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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앗시리아’의 역사 기록들과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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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4/15 184-187면

‘앗시리아’의 역사 기록들과 성서

‘사르곤’, ‘딜갓빌레셀’(‘디글랏빌레셀’, 영문), ‘살만에셀’, ‘산헤립’ 등 유명한 ‘앗시리아’(앗수르) 통치자들의 이름이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성서 애독자들의 머리를 스쳐갔다. 세속 역사 기록에는 없지만, 성서는 그들이 ‘유다’와 ‘이스라엘’ 나라와 관계한 일들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사르곤’에 대하여는 세속 역사가들은 오랫 동안 그가 어떤 인물인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 19세기가 도래하여 고고학자들의 활동이 왕성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언덕을 발굴하자 놀라운 사적들이 토출되었다. 특히 ‘폴 에밀 보타’라는 고고학자가 수행한 업적에 대하여 ‘시. 더불유. 세람’은 그의 저서 「신들, 무덤들 및 학자들」 225면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지금까지 두 강 사이의 지역에 관하여 알려 준 것이라고는 성서 뿐이었으며, 19세기의 과학으로 보아서는 성서가 전설의 수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앗시리아’의 호전적인 왕들의 연대기, 왕궁, 공적비, 그들의 “왕명록” 등이 햇빛을 보게 됨에 따라 그 왕들도 되살아나게 되었다. ‘앗시리아’학(學)이 인정된 과학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학자들은 다량의 토출물들을 수집하여 미지의 나라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이제 ‘앗시리아’와 그 통치자들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현대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앗시리아’ 역사 사건들의 연대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앗시리아’ 전문가들은, 장장 수천년 동안 고대 인명들과 사건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던 이 훌륭한 책의 내용을 수정할 만큼 신뢰성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는가? 근동지방의 흙속에서 찾아낸 기록들과 비문들이 이제 성서 연대기를 뒤로 밀쳐 버릴 만큼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그러한 기록들이 고도로 정확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떠한가?

‘앗시리아’의 기록들

‘앗시리아’인들이 남겨놓은 기록들, 비교적 근년에 토출된 기록들은, 왕궁의 벽화같은 곳에서 발견된 “자랑거리 기록들”, 궁정 서기관 혹은 사제 서기관들이 당시의 왕을 찬양하기 위하여 기록한 왕들의 연대기, ‘고르사밧’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왕명록”, 그리고 인명록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 인명록은 저명한 관리들의 이름과 그 옆에 그 해의 유명한 사건이 나타나 있으며, 매년 한 사람씩 기록된 것이다. 이 모든 기록들과 고대의 어떤 천문학 자료를 가지고 ‘앗시리아’ 학자들은 역사를 짜 맞추었다.

그런데 이들 “자랑거리” 기록들과 연대기들은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 그들은 연대 추정의 기초로 삼을 만큼 정확한가? 1945년에 사망시까지 고대 근동 지방 역사에 최고 권위자로 인정되었던 ‘옴스테드’ 교수의 말을 들어 보라. “우리는 ··· 자랑거리 기록들을 연대기(매년 사건들을 열기해 놓은 왕궁 연대기)가 미비할 경우에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다른 것과 상위할 경우에는 추호도 확실성이 없다.” “그것들(자랑거리 기록들) 중에는 연대순으로 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 그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 연대기들에 대하여 ‘옴스테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들이 정규 연대기들이다. 고의적이든 어쨌든 가끔 틀린 곳인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정확하다. ··· 그러나 연대기가 항상 정확하다고 가정하면 큰 잘못이다. 과거의 역사가들은 정확치 않다는 확고한 증거만 없다면 그 내용을 너무 관대하게 인정하였던 것이다. 과거 수년 동안 새로운 자료들이 다량 발굴되었으므로, 그들을 ‘사르곤’ 시대 문헌의 비평 자료로 삼을 수 있다. ··· 이 외에도 ‘히브리’ 및 ‘바벨론’ 등 외국의 자료들도 있다. 연대기가 신뢰성이 없다는 사실은 깊이 연구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앗시리아’ 사료 편찬」(Assyrian Historiography), 미조리 대학교, 사회 과학 총서, 제2권 5, 6면.

또한 ‘디. 디. 룩켄빌’ 교수의 증언을 들어 보라. “왕이 통치하는 동안 매년 발생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서기관들의 근본 동기가 아니었음을 금방 알게 된다. 때로는 서로 다른 전쟁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바꾸어 놓았으며 더구나 왕들의 허영심 때문에 역사를 마음대로 바꾸어 놓은 사례가 허다하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고대 기록들」 제1권 7면.

왕이 통치를 해 나가면서 궁중 연대기를 뜯어 고친 일도 흔히 있었다. 후대에 만든 연대기는 분명히 왕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사건들과 인물을 속였다. 그러한 예로 ‘옴스테드’ 교수는 “[‘앗수르바니팔’이] 자기 아버지가 수행한 과거 두 차례의 애굽과의 전쟁을 조금씩 자기 것으로 돌리다가 결국 마지막 연대기에서는 모든 사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언급하였다.—「‘앗시리아’ 사료 편찬」 7, 8면.

고대의 연대기들을 사건들의 그 진상과 발생 시기 등을 공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러한 왕이 이미 죽어버렸는데 그 당시 그 왕이 자기 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한 예들도 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역사 편찬은 부정직하고 혼란되고 부주의하였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인명록은 경우가 다른가?

‘앗시리아’의 인명록

현대 연대학자들은 ‘림무’ 곧 인명록은 연대기나 비문들과 같이 조작 변경되지 않고 거의 정확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들 인명록이 그 당시의 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인명록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도록 인명록 일부를 다음에 옮겨 본다.

벨하란벨우술 구사나의 (총독) 다메섹에 대항함

살만에셀 그의 왕좌를 차지했다

말둑벨우술 아메디의 (총독) 그 나라에서

마데 니느웨의 (총독) [사마리아]에 대항함

아쑬이쉰메아니 [칵지]의 (총독) [사마리아]에 대항함

살만에셀 앗시리아의 왕 [사마리아]에 대항함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연대가 실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학자들은 각 이름이 일년을 의미하며, 일년에 한 사람씩 기록된 것이라고 가정한다. 현대 말로 한다면 “그 해의 인물”이 그 해의 유명한 사건과 함께 기록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들 인명록에 ‘앗시리아’ 왕들이 나오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왕과 왕 사이의 이름들을 차례로 세어서 왕의 통치 기간을 산출한다. 그 다음에 이 연대에다 ‘앗시리아’ “왕명록”에 나오는 인물과 맞추는 것이다.

인명록의 인물 배열은 상당히 규칙적인 것으로 왕으로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야전 사령관” 그 다음에는 “술잔 드는 관원”, “궁내 대신” 등등의 직위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 순서를 일률적으로 따른 것도 아니며 후대에 가서는 이러한 직위를 가진 고관들이 나타나지도 않고, ‘산헤립’ 시대 이후에 가서는 새로운 왕들의 이름도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 왕의 이름과 다음 왕의 이름 사이에 있는 이름들을 세어서 왕의 통치 기간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일관성 있게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 예로, ‘살만에셀’ 5세는 인명록에서 그 다음 왕까지의 이름들을 세어서 계산한다면 그의 통치 기간이 8년인데 학자들은 5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명한 불일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역사가들은 ‘사르곤’(‘살만에셀’의 계승자)이 인명록을 수정하여 그의 원년에 자기 이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제3년에 기록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명록에 따른다면 ‘사르곤’은 32년을 통치한 것 같은데 학자들은 그가 17년 통치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록에 나타난 자료가 희귀하기 때문에 착오를 알아 내는 일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고, 증거가 빈약함에도, 현대 역사가들은 왕들의 연대기가 인명록과 상위할 때에는 연대기가 틀린 것으로 친다. 좌우간 이러한 기록에는 모호한 점들이 심히 많다.

성서는 철두철미 믿음직하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추정한 연대가 성경에 나오는 연대와 틀린다는 사실은 다음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성서의 연대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므나헴’ 왕은 기원전 791년경부터 780년까지 통치하였고, ‘유다’의 ‘아하스’ 왕은 기원전 761년부터 745년까지 통치하였다. 성서에서 ‘불’이라고도 하는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딜갓빌레셀’) 3세에게 ‘므나헴’도 조공을 바쳤고 ‘아하스’도 뇌물을 바쳤다. (열왕 하 15:19, 20; 16:7, 8) 그런데 ‘앗시리아’ 학자들은 ‘디글랏빌레셀’ 3세의 통치를 기원전 744-727년경으로 잡는다. 그러므로 ‘므나헴’과 ‘아하스’가 죽은 후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의 멸망과 ‘산헤립’이 ‘히스기야’ 14년에 ‘유다’를 침공한 연대도 성서의 연대 기록과 20년 내지 30년 차이가 있다.—열왕 하 17:3-6; 18:9, 10, 13.

우리는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앗시리아’의 역사 기록들은 대단히 정확하고 그 기록 자체가 상호일치하여 신뢰성을 자아낼 만한가? 오늘날 ‘앗시리아’ 학자들이 ‘앗시리아’ 역사를 짜 맞춘 자기들의 공헌에 대하여 우쭐대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역사에는 아직도 많은 공백들과 불일치 점들이 있으며,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의 추측인 만큼 상당한 오차가 있을 것으로 인정하고 여유를 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교국의 기록에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들 가운데에는 현대 학자들이 고대의 기록 방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서 연대기들을 때때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와도 같다. 그러나 연대기들을 정확하게 공정하게 비교해 본다 할지라도 ‘앗시리아’의 설형 문자 토판들은 일방적이고 과장되어 있고 상호 연결이 되어 있지 않는 역사 기록이지만,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의 기록은 놀랄 만큼 정확하고 사실 그대로이고 상호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한 예로, 성서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기록을 읽어 보라. 성서 필자들은 괄목할 만큼 일관성있게, 각 ‘유다’ 왕들의 통치 기간, 왕이 위에 오를 때와 죽을 때의 나이, 그 당시에 재위한 북방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 왕 통치 기간의 주요 사건들, 왕의 충실과 불충실, 그의 선행과 비행, 후계자의 이름, 만일 관계가 있다면 선왕과의 관계 등등을 기록하였다. 연대 계산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근소한 문제들이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어느 이교국의 역사 기록 가운데서도 이에 비길 만한 기록은 없다.

비록 이교국의 기록이 그와 일치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일지라도, 성서 필자들이 솔직 담백하게 기록한 점을 생각한다면, 이들 동일한 필자들이 기록한 연대도 자신있게 받아들일 만하다. 예로서 교만한 ‘앗시리아’의 기록을 보라. 자칭 무적의 제왕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자인한 기록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성서 역사의 기록 가운데는 ‘이스라엘’ 왕들이 ‘앗시리아’까지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 치욕을 당하고 패배한 사실들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므나헴’ 왕이 ‘앗시리아’ 황제 ‘디글랏 빌레셀’(3세)과의 전쟁을 면하기 위하여 1,000,000불 이상에 상당하는 재물을 조공으로 바쳤고, ‘유다’의 ‘아하스’ 왕은 무서워서,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유다’에 대한 그들의 압력을 제거하도록 그 황제에게 뇌물을 바친다는 사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열왕 하 15:19, 20; 16:5-9) 조금 뒤에서 3년간 ‘사마리아’가 포위 당한 후에 북방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되고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이 체포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열왕 하 17:1-6; 18:9-11) 사실을 과장하려 한다거나 다른 사건으로 조작하려 한 증거를 볼 수 없다.

돌판에 새겨지고 점토판에 기록된 고대 ‘앗시리아’의 문헌들이 대단히 인상깊게는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것들이 정확하고 거짓이 없다는 보증이 되는가? 역사 문제에 있어서 신뢰성에 대한 건전한 근거로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겠는가? 기록에 사용한 재료인가? 혹은 필자, 필자의 목적, 진리에 대한 필자의 존경심, 의로운 원칙에 대한 필자의 정신이겠는가? 분명히 후자일 것이다.

오늘날 성서 원본이 없는 것은 분명히 성서가 파괴되기 쉬운 ‘파피루스’라는 종이나 ‘벨럼’이라는 가죽에 기록된 데다가 오랫 동안 사용하여 닳고, ‘팔레스타인’의 기후로 인해 썩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여호와의 영감받은 책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주의 깊이 복사되고 전체가 보존되어 왔다. (베드로 전 1:24, 25) 하나님의 성령이 성서 역사가들로 하여금 기록을 하도록 하였다. 그 영감받은 사실이 성서 연대의 신뢰성을 보증해 준다.—베드로 후 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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