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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로부터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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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8
파68 12/1 551-552면

독자로부터의 질문

● 지난해, 저는 경제파탄을 당하였읍니다. 귀지를 구독한 이래 파산선고를 신청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성서에 이 문제에 관한 교훈이 있읍니까?—미국의 한 독자로부터.

물론 성서는 파산에 관한 현대법을 논하지 않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부채를 지불하지 않는 자는 투옥되었읍니다. (마태 18:23-34)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바로부터,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견해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의 몇 가지 점을 얻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선, 현대법에 의한 “파산”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그 다음에, 성서가 그 문제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검토하고, 성서가 주는 충고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현대 국가는 파산법을 제정하였읍니다. 파산법이 나라에 따라 다르나, 보통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 한 가지는, 부채를 많이 지고는 약속한 대로 갚기를 거절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인과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에 대한 강제 파산 선고를 신청하여, 그의 재산을 팔거나 분배하여 갚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채무자가 고의적으로가 아니라 나중에 채권자들의 요구를 결코 충족시켜 줄 수 없게 된 정직한 채무자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발적 파산선고를 신청할 수 있읍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재산은 채권자들에 대한 일부 지불로 몰수됩니다. 그러나 특정 품목, 이를테면 집 같은 것은 계속 소유할 수 있읍니다. 그 때 그는 새로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며, 전의 채권자들로부터 압력이나 손해를 당할 위협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률은 상업 및 금융 거래에 있어서 쌍방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보호가 필요함은 영어로 “파산”이라는 뜻인 “뱅크랍씨”(bankrupcy)의 어원으로 보아 잘 알 수 있읍니다. 이 말은 “부서진 벤치”라는 의미를 가진 이태리어에서 나왔읍니다. 이것은 중세기에 부채를 갚지 못한 상인의 “벤치” 혹은 계산대를 부서뜨리는 데서 연원하였읍니다. 좀더 가혹한 것으로는 로마의 십이동판법에 의하면, 최후의 수단으로서 채권자는 채무자의 몸을 절단하여, 비례대로 가질 수 있었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자비로운 법과 대단히 대조적입니다! 가난하게 된 동료 히브리인들에게 돈을 꾸어 줄 때는 이자를 받지 않았읍니다. (레위 25:35-38) 채권자가 담보물을 거두러 갈 때,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원하는 대로 집어내 올 수 없었읍니다. 오히려, 채무자가 담보물을 준비하였읍니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절구나 맷돌을 가져 갈 수 없었읍니다. 그러한 것들은 생활을 연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옷을 담보물로 가져 갔을 때는, 밤에 돌려주어야 하였읍니다. 상대방이 밤에 따뜻하게 자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읍니다. (신명 24:6, 10-13; 에스겔 18:5-9) 물론, 지불능력이 없게 된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가 상속받은 토지를 일시 상실하였으며, 노예로 팔려갔읍니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토지는 돌려주어야 하였읍니다. 노예로 팔린 사람을 노예와 같이 혹사하여서는 안되며, 존귀한 고용 일군으로 대우하여야 하였읍니다. 7년간 봉사하였거나, 혹은 희년이 먼저 되었을 때는, 그는 석방되며, 새 생활을 시작할 필수품을 받았읍니다.—레위 25:39-41; 신명 15:12-15.

채권자 측의 이러한 태도는 채무자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빚을 갚음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촉구하였을 것입니다. 언질을 주거나 맹세를 하는 데 관하여, 유대인들은 무엇에 동의하기 전에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일단 맹세하였으면, 그 맹세를 지켜야 하였읍니다. (전도 5:2, 4-7; 신명 23:21-23) 만약 특정률로 특정 기간에 빚을 갚도록 약속하였다면, 약속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합니다. 비록 그 때문에 약간의 위안품이나 사치품을 즐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꾼 사람이 돈을 갚는 것은 채권자가 탐욕적이 되지 않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읍니다.—시 15:4, 5.

불행하게도, 탐욕적인 유대 채권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법의 이 자비롭고 사려깊은 정신을 무시하였읍니다. 채권자들은, 무정하게도,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비천한 노예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기까지 하였읍니다.—열왕 하 4:1; 에스겔 18:12, 13; 아모스 8:4-6; 마태 5:25, 26.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때때로 채권자들은 채무자를 못살게 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예기치 않은 사건을 당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수도 있읍니다. (전도 9:11) 아마, 시간을 더 준다면, 빚을 갚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채권자들이, 질병이나 사고같은 불상사로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대하는 데, 그러한 경우를 참작한다면 합리적 태도일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빌려 준 돈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구박하고, 법을 사용하여 무일푼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채무자가 법에 호소할지 모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의 실제 상태 그대로 파산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채권자는 파산법이 규정하는 방법대로만 문제를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불찰로 혹은 나쁘게 되어서 생긴 불유쾌한 처지를 힘들이지 않고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필요하게 파산 선고를 신청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줄 확신”한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도덕적으로 정직한 행로가 아닙니다. (히브리 13:18)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자기로부터 돈을 빌려 갔을 때에 자기가 받고 싶은 대로 채권자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 7:12) 빚을 졌다면 갚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는 사람을 승인하십니다.—시 15:4.

사실상, 어떤 이들은 법적으로는 특정 채무를 벗어났지만, 그 후에도, 채권자가 돈을 받을 의사가 있다면, 취소된 빚을 갚기 위하여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양심적으로 노력하였읍니다. 이 경우도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역할합니다. 각자는 선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면서, 각자가 할 일을 결정할 수 있읍니다.—디모데 전 1:5.

이 모든 것은 사업 문제에 있어서 동의하기 전에 철저히 검토하고, 자신의 수입 한도 내에서 생활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영감받은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언 21:5) 예수께서는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 먼저 앉아서, 자기가 그 사업을 완수할 만큼 충분한 돈이 있을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경비를 계산하는 사람의 지혜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 있읍니다. (누가 14:28-30) 각자는 빚을 져야 한다면 얼만큼 빚을 질 것인가를 개인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생필품을 마련하고 생활의 만족을 얻는 데 얼마만큼의 물질적인 것들이 필요합니까? 물질적 사치품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경제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까? (야고보 3:17; 누가 12:15-21)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과 일치하게 믿고 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 전 6:8.

●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 책, 326면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의 그림이 나오는데, 한 사람의 피부는 다른 두 사람의 피부보다 검게 나타나 있읍니다. 한 사람의 피부가 검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흑인종은 누구의 후손입니까?—미국의 한 독자로부터.

그 그림은 세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 세 사람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창세 10:1) 다른 두 사람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함입니다. 함이란 이름은 “거무스레한” 혹은 “갈색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뜨거운”이란 의미도 암시합니다. 한 성서 사전 (The Popular and Critical Bible Encyclop\Zdia, 2권 754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든 남부 민족들은 함(희랍어와 같이 검게 탄 얼굴이란 뜻의 히브리어 어근, 카움이 그 어세를 더해준다)의 후예라는 데 중론이 일치한다.” 제임스 해스팅이 편찬한 「성서 사전」(A Dictionary of the Bible)은 함이라는 히브리어와 “검은”이란 의미의 이집트어를 관련시키면서, 이 이집트어는 사막 지방에 비하여 이집트 토양이 검은 것을 암시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함이 그 이름을 출생시 받았다면, 그는 그의 형제들보다 피부가 검은 아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며, 그 그림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읍니다.

함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읍니다. 즉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입니다. 블레셋인과 이집트인은 미스라임의 후손인데 흑인종이 아닙니다. (창세 10:6, 13, 14) 가나안과 그의 후손도 흑인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함의 아들, 붓은 성서 지도상에서 동부 아프리카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의 후손은 흑인종이었읍니다. (나훔 3:9) 함의 아들, 구스는 (아마 붓과 함께) 흑인종의 주요한 선조임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 13:23) 특히 그 후손들이 정주한 지역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창세 10:7) 이러한 사실은 가나안이 받은 저주를 흑인종과 관련시키려는 이론을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구스의 형제인 가나안은 흑인종의 조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여러 가나안 종족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 9:24, 25; 10:6, 15-18) 흑인종은 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전술한 그림은 함이 그 이름의 의미와 일치하게 두 형제보다 약간 더 검은 사람으로 묘사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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