 「베드로」는 전례없는 단계를 밟아 경멸히 여겼으며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 사람들을 그들의 등급에 참가하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그 당시의 온 세상에 회중들이 설립되기를 시작하였읍니다. 그 움직임은 한가지 확정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도구와도 같이 틀잡고 있었읍니다. 이것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사도 2:37, 41; 10:44-48.

2 지금까지 우리는 이 새로운 움직임의 기원과 성장을 사람들이 보는 입장에서 더듬어 봤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 기사에서 토의한 것과 연결하기 위하여 희랍어 성서의 그리스도인 필자들의 견해로 그 점을 관찰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그리스도인 교회로 알려지게 된 이 움직임을 단순히 인간 견해로서 판단하였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 기원에 그 명예를 돌리기에는 불가능한 그들의 개념이 하나님의 영감과 저작권의 압도적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었읍니까? 그것은 우리가 해결하기를 원하는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영적 나라

3. 인간적인 견해로 볼 때, 그리스도인 움직임은 국가로서 어떠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읍니까?

3 우리는 전 기사에서 하나님의 이전 도구인 육적 「이스라엘」이 어떻게 모든 면으로 정말 한 나라였는가를 표시하였읍니다. 그러나 새로운 도구는 어떠합니까? 인간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우리가 살펴온 요구 조건들 중의 단 하나도 따르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나라로 불리울 수 있는 자격이 없읍니다. 어디에 그 국토가 있으며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읍니까? 사도 시대 이후로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어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그들은 도대체 공통적인 가문이었거나 현재 그렇다거나 그들이 동일한 언어를 말한다고 할 수 없읍니다. 정부에 관하여 말하드라도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나라에서 그들의 각양 습관과 전통과 법령을 가진 많은 정부 하에서 법을 준수하는 시민노릇을 해왔으며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어느 모로 성경은 이 움직임을 한 나라라고 부릅니까?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필자들은 이 움직임이 한 나라를 형성하는 것으로 말하였지, 단순히 동일한 신앙으로 연합된 백성의 한 집단이라고 말하지 않읍니다. 「베드로」는 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 . 거룩한 나라요.』 어째서 이것이 사실입니까? 그 대답은 이러합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말하였듯이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영적 나라라고요? 아무도 그런 일을 생각해 낸 사람은 결코 없었읍니다. 그러한 개념은 확실히 인간에 그 기원을 둔것이 아니었읍니다.—베드로 전 2:9; 빌립보 3:20 또한 마태 21:43 참조.

5. (ㄱ) 영적 「이스라엘」이 한 나라라는 것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성서는 어떻게 일관성을 보여 줍니까? (ㄴ) 이것은 주후 1919년 이래로 어떠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읍니까?

5 우리가 그러한 그리스도인 필자들이 세운 견해를 인식할 때, 그것이 얼마나 참된가 그리고 모든 것이 들어맞는가를 알 수 있읍니다.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언약인 『새 언약』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중보자는 예수이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모두 공통적인 한 가문입니다. 왜냐 하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동일한 언어인 『순수한 언어』를 말합니다.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들은 모두 천적 정부 하에 들어오며 나뉘어지지 않은 충의를 바칩니다. 그 『정사』는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어깨에 놓여 있으며, 그는 그 나라의 수도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다스리십니다. 특별히 주후 1919년 이래로 그들은 참다운 나라가 되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 때 또다시 없어지게 될 위험성에 처하여 있는듯이 보였으나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 중에서 그들에 관하여 말하였듯이 새로운 탄생을 사실상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 때에 또한 그들은 「이사야」가 「나라가 하루에 생겼다」고 묘사한 여호와의 축복을 받고 크게 발전된 상태로 들어왔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신권적으로 결정됨에 따라 잘 한정된 안전한 경계 즉 상대적인 자유를 가진 나라입니다.—히브리 9:15; 로마 8:14-16; 스바냐 3:9, 신세; 요한 17:17; 이사야 9:6; 히브리 12:22; 이사야 66:8.

6. 기독교국이 성경 견해를 인식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표시합니까?

6 자기 자신의 땅에 살고 있는 이 영적 나라는 하나님의 지도(地圖)인 그의 말씀에서 정말 찾아낼 수 있읍니다. 그러나 기독교국의 교인둘이 이 견해를 인식합니까? 전연하지 못합니다. 영적 나라라고 주장하는 유일하고 참된 전 기독교 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니 만치 거기에서 우리는 국적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확실히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프랑스 가톨릭」, 독일 「가톨릭」, 영국 「가톨릭」 등 사실 말한다면 거의 끝없는 명단이 있읍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첫째 가는 한 영적 나라의 성원이라고 생각합니까? 전쟁할 때도 그들은 그렇게 보며 그렇게 행동합니까? 그 대답은 괴롭게도 명백합니다. 그들은 모두 충성과 애국주의라는 주장을 가지고 즉 보통 인간의 육적 수준으로 그들의 국적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다른 수준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의 교회가 말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읍니까?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 무자비하게 짓밟히게 된다면 첫째로 「프랑스」인이며 독일인이며 영국인이 되고 그들의 종교적 유대는 둘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일한 논점이 일반적으로 신교 교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7. 하나님께서는 숨겨 있는 지혜를 누구에게 알리시지 않으셨으나, 누구에게 이것을 어떻게 알리셨읍니까?

7 기독교국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영적 견해를 인식하는데 있어 통탄하게도 실패하였다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기록과 그것이 영감 받았다는 사실을 비평하는 지위에 있는 기독교국의 교직자들 및 대변인들은 어떠합니까? 사도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을 때 그것은 얼마나 참된 말이었읍니까!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 .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 . .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필자들의 영감의 원천 즉 하나님의 성령이 있읍니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이 있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도구를 막 변화시키려 하고 계셨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 고무적인 일이 있은 후로는 그들이 그러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을 뿐만아니라 친히 여호와께로만 올 수 있었던 영적 개념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인식합니까?—고린도 전 2:7-10.

영적 성전

8. (ㄱ) 보통 전 혹은 교회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ㄴ) 성경은 이 점에 관하여 그리스도인 교회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8 이 동일한 제목을 다짐하기 위하여 한가지 면에만 더 당신의 주의를 돌리고 싶읍니다. 여호와의 도구로서의 육적 「이스라엘」에게 자격을 주는 여러 가지 일들을 열거하였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산에 위치한 그들의 성전에 유의하였읍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그들의 숭배의 중심지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새로운 도구인 그리스도인 교회가 성전을 가지고 있읍니까? 본래 전이란 한가지만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나 다른 물질로된 대 가람으로서 신의 봉사에 바쳐진 건물이었읍니다. 기독교국의 사원 혹은 교회는 대중적 그리스도인 숭배의 장소입니다. 어느 경우에서나 그것은 지도 상에 표시할 수 있으며 찾아낼 수 있는 문자적인 건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 교회의 전은 어디 있읍니까? 그 대답은 즉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영적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었거나 혹은 그러한 일을 들어본자가 누구이겠읍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참다운 교회를 『거룩한 나라』라고 말한 같은 장에서 그는 보다 앞서 각 성원들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 [혹은 전] 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말합니다. 그 분은 『모퉁이 돌』로 놓였읍니다. 그 얼마나 드높은 개념입니까!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베드로 전 2:5, 6; 고린도 전 3:16.

9. 기독교국이 이 견해를 인식합니까, 이 점은 어떻게 증명됩니까?

9 우리가 다시 한번 묻거니와 기독교국이 이 점을 인식합니까? 기독교국은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세상적으로 기울어진 정신적 영향 때문에 『교회』라는 말 자체가 그 본래의 의미를 대부분 상실하였읍니다. 성경 「흠정역」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희랍 단어 「에클레시아」(ekklesía)의 번역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그의 도구로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회중을 의미합니다. (마태 16:18; 사도 5:11; 11:22; 로마 16:5 참조) 그 희랍 단어는 건물로 사용된적이 전연 없었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라고 말할 때나 혹은 교회에 간다고 말할 때에는 변함없이 문자적인 건물 혹은 숭배의 장소를 말합니다. 막대한 많은 돈이 어떤 역사적인 건물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누가 이것과 관련하여 회중의 영적 건강을 생각하여 봅니까?

10. 계시록 7:15에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은 무엇을 하도록 격려합니까?

10 이 우울한 기록에 관한 제목을 제거하느니보다, 우리는 당신에게 계시록 7장에 기록된 영감을 주는 환상을 연상해 보시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처음 팔절에서 우리는 참다운 교회의 설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 뒤를 이어 『각 나라』에서 나오는 『큰 무리』에 관한 설명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참으시는 동안에 「사단」의 세상에 임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의를 사랑하는 자들을 표상합니다. 장래의 생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낙원의 땅에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현재 봉사 지위는 어떠합니까? 기록은 말합니다. 『그들이 . . .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어떤 지적 건물에서 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도구인 참다운 교회의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과 밀접하게 연합하여 섬김으로써 큰 즐거움과 만족을 가지고, 용납될 수 있게 그리고 활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우고 있읍니다. 극히 소수인만이 예배 때에 직접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국의 교회들과 같지 않아, 하나님의 영적 전에서는 모든 사람이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그의 이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라는 초청을 받고 있으며 도움을 받고 있읍니다. 당신은 이 제사의 일부를 즐기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 면에 있어서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요?—계시 7:9-15; 히브리 13:15, 신세.

11. 영적 「이스라엘」과 육적 「이스라엘」 사이에 어떠한 비교를 더 해볼 수 있으며, 그 결론은 어떻게 내릴 수 있읍니끼?

11 지금까지 우리는 육적 「이스라엘」을 선택된 도구로 만든 두가지의 자격 즉 그들의 국적과 성전을 살펴봤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영적면으로만 참다운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보와 왔읍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육적 「이스라엘」의 다른 자격들 즉 그들의 제사직과 대제사장, 또한 그들의 제물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도구에서 어떠한가 표시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필자들은 「히브리」 성서의 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각 면마다 새로운 개념 즉 영적이며 천적인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어진 약속들이 포함됩니다. 그들이 비록 동일한 견해에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두 집단의 성경 필자들 사이에는 놀라운 내적 조화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거기에는 충돌이 존재하지 않읍니다.

12.그리스도인 필자들은 그들의 영적 개념의 근거를 어떠한 권위에 두었읍니까?

12 질문이 한가지 더 있읍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 필자들이 사물에 관한 개념에 대하여 어디로부터 그 권위를 받았읍니까? 그들이 인간보다 더 높은 수준에만 둘 뿐 아니라 전연 다른 수준 즉 영적인 수준에 두고 있으니 만치, 그들이 전연 새로운 원천으로부터 그들의 권위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읍니다. 그들의 기록들이 거듭 표시하듯이 그들은 그 새로운 개념에 대한 지지를 바로 그러한 고대의 「히브리」 예언자들의 기록으로부터 얻었다는 점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더듬더듬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기록을 땅 바닥까지 낮추어 영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3. 「바울」은 (ㄱ) 참다운 「이스라엘」과 (ㄴ) 불리움을 받은 새로운 백성과 (ㄷ)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받아들이시는데 관한 자기의 주장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13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로마서 9장에서 말한 사도의 주장을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구의 변화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 . 곧 육신의 자녀 [흔히는 탄생됨으로써]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는데 있어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중에서 「이삭」이 탄생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아이가 된 것과 같읍니다. (히브리 11:12) 그리고 나서 「히브리」어 성서로부터 더 인용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자를 택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고대 예언자들이 하나님께서, 결국 「호세아」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듯이, 이전에 인정하시지 않으셨던 한 백성을 택하실 것을 예언하였다고 증명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호세아 2:23; 1:10) 그 다음 그는 더 인용하여 이방인들인 『열방의 백성』들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다고 증명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그 의로운 입장을 얻지 못하였읍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듯이 「이스라엘」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즉 율법의 행위에 의지 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두분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의 기록을 인용하여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라 말하였읍니다. (신명 32:21; 이사야 65:1)—로마 9:6-8, 25, 26, 30-32; 10:19, 20.

14. (ㄱ) 제사직과 제물 및 (ㄴ) 할례에 관하여 어떠한 점들이 더 증명됩니까?

14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필자들의 사물의 개념의 씨 혹은 뿌리가 말하자면 「히브리」어 성서에 묻혀 있었다 즉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발견됩니다. 예컨데, 「바울」은 동물의 제물보다 훨씬 나은 가납될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을 마련할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요구되었듯이 「레위」 제사장은 아니라고 표시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바울」은 그들의 성서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체 [즉 육적 자손]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브리 7:15-17; 시 110:4) 또다시 「스데반」도 최고 법정에서 자기를 변론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읍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돌 성전과 다르며 더 높은 것을 예표합니다. (사도 7:48, 49; 이사야 66:1) 「바울」은 또한 영적 「유대」인들(그리스도인들)의 할례에 관하여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율법)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러 세기 전에 육의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마음의 할례에 관하여 말하였던 것입니다.—로마 2:29; 신명 10:16; 30:6.

15. 성서의 내적 조화는 무엇을 증명하여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15 그리스도인 필자들의 그러한 훌륭한 영적 개념을 표시하면서도 「히브리」어 성서의 본과 그다지도 조화하는 더미를 이룬 이 모든 증거를 보고도 그 영감과 기원에 관하여 어찌 인간에게 명예를 돌릴 수 있겠읍니까? 처음 경우에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는 것이 확실히 사실인것 같이, 예언을 적절히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지혜를 행사하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결정될 수 없었으며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언의 저자께서 자기의 정하신 때에 그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 입니다.—베드로 후 1:21.

한 인간의 작품인가 흑은 하나님의 작품인가?

16.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한 나라로서 어떻게 발전하였읍니까?

16 이제 우리는 다른 면의 증거에 주의를 돌려봅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직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 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첫째로, 우리는 당신에게 215년 그 이전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가족 문제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 「야곱」에게 환상 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것은 큰 주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기록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 . . 심히 강대하여.』 (창세 46:3; 출애굽 1:7) 그들 전부가 「애굽」에 머무른다는 것은 고생이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목축업자들이었으며, 『「애굽」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그래서, 그들은 「애굽」인들로부터 떨어져서 『「고센」 땅에』 거하였읍니다. 그러한 환경 하에서 강력하고 독립적인 국가 방침 혹은 정부 제도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거나 불가능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습이 되어 온 족장 계통에 따라 농업 사회로서 어지간히 단순하게 살고 있었읍니다.—창세 46:34.

17. 「모세」의 탄생으로부터 「이스라엘」은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그것은 어떤 사건으로 이끌었읍니까?

17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리하여 최소한 80년간 즉 「모세」의 탄생 시로부터 「애굽」을 나올 때까지 사람들의 생활은 『고역으로 . . . 괴롭게 하니 . . . 엄하였더라.』 그곳에서 국가적으로 발전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그런 때에 열가지 재앙이 임하였으며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이스라엘」은 『중다한 잡족』과 함께 무사히 홍해를 건넜읍니다. 「애굽」의 대군이 뒤 따랐으나 전멸 되었읍니다. 그후 삼개월이 채 못되어 「「이스라엘」이 산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쳤읍니다.」 이 때가 「이스라엘」 역사상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읍니다. 그것은 정말 그 백성들의 구별 되었으며 독립된 나라로서의 존재의 시작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국가와 정부의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발전되었읍니까?—출애굽 1:8, 14; 12:38; 19:1, 2.

18. 「시내」 산에 있는 동안에 「모세」는 오경을 어느정도까지 기록하였겠읍니까?

18 다음과 같은 일이 버러졌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셨으며 또한 노예, 상한데 대한 배상, 도적질의 경우, 유혹, 대차관계라든가 또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많은 『율례』를 주셨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읍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에 「모세」는 교훈을 더 받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갔 읍니다. 그리하여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무슨 결과가 있었 읍니까? 모든 증거는 「모세」가 「시내」 산에 있는 동안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와 아마 민수기의 서두 몇 장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지적합니다.—출애굽 21:1; 24:18.

19.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남자 「모세」가 어떠한 것을 생산한 것이 됩니까?

19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기록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인간 저작으로 여긴다면, 몇 달 동안에 한 남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사와 종교 양편의 국가 생활의 모든 면에 대한 폭넓으며 섬세한 청사진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단 기본 법인 십계명 뿐아니라, 그리고 무수한 민사적인 성격의 규례들 뿐 아니라, 그 한 남자가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과 숭배에 관하여 모든 섬세한 세칙을 망라하는 성문 교훈을 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언약궤와 성막의 구조와 내부와 둘러있는 뜰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의 겉옷과 그들의 임명식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용되어야 할 물자들의 완전한 세목과 그 색과 치수들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읍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레위기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각각 다른 종류의 제물들을 규정한 모든 율법을 가지고 있읍니다.

20. 이 모든 것을 한 남자에게 돌린다는 것은 왜 불가능 합니까?

20 이 모든 것을 한 남자에게 돌린다는 것은 솔직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대단히 세밀한 점은 고사하고라도 전 개념이 그다지도 높은 질서의 것입니다. 아무나 혹은 어떤 정부도 그와 대등한 것이나 혹은 그것에 가까이 나마 갈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낸 적은 없었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이전에 다루신 족장 사회에 잘 제정된 법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모세」의 대부분의 사업은 온전한 국가 형태로 피어나는 한 백성의 새로운 숭배 제도를 준비하는 성질의 것이었읍니다. 비록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다고는 하지만 이방인의 생활과 숭배의 본으로부터 베꼈다고는 잠시나마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사도 7:22.

21. 더 나아가서 어떤 증거가 「모세」와 다른 성경 필자들이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합니까?

21 두 가지 점은 더 유의할만 합니다. 한 국가가 법률 제도를 진전시켜서 조절하며 개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는 흔히 여러 세대가 걸리는 법인데,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은 털 끝 만치라도 그렇게 수정된 일이 없었읍니다. 다른 한가지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그리고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율법의 여러 면들을 다루어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림하였는가를 표시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세」가 미리 알 수도 없었으며 인도할 수도 없었던 일을 어떻게 기록하여 그것으로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의 예표가 되게 할 수 있었겠읍니까? 사실상, 사도 「바울」이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그 옛 율법에 아름답게 비쳐있는 여호와의 새로운 도구의 하늘의 본을 어떻게 볼 수 있었겠읍니까? 「모세」뿐만 아니라 「바울」과 모든 다른 성경 필자들이 여호와의 위대한 서적을 기록하도록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감을 받았다는 확신을 얼마나 주고 있읍니까!—히브리 10:1; 9:23.

22. 율법은 한 마디로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이것은 「모세」의 기록과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22 「모세」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읍니까? 십오세기 이상이 지난 후에 다른 성경 필자는 그 율법 언약이 어떻게 제거되게 되었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즉 언약)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형주]에 못박으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른 곳에서 동일한 성경 필자는, 인간적으로 말하여, 전체 법전을 한 마디로 다시 기록합니다. 즉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리고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주장하며 입증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사랑 즉 감정적인 일이 지배적인 그런 것이 아니고 친히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엿보이며 예증된 바와 같은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기록한 모든 것처럼 볼만한 것은 못되지만 훨씬 더 깊이 들어갑니다.—골로새 2:14; 신세; 로마 13:10; 갈라디아 5:14; 요한 1서 4:16.

2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말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축북과 전망이 기다리고 있읍니까?

23 그리하여, 우리가 이 제목을 어느 모로나 면으로 생각하든 간에 일단 올바른 견해를 얻고 보면, 어느 때보다도 정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과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소멸할 수 없는 기념물이라는 것을 더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인 전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뿐아니라 그것이 한 모든 예언의 전망의 확실성에 온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였으며 온 마음을 다하여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한 백성인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 세계 사회는 지금 얼마간의 이러한 좋은 일들을 경험하고 있으며 당신도 거기에 참예할 수 있읍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몸소 말씀하신바와 같읍니다. 『내 . . .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디모데 후 3:16; 시 31:5; 이사야 55:11, 12.

24. 성경과 관련하여 어떠한 질문이 더 생기게 됩니까?

24 성경과 같은 어떤 한 권의 책이나 혹은 장서를 적절히 평가하고자 한다면, 저자의 성품을 잘 안다는 것이 큰 도움, 아니 그보다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성경과 그의 저자에 관한한, 이러한 우리의 특별한 고려는 가치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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