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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물을 용서하는 아름다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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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8/15 363-364면

‘허물을 용서하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여서 저마다 사람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는 아름다운 강, 골짜기와 산, 형형색색의 꽃과 새, 용모가 예쁜 사람들이 있다. 여자들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만불짜리 화장품 제조 공업이 생겼다.

듣기에 아름다운 것도 많이 있다. 감미롭고 잘 어울리는 음악, 새들의 노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속삭임,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그런 것들이다. 어떤 무용극은 소리와 동작을 아름답게 결합시킨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형태는 아름다운 품행 곧 도덕감에 호소하는, 이상에 호소하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품행이다. 이런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적합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사전에 의하면 인간의 “눈이나 심미감, 지성, 혹은 도덕감을 즐겁게 해 줄 고차적인 자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옛날 성서 속담에 언급되어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아름다움, 신세]이니라.”—잠언 19:11.

분명히,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감정적 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명하고도 어려운 일을, 즉시 같은 식으로 응수하는 수월한 길을 택하는 대신, 감정을 억눌러 통제한다는 표시이다. 신체적으로 풍채가 좋은 사람이 아름다운 것처럼, 도덕력의 본도 아름답다. 그것은 관대함의 한 가지 형태이므로 아름답게 보인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아름답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다음의 경험이 알려 주듯이 꼭 그럴 수 있다. 햇빛이 화사하게 비치는 어느 여름 일요일 오후, 노인 내외가 ‘브룩클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십대 소년이 그들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곧장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년은 그들과 맞닥쳐서야 급정거하였다. 소년의 무례함에 역정이 난 노신사는 발로 그 소년을 차버렸다. 그러자 소년은 자전거를 버려두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노신사를 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노부인은 소년에게 “어른을 존경해야지!” 하고 엄하게 말하였다. 이 말에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가버렸다.

이 실화는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 종종 아름답지 못한 일을 빚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노신사는 겸연쩍고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성난 소년의 주먹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신사가 간단히 허물을 용서했다면 부인이나 소년이 보기에 얼마나 더 좋았겠는가! 그렇게 했더라면 아름다울 뻔했다.

성서에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원칙을 증명하는 많은 본이 있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본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에 대하여 시편 필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분은]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허물을 용서하는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길러야 한다. 대체로 자녀들은 급히 앙갚음을 하려 든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이 앙심을 품는 대신 허물을 용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어른이라도 특히 내성적이고 과민한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그런 이들은 허물이 있을 때 이러한 현명한 충고를 상기할 것이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잠언 24:29.

분명히 예수께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 5:39) 많은 사람들은 이 충고가 평화주의를 가르친다고 오해하고 비평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칠려고 때릴 때 기꺼이 더 맞겠다는 것은 어리석다. 도망하거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지각있는 일이다. 사실 각자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이유 때문에 조롱과 모욕을 퍼붓는다면, 즉 상징적으로 오른뺨을 친다면 그때에 취해야 할 고상하고 지혜로운 행로는 친절함과 온유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행동을 상대방은 왼뺨을 돌리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행로를 취하셨다. 왜냐하면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말하자면 마치 왼뺨을 돌려 대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베드로 전 2:23.

물론 다른 성서의 증거는 제쳐 놓고 한 가지 성서 원칙을 곡해해서는 안된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나 범행을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서는 악행을 묵인하는 자들을 강력히 정죄한다.—시 50:18; 이사야 5:23.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이 보복의 정신을 나타낸다. 보복하기가 일쑤고, 종종 같은 식으로 또는 덤을 붙여 응수한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약하고 어리석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힘과 지혜와 관대함의 발로이다. 따라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허물을 용서하는 아름다움을 항시 나타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천적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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