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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직자들이 하고 있는 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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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적 의무가 선행하다
  • 정치 문제에 개입함
  • 그리스도인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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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1/15 27-30면

교직자들이 하고 있는 일

어린 소년이 집에 있는 먼지가 소복히 쌓인 성서를 들고 와서 어머니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책이어요?” 하고 물었다.

“그렇단다” 하고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그 때 소년은 “우리집에서는 한번도 이 책을 사용하지 않으니, 돌려 주는 것이 낫지 않아요?” 하고 말하였다.

1968년 2월 25일 「디스 윅크」지는 “종교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라는 표제를 실었다. 동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가 ‘기업체와 같이 운영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산아 제한 문제가 개인 문제라고 하면서, 교황의 무류성을 배척한다. 수녀들은 번화가의 ‘아파트’에서 살기 위하여 수녀원을 버린다. 신부들은 결혼하기 위하여 무더기로 교회를 이탈한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교회 주교가 이단이란 고발을 받고 있다. 종교 선생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광고한다. . . . 오늘날, 혼란과 독설과 무질서가 만연해 있다.”

이렇게 무질서가 만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가정의 대다수가 그들의 성경에 먼지가 쌓이도록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도 자주 무시하고 경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직자 경멸 풍조가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 경시 풍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및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존경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7:17) 사도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데살로니가 전 2:13.

그러나, 「프로비덴스 저널」지 1967년 9월 30일호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워싱톤’—(‘알엔에스’)—마태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을 한절 한절 분석한 다음, ‘올 세인트 유니테어리안’ 교회의 ‘던칸 하우렛’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그 기도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목사는 주 기도문이 참 의미를 결하고 있다고 신도들에게 설교하였다. . . . 그의 주장의 한 가지 예로서, ‘하우렛’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워싱톤’이나 ‘링컨’이나 ‘케네디’의 이름만큼도 성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귀절은 ‘웃음거리’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드문 예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교직자들이 성서를 경시한다. ‘뉴욕’의 모 일간지는 “교직자가 성서 교리를 비평하다”라는 표제 하에, ‘런던’의 ‘에이취. 스미드’ 목사가 성서 교육은 젊은이들에게 “시간의 낭비이며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에게 자녀들을 “여호와의 징계와 권위있는 충고로 양육”하라고 교훈하였다.—에베소 6:4, 신세.

‘터론토’의 「스타 위클리」지는 제1면에 “십계명은 죽었다”라는 ‘지 고드’ 목사의 발언을 게재하였다. 그 기사가 준 인상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데, 그 십계명은 부적합하며, 전체 「히브리어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성서는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지 않으나 대단히 중요한 원칙과 예언적 모형을 포함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려 준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러한 점에 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로마 6:14; 히브리 10:1.

활력 있고 영감을 주는 성서 소식을 대부분의 교직자들이 너무나 저하시켰기 때문에, ‘오크란드’ 「트리뷴」지의 종교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 . . 30분에서 40분간의 설교를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목사들은 그들의 설교를 10분으로 제한시키며, 15분을 넘지 말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실, 더 제한하자는 과격파도 있다. ‘캐나다’의 ‘피. 버톤’은 「안락한 교회 의자」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미지근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위선자들이다. . . . 일요일 설교의 전반적 문제, 및 그 신념이 결여된 설교는 신념의 사람들이 크게 염려하는 문제이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모든 설교를 유예하자는 . . . 이를테면, 최소한 1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중단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음은 당연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책임은 대부분 교직체가 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신도들의 머리를 너무나 혼란시켜 놓았기 때문에 신도들은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모른다. 교직자인 ‘이. 해리슨’ 씨가 쓴 「하나님 없는 교회」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더 이상 없다」라는 책의 저자인 ‘워너 펠즈’는 영국 교회의 부제이다. 그리스도가 ‘종교를 폐지하였다’고 주장하는 ‘윌리암 에이취. 두베이’는 ‘로마 가톨릭’ 사제이다. . . . ‘설혹 하나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지존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는 ‘잭슨’ 신부는 대학교 교목이다. 「그리스도교 무신론 복음」을 쓴 [사신론자] ‘토마스 알타이저’는 ‘아메리카’ 대학교의 성서과 교수이다. 본인은 ‘터론토’에 있는 성공회 간부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성공회 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성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그리스도인의 표준으로부터 상당히 이탈하였음을 논평하면서, ‘캐나다’ 성공회의 간부였던 ‘버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혁명적 종교로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거의 망각되어 왔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회의 다른 성원들이 가진 것과 판이하게 다른 가치관을 가졌었다. 그 원래의 가치관은 아직도 현 사회의 가치관과 반대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는 원래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하던 세력과 같은 보수 세력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체는 참 그리스도교 교리와 행위를 버렸다. 그들은 예수와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폭로한 바 있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자들과 같다.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태 15:6-9.

사회적 의무가 선행하다

오늘날 교직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 교육과 연구에 바치지 않고, 사회 문제에 바친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는 오늘날의 일반 교직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대신, 그는 . . . 위원회 조직자, 구락부 회장, 열심파 부녀 교인들의 사소한 다툼을 해결해 주는 자이다. 그는 모금가, 건축가, 간담회 연사, 모든 가치있는 지역 개발 계획의 참여자이며 찬조자이다. 다른 일에 동분서주하기 때문에, 그는 명상, 기도, 성경 연구를 통하여 영의 샘을 채울 시간이 있을 때는 문자 그대로 숨지 않으면 안된다.”

「안락한 교회 의자」라는 책도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목사는 교인들로부터 오차 대접을 받고 그들의 비위를 상하지 않는 환담을 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교구 생활로 인하여, 그는 구태의연하다. . . . 사교 구락부같은 분위기를 주는 교구 생활을 볼 때, 교회가 세속적 사회 계급에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 문제에 개입함

교직자가 존경을 잃는 주된 원인의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정치와 전쟁 문제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직자가 특히 전쟁에 있어서, 교전 쌍방을 지지하는 것이 모순되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 점에 관하여, 「뉴욕 월드 텔리그람 앤드 선」지는 1966년 3월 11일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종파의 대표자들은, 어제, 살인을 금하는 성서 법은 월남 전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브룩클린’ 학생 집단에게 역설하였다.”

“대체로 보아서, 그들은 실패하였다. 청중은 . . . 한 학생이 말한 대로 연사들은 ‘우리를 선동하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교직자들은 ‘가톨릭’교, ‘유대’교, ‘프로테스탄트’교를 대표한 사람들이었다. 전쟁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그들 중 한 사람은 “살생을 하되 순수한 심정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군목(軍牧)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현대전의 도덕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군인들의 견해와 대동소이하였다. ‘버톤’ 씨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개개 군인들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 외에 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견해는 ‘이스라엘’에서 재판받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변호 취지와 대단히 흡사하다.”

‘버트란드 럿셀’은 영국의 “성공회는 전쟁과 살상을 포함한 정부의 모든 견해를 옹호하여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교회가 사실에 있어서는 “양심적 항의를 막는” 세력이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관하여, 「뉴욕 타임스」지는 1966년 12월 29일호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는 국가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며, 전쟁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정치가들에게 돌린다. . . .

“과거에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거의 언제든지 자국의 전쟁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축복하고 승리의 기도를 올렸다. 한편 반대편의 주교들은 그 반대의 결과를 비는 공개 기도회를 열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동안, ‘바티칸’ 교황청은 보통 조심스럽게 중립을 취하며, 상호 적의가 빨리 중지될 것을 원한다고 발표하였다. . . .

“복잡한 신학적 설명으로 흔히 모호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전쟁 행위 사이의 모순은, 살상 무기가 점점 더 가공스러워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명확해졌다.”

전사한 어떤 군인의 장례식을 (미국) ‘아이오와·데스모이네스’의 ‘루터란’ 교회 목사가 주재하였다. 1968년 2월 10일호 「리지스터」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말틴 해어더’ 목사는 . . .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고 말하였다.” 그 목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의의 전쟁에서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을 때, 그 죽음은 조국에 봉사한 영광스러운 죽음일 뿐만 아니라, 축복을 의미하는 죽음이기도 합니다. . . . 본인은 천사들이 그의 영혼을 천당으로 데리고 갔으며, 그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목사는 “정의”의 전쟁을 언급하였다. 미국의 ‘전국 가톨릭 협의회’에서 발행한 「교회와 전쟁」이란 소책자는 이 점에 관하여 논평하였다. 동 소책자를 평한 ‘유피아이’ 기자인 ‘루이스 카슬스’는 “그리스도인 전통의 주류는 기원 5세기의 성 ‘오거스틴’이 천명한 ‘정의의 전쟁’이란 교리로 대표된다.” “정의”의 전쟁을 구성하려는 요건이 무엇이라고 ‘오거스틴’은 말하였는가? (1) 부득이한 경우의 전쟁이어야 한다. (2) 전쟁의 유일한 합법적 목적은 가능한한 신속하게 정의롭고 안정한 평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3) 불필요한 살상을 삼가고 폭력의 사용을 극소화함으로써 자비를 나타내는 전쟁이어야 한다.

전술한 소책자를 평하면서, ‘카슬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 쌍방은 ‘전면’전(全面戰)에 급급한 나머지, 폭력의 ‘극소화’를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쌍방은 반대편의 도시에 폭탄 세례를 퍼부었고,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수백만의 민간인이 죽고 부상당하고 집을 잃었다.”

그러나, 항상, 쌍방의 교직자는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간주하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교직자들이 각기 자기네 편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견해

같은 “그리스도인” 종교를 믿는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이 “정의”의 전쟁인가? 누구의 기준에 의하여 그러한가? ‘오거스틴’의 기준? 그러나, 그리스도인 행동과 교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오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보다 더 위대한 권위자인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3:3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같은 말을 하고 . .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 . . 하라 . .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하고 말하였다. (고린도 전 1:10, 13)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죽인다면, 그보다 더한 분쟁이 어디 있겠는가?

일부 교직자들은 그들이 현 세상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과 같은 지지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시인한다. 전 「블랙프라이스」지 편집인이며 영국 신문인인 ‘아이. 에반스’ 목사는 그러한 유혈 행위는 “다른쪽 뺨을 내주는 원래의 그리스도인 전통”과 모순됨을 시인하였다. 「유진 리지스터-가드」지는 1967년 1월 22일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반스’ 씨의 말에 의하면, 기원 313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기원 313년, ‘콘스탄틴’ 대제는 ‘밀란’ 칙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소수 집단에게 ‘로마’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였다. ‘에반스’ 씨는 이것이 정의의 전쟁론의 시초였다고 말하였다.” 그 후, ‘오거스틴’은 이 이론을 체계화하였던 것이다.

“정의”의 전쟁론의 기원을 유의하라. 그 이론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사도들도,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제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정치가들이 만들어 냈으며, 기원 4세기경에 이미 배교한 교직자들이 만들어 낸 이론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 있는 모든 주요 교파의 교직자들 대다수는 ‘콘스탄틴’과 ‘오거스틴’의 비성경적 이론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히틀러’의 전쟁 기구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나치스’ 정부와 군부의 지도자들을 재판한 ‘뉴렘베르크’ 재판소는 그들이 ‘히틀러’의 살인 명령을 수행하였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교직자들에게도 동일한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히틀러’의 대량 살상 명령을 순종하도록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그 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 그리스도인 견해를 옹호하였으며, ‘나치스’ 당의 살인 계획을 수행하기를 일제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중립 입장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집단 수용소를 택하였다. 왜냐 하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사도 5:29.

‘히틀러’가 오래 전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교직자들이 그를 지지하였음이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일부 교직자들은 아직도 그를 추도하며 기념한다! ‘스페인·바살로나’에서 발행하는 「라반가디아 에스파뇰라」지는 1968년 5월 12일호 “‘히틀러’의 영원한 안식을 비는 장례식”이란 표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데센가뇨’ 가에 소재한 성 ‘말틴’ 교회는, 어제, ‘히틀러’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미사’를 올렸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 배부된 기념 ‘카드’를 보면, 이 ‘미사’의 목적은 ‘‘아돌프 히틀러’, 및 그리스도교국과 서구 문명을 옹호하다가 죽은 모든 자의 영원한 안식’을 빌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속함

이 세상의 정치와 전쟁 문제에 개입한 목사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신 도덕률”을 정당화하며, 의(義)보다는 유행에 영합하기 위하여 교리와 행위를 변경시킨다.

‘버나드’ 대학교 2학년 학생이 교외(校外) ‘아파트’에서 자기 남자 친구와 동거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교칙 위반으로 퇴학 명령을 받았을 때, 두 명의 교직자가 그 여학생을 변호하였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는 1면에서 “교직자들이 ‘린다’ 양을 옹호하다”라는 표제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하였다.

“목사와 ‘랍비’와 철학 교수가 그녀를 변호하였다. . . . 그들은 학교가 학생의 사생활 문제를 제한할 법적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 . . ‘콜럼비아’ 대학교의 ‘프로테스탄트’교 ‘카운슬러’로 일하는 ‘윌리암 스타’ 목사는 기숙사 규칙이 ‘엉터리’라고 말했다. . . .

“‘스타’ 목사 다음으로, ‘콜럼비아’ 대학교의 ‘유대’교 ‘카운슬러’인 ‘에이. 브루스 골드만’ ‘랍비’가 증언하였다. 그는 소위 ‘린다’ 양의 용기와 신념을 칭찬하였다. ‘골드만’은 이 재판이 ‘시민권과 개인 권리를 테스트하는’ 재판이라고 말하였다.”

「타임」지도 1968년 5월 10일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여야 하는가? 특정 환경 하에서는 허용해야 한다고 ‘아프리카’ 주재 ‘로마 가톨릭’ 선교사는 주장한다. . . . ‘만약 일부다처제가 그 지역의 고래의 풍습이라면, 그들 모두를—어린 아이와 모두를—교회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건의하였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교는 음행과 간음을 허용하는가? 아니다, 참 그리스도교는 높은 도덕 표준을 옹호한다. (고린도 전 6:9, 10) 그러므로, 교직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와 반대되는 사상을 설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이 승인하시는 참 종교가 될 수 없다.

실로, 교직자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방법, 전략, 교리, 도덕관을 채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야고보 4:4.

하나님의 표준에 입각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종교와 교직자들을 성실한 사람들이 개혁해야 된다고 성서는 촉구하는가? 아니다. 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은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경고한다.—고린도 후 6:17.

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범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는 모든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곧 집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는 곧 멸망을 당할 것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도 멸망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시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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