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69 9/15 411-412면
  • 과신을 경계하라!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과신을 경계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 비슷한 자료
  • 교만과 과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 생활과 봉사—집회 교재—2021
  •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날씨
    깨어라!—2011
  •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 벤-하닷
    성경 통찰, 제1권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9/15 411-412면

과신을 경계하라!

적절히 자신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며 유익한 일이지만, 세속 역사와 성서 역사는 과신이라는 올무를 피하도록 경고해 준다. 고대 ‘바벨론’은 과신하다가 ‘고레스’의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명한 ‘프랑스’ 작가이며 역사가인 ‘빅토르 위고’는 ‘워털루’ 전쟁시에 ‘나폴레옹’이 가졌던 과신을 이렇게 말하였다.

“황제가 지금처럼 기분이 누그러진 때가 일찌기 없었다. . . . ‘아우스텔리츠’(여기에서 수년 전에 ‘나폴레옹’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에서 초조했던 사람이 ‘워털루’에서 명랑했다. ‘웰링턴’이 퇴각할 때는 통쾌감에 사로잡혔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후퇴하는 적을 전멸시켜버리는 것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돌연히 돌아서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리도록 ‘파리’로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 승리하였는가? 참으로 승리는 그의 손아귀에 있었는가? 그는 그의 과신으로 말미암아 속단을 내렸지만 역사는 그 반대로 기록되었다. 사실 너무나도 크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워털루”라는 말은 “결정적인 혹은 비참한 패배, 혹은 역전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것은 그의 과신이 한 가지 원인이었다고 결론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한 권위자는 그 점을 논하면서 “‘프랑스’ 황제는 지휘할 때 보통 때와 같은 신중과 철저를 기하지 않았고, 행정상의 대범한 판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만만했지만 날씨와 같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는 패배한 것이다.

성서 역사도 과신이라는 함정을 지적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시리아’의 왕 ‘벤하닷’이 한 때 ‘이스라엘’ 왕에게 “네 은금 . . .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들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 왕은 양보하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주 왕이여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벤하닷’ 왕은 과신한 나머지, 더욱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 그는 그의 신복이 ‘이스라엘’ 왕과 왕의 신복들의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다 잡아가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리한 요구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왕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고 전갈을 보냈다.

이 말을 듣고 ‘사마리아’에 대하여 자기가 할 일에 ‘벤하닷’은 자신만만해 하였다. 그런 태도에 대하여 ‘이스라엘’ 왕은 “갑옷 입는 자가 [승전하고 돌아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두 왕과 군대가 접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이 대승을 거두게 하셨다.—열왕 상 20:1-21.

그리스도인 사도 ‘베드로’도 과신으로 인한 난관을 겪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팔리던 날 밤에 열 한 명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부하면서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 .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의 과신은 큰 슬픔으로 인도하였다! 직후에 그는 그의 주인을 세번 부인하였다.—마태 26:31-35, 69-75.

과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장래는 항상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과신은 무분별하게 행동하게 하고 슬픔을 당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지른 심각한 잘못을 예로 든 다음, 그런 일들이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느니라. . .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하였다.—고린도 전 10:5-12.

미래에 대하여 과신하기는 커녕 지혜는 우리로 ‘여호와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도록 지시한다. 어느 때나 어느 면으로나 우리는 여호와를 무시해서는 안된다.—야고보 4:15; 잠언 3:6.

당신은 새로운 일, 새로운 직업 혹은 새로운 임명에 당면하였는가? 그렇다면 “문제 없어!”라고 하거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잘 안다는 식의 태도를 갖는 과신을 경계하라.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라는 잠언은 실로 참되다. 그러므로 겸손하라.—잠언 11:2.

젊은이들은 특히 과신이라는 올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얼마의 지식을 갖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때나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가? 그들은 차를 간절히 운전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력은 얼마나 건전한가? 그들이 결혼하고자 열망하는 것이 적어도 한편으로는 과신 때문인지 모른다. 대개 그들은 결혼이 동반하는 책임과 짐을 가볍게 취급한다. 감정적으로 비장성된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십대의 결혼의 절반이 이혼으로 끝나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연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과 관련하여 과신을 경계해야 한다. 과신은 적절한 준비를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결과 연사는 겉으로는 번지르르하지만 막연하고 부정확하게 될 수 있다. 특히 “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며 연설의 목적이 청중을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세워주는 것임을 명심하라.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본을 세웠다. 그는 그가 마땅히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에베소 6:18-20.

과신이 항상 지각없는 일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신중, 겸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속 역사와 성서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