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의 질문
● 「제임스 왕 역」성서에서 마태복음 28:9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를 만난 여자들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때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것은 예수가 경배되이서는 안된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과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삼위 일체 신봉자들은 혹은 적어도 예수께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제 이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살아 계시고 참된 하나님의 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바치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읍니다. 삼위 일체 신봉자들에게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 숭배의 행동을 실천하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신명기 책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셨는데, 「제임스 왕 역」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태 4:10) 이런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경배하는 것을 막으셨읍니다.
「제임스 왕 역」 마태복음 28:9을 읽어 보면,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물론 「제임스 왕 역」 성서 번역자들이 여기에 사용된 「희랍」말을 영어로 『경배(혹은 숭배)하였다.』로 번역함으로써 그들의 삼위 일체 신봉자들의 견해를 지지하고자 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스미즈」와 「굳스피드」저 「완전 성서, 미국 역」이 마태복음 28:9을 어떻게 번역했는가를 살펴 보는 것온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그들을 만나 「안녕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을 꼭붙잡고 그 앞에서 땅에 닿도록 절하였다.』 「신세계 역 성경」은 『그들이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말합니다. 부활되신 예수께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이나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를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읍니다. 만일 그것을 의미했다면, 고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절하였기 때문에, 인간 창조물 숭배의 죄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 계시록을 전달한 천사는 「요한」이 천사를 숭배하고자 했을 때 그를 말리어,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숭배하라고 말하였읍니다.—계시 19:10; 22:8.
「제임스 왕 역」이 『경배하였다』라고 번역한 마태복음 28:9의 「희랍」어 단어는 「프로스키네오」(proskynéo)입니다. 이 「희랍」어 단어가 「희랍」어 「70인 역」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은 창세기 23:7을 번역할 때, 「희랍」어 「70인역」에 나옵니다. 그 곳을 「제임스 왕 역」에서 읽어 보면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사람들 심지어 「헷」의 자녀들에게도 절하고.』 영국 「런던」의 「사무엘 바그스타 및 아들들 출판사」가 발행한 서적으르서 『70인 역, 영문 대역 구약』이라는 제목의 서적은, 「70인 역」 「희랍」어 성귀에 이 「희랍」어 동사 「프로스키네오」를 나타내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그 땅 사람들 심지어 「헷」의 아들들을 숭배했다고 말하지 않고, 「희랍」어 「70인 역」의 이 영어 번역은 창세기 23:7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일어서서 그 땅 사람들 즉 「켓」의 아들들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 신봉자들이 마태복음 28:9에 대한 「제임스 왕 역」이나 다른 어떤 삼위 일체 역본의 번역이 예수를 삼위 일체의 한 성원으로서 우리가 숭배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는 주장은 이 삼위 일체 신봉자들의 논점이 매우 약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임스 왕 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희랍」어 동사 「프로스키네오」를 『경배하다』라고 번역하였읍니다. 심지어 계시록 3:9도 그렇게 번역하였는데,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들로 「사단」의 회당을 만들겠다. 그들이 「유대」인이라고 말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너희 발 앞에서 경배하게 만들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 온 것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 여기에서 「제임스 왕 역」은 그 번역의 빈약함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삼위 일체 신봉자들은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의 추종자들도 숭배할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왕 역」이 끝까지 「프로스키네오」를 『경배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근대 번역들은 일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읍니다. 이 변화는 「히브리」 말과 일치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동사 「샤하」(shahháh)가 「희랍」어 「70인 역」에서 「프로스키네오」 동사로 번역되어 있으며, 그것이 창세기 23:7에 나타난 「히브리」어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왕 역」은 이 「히브리」어 「샤하」를 여러 곳에서 『절하다, 굽히게하다, 겸손하게 간청하다, 웅크리다, 엎뜨리다, 납짝 엎뜨리다, 경의를 표하다, 존경을 표하다, 경배하다.』라고 번역하였읍니다. 「희랍」어 동사 「프로스키네오」가 「히브리」어 단어 「샤하」와 동일한 것이므로, 「프로스키네오」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행하여져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가장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게만 돌려야 할 숭배를 항상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읍니다.
「미국 역」 같은 다른 번역들은 이렇게 할 필요를 인정합니다. 「웨이마우즈」의 「근대어 신약」은 마태복음 28:9을 이렇게 번역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음에 갑자기 그들이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 앞에 땅에 닿도록 절하였다.』 1961년에 발행된 「신 영어 성서」는 이 성귀를 이렇게 번역했읍니다. 『갑자기 예수께서 그들의 길에 계셨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 앞에 업뜨렸다.』 그러므로 다른 번역들과 같이 이 번역들은 「제임스 왕 역」이 「프로스키네오」를 『경배하다』로 번역함이 옳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정확히 번역된 마태복음 28:9은 우리들이 단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숭배하지 예수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과 절대로 모순되지 않읍니다.
● 1964년 4월 1일 호 「파수대」 126면에서 『우리는 결코 「코스모스」의 끝, 결말 혹은 종말을 읽어 볼 수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서 3:6이 「노아」의 날에 「코스모스」가 멸망을 당하였다고 말한 사실을 고려할 때, 「파수대」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여기에 『끝』 『결말』 『종말』이라고 사용된 말들은 번역에 있어서 사용된 근본 「희랍」어 날말들입니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신세계 역」은 「텔로스」(telʹos)를 『끝』으로 그것과 관계있는 「희랍」어 「신테리아」(syntel’eia)를 『결말』 혹은 『종말』(초판)로 번역했읍니다. 이 낱말들은 사물의 멸망보다도 항상 시간이나 완결 혹은 목적이나 마지막에 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텔로스」 즉 끝까지 사랑하신 것을 읽을수 있으며, 그의 천년 통치 「텔로스」 즉 끝에, 그는 왕국을 그의 아버지께 다시 바치실 것을 읽을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의 「텔로스」 즉 끝인 영혼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을 읽을수 있읍니다. 특히 주목할 가치있는 점은 여호와께서 시작이요 「텔로스」 즉 끝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중 어느 경우도 우리는 『끝』을 『멸망을 당하였다』는 말과 대치할수 없읍니다. 그렇지 않읍니까?—요한 13:1; 고린도 전 15:24; 베드로 전 1:9; 계시 21:6.
「텔로스」가 이러한 뜻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달리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읍니다. 야고보서 5:11에서는 『결과』라고 디모데 전서 1:5에서는 『목적』 이라고 번역하였읍니다.
「신텔리아」에 관하여는, 이것 역시 멸망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읍니다. 오히려 「바인」 저서 「신약 단어 해석 사전」은 이 단어가 『전부를 완결에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고 . . . 계획에 있어서 여러 부분의 종결 혹은 종말을 표시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복음 13:39은 『사물의 결말 혹은 [신텔리아]이며.』라고 되어있읍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에게 같은 『결말』 혹은 「신텔리아」에 대하여 질문했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침내 그들을 떠나실 때, 『사물의 제도의 결말 [혹은 신텔리아]까지도 항상』 그들과 함께할것을 약속하셨읍니다.—마태 24:3; 28:20.
이와 관계있는 「희랍」어는 「신텔레오(synteleo)」라는 동사입니다. 「신세계 역」에서 이 단어는 동일한 점을 지적한다고 말할수있읍니다. 「누가」는 이 말을 예수의 단식의 날이 결말된 것을 말할 때와 「사단」의 세번째 유혹으로써 예수에 대한 그의 유혹이 결말된 것을 말할 때 사용하였읍니다.—누가 4:2, 13.
이 「희랍」어 단어들이 「코스모스」와 관련되어 사용된 아무 곳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신세계 역」은 『세상』 혹은 「코스모스」를 말할 때, 영어 동의어를 사용하지 않읍니다. 베드로 후서 3:6이 세상, 인류 사회, 「코스모스」가 멸망을 당하였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도 있읍니다. 그것은 단지 폭행에 의하여 온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에서 그 때에 인류 족속이 그 결말, 그 종결, 그 종점, 혹은 목적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사용된 「희랍」어 단어 「텔로스」, 「신텔리아」, 「신텔레오」와 이의 영어 동의어들이 강연, 통치, 봉사의 기간, 사물의 제도 혹은 시대에 적용됨이 합당하고, 인류 족속이나 「코스모스」에 적용되지 않음을 볼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인류 족속은 종결에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께서는, 인류 족속이 마치 인류 족속이 살고 있는 땅처럼 영원히 존속할 것을 목적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코스모스」가 있을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홍수때 「코스모스」가 멸망을 당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류에게 적용되는 「코스모스」였읍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새로운 「코스모스」 혹은 세상을 형성했다고 말하는것은 이치적일수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홍수 이전의 「코스모스」 혹은 세상의 일부로 이전에 존재 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세상을 위해 죽으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