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본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데살로니가 후서 1:5.
1. 침례자 「요한」의 전도 봉사 때에 어떠한 대조적인 일이 있었읍니까?
침례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로 그의 전도 봉사를 시작하였읍니다. 그는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전도 봉사의 축복에 참여했던 제자들을 모았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였읍니다. 동시에, 그는 합당치 못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때가 임박하였음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음과, 뒤에 오시는 이가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것을 말하였읍니다.—마태 3:1, 2, 7-12; 데살로니가 후 1:5.
2. 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예수께서는 자기의 전도 봉사에서 그러한 본을 어떻게 짜기 시작 하셨읍니까?
2 뒤에 오시는 이인 예수께서는 「요한」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동일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읍니다. (마태 4:12, 17) 그는 거기서 심판의 본을 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즉 특정한 목적에 따른 조정되는 조화하는 설계를 만들기 시작하셨읍니다. 왜냐 하면 본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때의 요소인 첫째 가닥은 왕국소식을 전파하는 일로써 표시되었읍니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조금 전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읍니다.—누가 16:16.
3. 누가 복음 16:17, 18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어떠한 두 가닥을 취하셨읍니까?
3 다음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두 가닥을 더 취하셨읍니다. 첫째 가닥에 관하여 그는 『무릇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 다음에 그는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부언하셨읍니다. (누가 16:17, 18)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 이 두 가지 말씀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 회중이 사도 「바울」의 영감받은 기록을 갖게 된 이후에야 입장이 분명하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록을 통하여서만 오늘날 그러한 두 가닥을 검토할 수 있으며 그러한 가닥의 계획된 목적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여 율법을 성취시키셨으며 어떠한 실체와 마지막 결과로 인도하였읍니까?
4 예수께서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율법을 지키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 시키셨읍니다. 그가 한 때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시고 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읍니다. (마태 5:17, 18)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 [상징적 예표]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바울」 은 기록하였읍니다. (골로새 2:17; 히브리 8:5; 10:1) 예수께서는 자기의 생애와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커다란 실체 곧 몸이 이루어지게 하셨읍니다. 율법의 주된 마련 중의 하나는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의 마련 특히 속죄일에 행한 희생의 마련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짐승의 희생은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읍니다. 그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10:11, 12) 그의 죽음은 커다란 변화를 위한 기초를 놓았으며 그에 대하여 믿음을 실천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유익을 주었읍니다. 그것은 『나사로』 반열에 속한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읍니다. 율법의 마련을 성취시켜 버렸기 때문에 이전 율법 언약은 폐하여졌으며 예수께서 달리신 형주에 못박혔다고 「바울」은 말하였읍니다. (골로새 2:14) 그러나 그것은 다음 가닥인 이혼과 간음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는 무슨 관계가 있읍니까?
5. 「바울」은 무슨 비유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알려 주었읍니까?
5 예수께서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읍니다. (히브리 9:14, 15)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전에는 그들의 율법 언약 아래 매여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읍니다.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 . .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자기 형제들 곧 『나사로』 반열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이었읍니다.—로마 7:1-6.
6. 예수께서 이혼에 대하여 어떠한 표준을 세우셨으며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읍니까?
6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혼과 간음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주로 『부자』 반열인 「바리새」 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읍니다. 율법에서는 이혼의 마련을 제정하고 있어서 한 남자가 살아 있는 아내를 하나 이상 가질 수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새 언약 안에서 혹은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원래의 본을 적용시키셨읍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이혼의 마련이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어느 그리스도인이 성적 불충실의 이유 외에 이혼을 하고 이혼당한 배우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재혼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간통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하여 그들의 전통과 당시에 성문화되지 않은 「탈무드」에 의존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초의 일부였읍니다.—신명 24:1-4; 마태 19:3-9.
7.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어떻게 예측하셨읍니까?
7 이처럼 우리는 심판의 본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보증된 그 변화는 그가 실제로 죽으시기 이전부터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침례자 「요한」과 예수 두 분의 말씀과 사업은 율법과 예언서에 예언되었고 전영(前影)된 모든 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수행하시리라는 강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를 증거하여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시기 전 저녁에 자기 죽음의 기념식을 제정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잔을 권하시면서 『이 잔은 여러분을 위하여 쏟아지게 될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고 말씀하시고 계속하여 『왕국에 대하여,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한 언약을 맺으신 바와 같이, 나도 여러분과 한 언약을 맺』겠다고 말씀 하셨읍니다.—누가 22:20, 29, 신세.
8. 예수의 왕국 선포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일어났읍니까?
8 그러한 변화는 지체되지 않았읍니다. 왕국의 기쁜 소식의 선포는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두 가지 반열에게 입장을 완전히 역전(逆轉)시켜 주었읍니다. 그 때부터 두 가지 반열은 다 이전의 상태와 경험에 있어서 죽었읍니다. 예수의 비유에 있어서는 「나사로」와 부자의 죽음으로 나타났읍니다. 「모세」의 율법의 성취로서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 「나사로」 반열도 그 율법에 대하여 죽었읍니다. 그 후 오순절에 그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크신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읍니다. 예수께서 묘사하신 바와 같이 그 다음에 발생된 사건과 그의 의미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 보겠읍니다.
「아브라함」, 중요한 인물
9, 10. (ㄱ) 예수께서는 비유 가운데서 어떠한 중요한 인물을 등장시키셨읍니까? (ㄴ)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과 자기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였읍니까? (ㄷ) 그들의 결론은 어떤 점에 있어서 옳았으며 어떤 점에서는 그릇되었읍니까?
9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부자가 「하데스」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서 무엇을 봅니까? 이전에 거지였던 자가 지금은 멀찌기 저기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식탁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자리에 기대어 앉은 경우와 같이 그 품안이라는 것은 총애를 받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누가 16:23; 또한 요한 13:23, 참조)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것은 깊은 의미가 있으며, 심판의 본 전체에 가장 중요한 가닥을 부가시킨 것입니다. 그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예수께서 직접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종교적인 세력가로서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품안을 즐길 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평민들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읍니다. 이 세력가들은 이전에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고, 또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였고, 또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요한 8:33, 39, 41.
10 이 점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견해는 옳았읍니다. 그들이 그릇되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사실이었읍니다. 하나님의 견해로는 이 관계가 혈통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씨와 활동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다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읍니다.—요한 8:39, 44.
11.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는 왜 믿음이 필요하였읍니까?
11 이상의 사실로 보면, 예수께서 한 때 부자였던 사람을 「아브라함」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설명되지만,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직접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옮겨간 것으로 묘사된 이유는 명확치 않읍니다. (누가 16:22) 여기서 강조한 점은 믿음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던 바와 같이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같이 오셨읍니다. (로마 8:3; 이사야 53:7)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데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였읍니다. 교만하지 않고 비천한 사람들 소수만이 그러한 믿음을 나타냈읍니다. 그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그의 고향을] 나갔』던 바와 같이 믿음으로 출발하였읍니다. (히브리 11:8)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읍니다. 그들에 대하여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기록하였읍니다.—로마 8:4-16.
12. 믿음에 고착한 사람들은 어떻게 더욱 축복을 받았읍니까?
12 「바울」은 또한 아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 . .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하였읍니다. 어떻게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읍니까? 「아브라함」은 자기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웅대한 약속을 받았읍니다. 그 씨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하고 과분한 친절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도 그 씨의 일부분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참여할 특권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 .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 3:7-9, 16, 26-29; 창세 22:18.
13. (ㄱ) 처음 경우에 있어서 「나사로」 반열은 누구로 구성되었읍니까? (ㄴ)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요한」과 예수는 어떻게 사자 역할을 하였읍니까?
13 그러므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성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은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졌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아브라함」의 씨 곧 왕국에 집중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사로』 반열을 형성합니다. 그들은 영적 필요를 의식하였고 하나님의 사자들인 침례자 「요한」과 예수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에 믿음을 나타낸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읍니다. 사실상 「요한」과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맹세로써 주신 약속과 관련된 이러한 웅대한 축복을 위한 대열 안으로 데려오는 데 있어서 사자 곧 천사의 역할을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로」가 즉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묘사하신 것은 당연합니다.—누가 16:22.
14. 많은 비「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 어떻게 암시되었읍니까?
14 『나사로』 반열은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었지만 그대로 계속 되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는 독특한 믿음을 보인 이방 군인 장교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8:5-12) 이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거지와 같은 상태에 있던 많은 비「유대」인들도 사방에서 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을 뜻하였읍니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읍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라디아 3:8) 그러나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으로서 틀림없이 하나님의 왕국의 요직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하던 자들은 배척을 당하고 고초를 당하게 되었읍니다.
15. 예수께서는 마태 복음 8:11에서 무슨 훌륭한 신권 정부의 그림을 주셨읍니까?
15 이 경우에 「아브라함」과 함께 「이삭」과 「야곱」을 포함시킴으로써 완전히 조직된 신권 정부인 왕국을 훌륭하게 묘사하였읍니다. 믿음에 고착하는 자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방에 대한 모든 축복의 참 근원이신 하늘의 아버지 여호와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그의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드릴 때에, 즉 드릴려고까지 할 때에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독생자를 실제적인 희생으로 바칠 것을 예표하였읍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상징합니다. 「야곱」이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인 회중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읍니다. 이들 회중은 충성스러운 「유대」인 남은 자들로 시작되었읍니다. 그러나 오순절이 지난지 삼년 반 후에 왕국의 기쁜 소식은 이방인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하였읍니다. 처음으로 전파 받은 이방인은 「고넬료」였읍니다. 그 이래 사방으로부터 이방 사람들이 들어와서 전체 수를 채웠읍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사로』 반열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판결, 『큰 구렁』
16. 부자의 요청은 「나사로」에 대한 그의 진정한 의도를 어떻게 나타냅니까? 그리고 어떠한 성품을 드러냅니까?
16 이제 우리의 주의를 예수의 비유의 후반부에 돌려서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살펴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을 또 보게 됩니다. 이차에 걸친 부자의 호소를 살펴 보십시오. 먼저 그는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로, 불로 인하여 고통하는 자기의 혀를 시원하게 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 점에 대하여 실패하자 그는 「나사로」를 보내어 고초의 장소에 대하여 자기의 형제 다섯명에게 경고하여 달라고 호소합니다. (누가 16:24-28)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품에서 떼어 놓으려고, 그를 멀리 있게 하려고 마구 부탁한 것입니다! 천사들이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얼마나 속히 데려갔는지를 보았으면서도 왜 그는 천사들을 보내어 이러한 자비의 심부름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뛰어다니며 사자 역할을 할 사람은 반드시 「나사로」여야만 하였읍니다. 예수께서 부자를 묘사하신 대로 본다면 물론 그 부자의 혀를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만일 「나사로」가 실제로 가서 손가락을 그의 입에 넣었더라면 그 부자는 「나사로」의 손가락을 붙잡고 거기에 붙들어 놓았으리라고 상상할 수 밖에 없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우며, 생기면 저희보다 두배나 더 「깨헨나」의 자식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마태 23:15.
17. 종교적 세력가들은 어떻게, 왜 「나사로」 반열로부터 고통을 면하고자 하였읍니까?
17 이 일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겠읍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염두에 두셨던 반열을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이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잘 부합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여 봅니다. 만일 종교적 세력가들이 『나사로』 반열로부터 물 한 방울만 받는다면 어떻게 시원함을 얻을 것인가? 만일 멸시받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단지 그를 추종하기만 하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들은 별로 심한 고초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훈련을 받고 보냄을 받았읍니다. 처음에는 열 두명, 후에는 칠십명이 보냄을 받았읍니다. 이제 세력가들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활동하며 하늘에서 보낸 축복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합니다. (누가 9:1, 2; 10:1, 9) 오순절이 되어서는 약 120명이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방언을 했고, 그 날 그들의 수에 3천명이 부가되었읍니다. 그리고 그들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공중 앞에서나 「산헤드린」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스데반」과 같은 제자들은 그들 세력가들의 책임과 피흘린 죄를 거리낌 없이 외쳤읍니다. (사도 2:23; 3:14, 17; 4:10; 5:30; 7:52) 『부자』 반열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기 때문에 그들은 상징적으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궁홀히 여기사』 『나사로』 반열이 그러지 말고 단 한 마디라도 우리에게 유리한 말을 하게 하옵소서 하고 외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하였읍니까?
18. 「아브라함」의 대답은 어떻게 심판의 본을 양편 다 알맞게 묘사하였읍니까?
18 「아브라함」의 첫 마디는 단순히 사실만을 표현하였읍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누가 16:25) 부자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헛된 말이 없었읍니다. 왜 없었읍니까? 왜냐 하면 예수께서는 자기가 검열의 때에 하나님의 종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는 참으로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누구든지 그러한 씨에 대하여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읍니다. (창세 12:3) 그 반열을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부자』는 『살았을 때에』 한창 좋은 시절을 누렸으며 그 때에 그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손쉽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좋은 것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그 반열은 나누어 줄 의향이 조금도 없었음을 나타냈으며 이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불리한 심판이 내려졌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판은 『나사로』 반열에게 골고루 내려졌읍니다. 이것은 마치 한쪽 편은 균형을 잡고 다른 편은 지워 버리는 도면상의 설계와 같은 심판의 본이었읍니다. 한 중간에 크고 곧은 선이 뚜렷이 그어져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큰 구렁』이 있는 곳입니다. 부자에게 한 「아브라함」의 다음말을 살피보십시오.
19. 『큰 구렁』의 효과와 중요성은 무엇이었읍니까?
19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누가 16:26) 화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읍니다! 『나사로』 반열은 『부자』 반열에게 타협하여 그들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심판의 본에 있어서 이것이 중요한 가닥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와 같은 것을 알고 계셨읍니다. (시 36:6) 혼동하지 마십시오. 최종적인 심판을 받은 것은 그 반열 전체로 볼 때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반열도 또는 그들을 지지하는 어느 반열들도 상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읍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건너갈 수 있으며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건너간 이들도 있읍니다.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나사로』 반열을 호되게 박해하였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좋은 예입니다. (갈라디아 1:13-17) 침례자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한 다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후에 그렇게 하였읍니다.—마태 3:7, 8; 사도 6:7.
20. 그 부자는 또 어떻게 호소하였으며, 그것은 예수 당시에 어떻게 적용되었읍니까?
20 『부자』 반열의 정신 태도를 아는 예수께서는 그의 비유에 대화를 더 부가시킵니다. 그 대화는 부자의 말로 시작하여 더 계속됩니다. 그 구렁을 무시 내지는 소홀히 여기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누가 16:27, 28)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그가 더 가까운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아버지의 집에 그의 형제 다섯이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인간 전통 위에 세워진 「유대」교라는 종교의 집을 알고 계셨읍니다. 그 집에 종교적 세력가들이 속하여 있었읍니다. 혹독한 박해 심지어 살인까지 한 것은 이 집이었읍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인한 자』인 마귀였읍니다. (요한 8:44) 다섯 형제들 (그 부자와 합하여 여섯명, 마귀의 조직의 상징)은 종교적 세력가들을 찬양하고 지지하며 동일한 정신을 나타내는 모든 자들을 상징하였읍니다. 세력가들은 폭로되지 않도록 안전함을 얻으려고 하였읍니다. 자기들의 보기에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지지자들 보기에도 폭로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형제들이 상징적으로 죽어서 동일한 장소에 놓이게 된다면 그들의 고통이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 세력가들은 『나사로』 반열이 하나님의 은혜받는 입장을 중지하고, 심판의 소식이 아니라 세력가들이나 그의 지지자들이 폭로되어 고통을 받지 않던 검열 기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같이 보이는 소식을 『증거』하기를 바랐었읍니다.
21. 「아브라함」의 대답의 취지는 무엇이었읍니까?
21 그렇게 될 수 있었읍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하였읍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누가 16:29)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외의 것이나 그만 못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어야 했읍니다! 그 당시 마땅히 전해야 했던 심판의 말씀까지도 포함하여 예수께서 백성들과 세력가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사로』 반열도 마찬가지로 말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강력하고 감동적인 연설은 전적으로 「히브리어 성경」 즉 「모세」(율법)와 예언자들과 시편으로부터 인용한 내용에 근거하였읍니다.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즉시 응하여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 그 자체만 가지고도 기꺼이 듣는 자에게는 충분한 경고와 인도가 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게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유대」교인들이었읍니다.—사도 2:41.
22. (ㄱ) 부자의 마지막 호소는 무엇이었읍니까? (ㄴ) 어떠한 생각에서 이러한 말이 나왔읍니까?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읍니까?
22 그러나 그 부자는 잠잠하지 않았읍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어 무뚝뚝하게 「아브라함」에게 이의를 나타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누가 16:30) 다시 말하면, 그는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굉장한 이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전파나 「유대」교 전통의 폭로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기타의 사람들은 적어도 한번 이상 예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읍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에 충분한 표적이었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읍니다. (마태 16:1-4; 12:38-41) 예수께서는 「요나」보다 훨씬 더 큰 권위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전도하셨읍니다. 그러나 그 전도의 결과는 예수께서 그들에 대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았읍니다.—요한 4:48.
23. 「아브라함」의 최종적인 말은 어떻게 적절하며 사실과 일치합니까?
23 이러한 말씀과 일치하게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읍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아니하리라.』 (누가 16:31) 이것이 그 부자와 그의 형제들로 대표된 반열에 대한 심판의 마지막 말씀이었읍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아 버린다면 하나님의 사자들에 대하여도, 설사 그들이 예수이건 『나사로』 반열이건, 그들에 대하여도 눈을 감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 . .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렇게 부언하셨읍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한 5:39, 46, 47.
24. 이 비유의 마지막 말로부터 어떠한 경고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읍니까?
24 예수의 비유는 그 『큰 구렁』처럼 명확하고 강력한 심판으로 끝을 맺었읍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은 편이나 저주를 받은 편에게나 하나님께서 의로 판결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귀찮게 듣는 모든 족속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을 공격하는 비유였읍니다. (마태 13:15)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 마지막 말은 전적으로 『나사로』 반열에 이로운 말씀이었읍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위치를 떠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렇게 하는 일은 정당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완전히 위안을 받는 자리이며 여호와의 연회석에게 잔치를 즐길 기회를 가지는 자리입니다.
25. 이 비유는 우리 시대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들을 일으킵니까?
25 우리 시대에도 유사점들을 볼 수 있으며 그의 모든 특징들을 가진 심판의 본을 살펴 볼 수 있읍니까? 예수의 비유에는 우리를 위한 내용이 들어 있읍니까? 우리는 대조적인 두 가지 반열을 볼 수 있으며, 커다란 상태의 변화 즉 역전이 어떻게 우리의 목전에서 일어났는가를 볼 수 있읍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개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판 아래서 참 부를 찾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를 배우는 데 이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