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69 9/15 413-418면
  • 행복한 인내자와 불행한 낙오자—어느 쪽인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행복한 인내자와 불행한 낙오자—어느 쪽인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가장 중요한 활동
  • 그리스도인의 인내
  • 오늘날의 실정
  • 소극적 태도는 인내심을 약화시킨다
  • 인내의 본이 되는 ‘예레미야’
  •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유사점
  •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인내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3
  • “인내하신 분을 면밀히 고려하십시오”
    ‘와서 나를 따르십시오’
  • 승리를 얻게 하는 인내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1
  • 당신은 ‘예레미야’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는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9/15 413-418면

행복한 인내자와 불행한 낙오자—어느 쪽인가?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 10:39.

1. 왜 많은 사람들이 작정한 진로를 인내하면서 가지 못합니까?

시시 각각으로 변모해 가는 현 시기에 누구든지 작정한 진로를 인내하면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역과 고뇌도 많고 경쟁과 반대도 많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경주에서 끝까지 달릴 힘이 없거나 담대히 버티어 나갈 힘의 근원이 없읍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목적 혹은 목표가 그렇게 힘든 노력과 인내를 보이기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낙오자가 됩니다.

2. “낙오자”가 된 사람들은 왜 불행합니까?

2 무슨 일이든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완성했을 때에 느끼는 용솟음치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읍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이 다소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인내하여 마침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낙오자는 인내자가 당면해야 하는 책임과 압박을 회피하여 잠깐 동안은 홀가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오함으로써 불행한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임을 잃게 되고 양심상 괴로우며 자존심이 꺾이기 때문입니다. 작정했던 것이 올바르고 가치있는 일이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의 생활은 실패입니다.

3. 작정한 진로로 출발할 때 인내하기 위하여 어떠한 것들을 고려해야 합니까?

3 생활에 있어서 낙오자가 아니라 완성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네 가지 주요한 점을 고려하여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첫째로, 그는 그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올바른 것이며 그와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아닌지를 가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가 이용할 방법이 공명정대한 것인지 면밀히 검토, 확인해야 합니다. 세째로, 인내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네째로, 이 모든 것을 확실히 한 다음에, 전진할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누가 14:28-33과 비교.

4. 일단 목표를 향하여 출발하였다면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진로를 정하고 나서는, 성공적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결정한 진로를 마치는 데 요구되는 힘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빌립보 3:12-16) 그는 목표를 향하여 직진(直進)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을 부단히 반성하고 옆으로 이끌려가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때때로 그의 진로를 바로 잡아가면서 본래의 진로로 되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똑바로 전진한다면 마침내 그는 끝까지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 후 13:5.

가장 중요한 활동

5. 유일한 보람있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5 인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다소간 도움이 되는 활동 분야는 많이 있읍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을 하다가도 현재 세상 상태로 말미암아 실망하여 주저앉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노력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전인류는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남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행로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 있는 유일한 행로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생명이 없다면 유익하고 즐거운 어떠한 활동도 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람있는 목표로 인도하는 그러한 길이 있읍니다. 사실 그 길만이 우리 시대에 전적으로 보람있는 일이며 성공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유일한 행로입니다. 그 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왕국에 대한 봉사입니다. 인류를 위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창조하시고 마련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국을 통하여 이 땅에 의롭고 영속적인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의로운 상태 아래에서 끝없는 생명을 즐기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넣어 주신 성품을 가장 만족하게 나타낼 것입니다.—이사야 9:6, 7; 25:7, 8.

그리스도인의 인내

6. 인내에 대한 세상의 견해를 묘사하십시오.

6 인내에 대한 합당한 견해를 고려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내”라는 말이 불유쾌하게 들립니다. 인내에 대한 세상의 견해는 구명정에 탄 조난자의 경험에 비길 수 있읍니다. 그런 사람은 본의 아니게 위경에 처한 것입니다. 그의 생명은 풍전등화입니다. 그는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인내할 것입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오랜 시련을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행히 구명정에서 구제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너무 기진맥진하여 얼마 동안은 남이 먹여 주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그가 남을 도와 준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읍니다. 그것은 시련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억지로 고통을 견딘 불유쾌한 경험입니다.

7. 인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는 세상의 견해와 어떻게 다릅니까?

7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가 인내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인내에는 많은 반대, 고통, 핍박은 물론 일상생활상의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인내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구명정에 탄 조난자와 달리 그는 그가 지향하는 목표와 인내하는 이유를 알고 자진적으로 출발합니다. 그는 또한 여호와께서 자기 편임을 압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중에 주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영적으로 먹기 때문입니다. 조난자와 같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점점 건장하여져 갑니다. 그는 남도 인내하도록 도와 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시하는 나머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증진됩니다. 그는 인내할수록 약해지는 대신 더욱 강건해집니다. 그의 목표는 확실하고 분명하며 그는 행복합니다. 목표와 이유를 알고, 그의 인내는 그가 옳은 행로를 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는 기쁨 가운데 인내할 수 있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이러한 사실로서 격려하였읍니다.

8. ‘바울’은 핍박과 환란을 인내하는 것이 무엇의 증거라고 하였읍니까? 왜 인내자는 슬픈 기색을 하지 않습니까?

8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후 1:4, 5) 그러한 인내는 인내자와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그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만사가 그의 예상대로—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언한 대로—진행되기 때문에 그는 불평할 근거도, 불평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리가 없읍니다. 그는 그의 인내가 짐이나 되는양 슬픈 기색을 하지 않습니다.

9. 성경은 인내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9 성경은 인내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 중의 하나라고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 친히 지적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인내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누가 21:19, 난외주 참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였음을 칭찬하였읍니다. (데살로니가 전 1:3) ‘베드로’는 다른 그리스도인 성품에 이 중요한 성품인 인내를 더하라고 충고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1:6) 성경은 떨어져 나가거나 그리스도인의 행로를 버리거나 경주에서 낙오되지 말라고 재삼 재사 경고합니다.—히브리 10:38, 39; 디모데 후 4:10; 마태 24:13; 히브리 6:4-6; 계시 2:10.

오늘날의 실정

10. 인내에 대한 그리스도교국의 실정은 어떠합니까?

10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가 되는 행로를 걷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인내하고 있음을 관찰하였읍니까? 그리스도교국에는 수백만 명의 낙오자들이 있으며, 법과 질서에 대한 불경의 정신이 급상승하고 있읍니다. 무엇보다도 교직자들간에 낙오율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는 안절부절하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것을 내다보시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4:12)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성서 연구생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국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의 일부이며 따라서 이들 교직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 아님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과 도움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낙오되는 것은 당연합니다.—계시 18:2, 21; 예레미야 51:58; 이사야 40:30, 31.

소극적 태도는 인내심을 약화시킨다

11, 12. (ㄱ)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부분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ㄴ) 무엇으로 보아서 어떤 사람들의 인내심이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읍니까?

11 그러나 여호와와 왕국을 통한 그의 목적에 대한 지식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으로 헌신한 사람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그들 대다수는 인내하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일부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사랑과 기쁨을 다소 상실하고, 왕국 봉사를 부담이 되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만일 우리가 야외 봉사를 하면서 어서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만을 기다린다면, 우리의 즐거운 인내심이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내심을 쇄신할 일을 심각히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는 적신호입니다.

12 또한 어떤 사람이 전시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데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듣던 사람이 “그건 나에게 해당되지 않아. 나는 원래가 매일같이 그런 일만 할 사람이 못돼”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선교인이 되고 싶다든가, 더 넓은 구역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로 이사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왜 그런 일을 하려고 그러지? 여기서 사는 것도 행복한데.” “어떻게 벌어 먹으려고 그러지?”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여기처럼 병원 시설도 없을 텐테” 하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읍니까? 그런 말은 그들의 인내심이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게다가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의 인내심까지도 무너뜨립니다.

13. 우리의 인내는 무엇을 동반해야 하며, 예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예시하셨읍니까?

13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할 일을 주셨고 그들이 그것을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전도 3:12, 13) 예수께서는 극심한 시련을 당하시면서도 즐거워하셨읍니다. 그는 30세에 전도 봉사를 시작하실 때, 그가 ‘유대’인들의 손에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셨읍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미리 그 이야기를 하셨읍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그에게 감소되었읍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하였읍니다. (히브리 12:2) 예수께서는 기쁘게 자기의 행로를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셨고, “나와 함께 내 멍에 아래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였을 때 그들이 그 행로를 홀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셨읍니다. (마태 11:29, 신세 1950년판 각주 참조) 심지어 자기의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가서 형주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실 때가 촉박하였음을 아시면서도 그는 기쁨을 잃지 않으셨고 주위의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제자들을 강화시키셨고 불굴의 용기를 고취시키셨읍니다. 실로 그는 죽으시기 바로 전날 밤에 그의 제자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가장 격려적이며 힘을 돋구는 연설을 하셨읍니다.—요한 14장부터 17장까지.

14. 우리의 인내에 있어서 천사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14 지금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께서는 거룩한 천사들을 통솔하고 계시며, 수행되어야 할 전파사업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는 그의 휘하의 천사들을 책임있는 직무에 임명하여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의 선포를 감독하고 계십니다. (마태 24:14, 신세; 계시 14:6, 7) 천사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읍니다. (히브리 1:14) 이들 천사들은 전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수사하여 흠을 잡아내고 그들을 문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하여 최대의 관심을 쏟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의 입증과 직결되어 있음을 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충성을 유지함으로, 지상의 인간이 하나님께 충성을 지키지 못하고 시험을 받으면 이기심이나 공포심 때문에 인내하지 못하리라는 ‘사단’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천사들은 여호와의 종들의 태도와 행동을 주시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와 연합과 인내 가운데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할 때 뛸듯이 기뻐합니다. (고린도 전 4:9; 11:10)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합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봉사를 위하여 하나님께 의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필요한 도움을 즉시 베풉니다. 그리스도인 증인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역사하고 있고 천사들이 후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인내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읍니다.—시 34:7; 열왕 하 6:15-17.

인내의 본이 되는 ‘예레미야’

15, 16. 누구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인내의 본이 됩니까? 그리고 그가 인내의 행로를 시작했을 때 환경은 어떠하였읍니까?

15 성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라고 알려 줍니다. (로마 15:4) 성서에 기록된 생활 행로로서 우리에게 인내에 크나큰 힘을 주는 사람들 가운데 ‘예레미야’가 있읍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인내의 성품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예레미야’에게 관심의 촛점을 돌리는 것은 유익할 것입니다.

16 ‘예레미야’가 봉사할 당시에 ‘유다’ 왕국은 어지러운 상태에 있었읍니다. ‘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은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일을 시작하기 거의 백년 전에 ‘앗수르’ 나라의 손에 넘어 갔읍니다. ‘유다’ 왕국은 자매 왕국이었던 열지파 왕국이 추구한 불충실한 행로를 그대로 따랐고 나중에는 더욱 악해졌읍니다. ‘예레미야’가 등장하기 전에 ‘므낫세’ 왕은 ‘바알’ 숭배를 장려함으로 가일층 악화시키어—나중에 그는 개심했지만—‘유다’는 계속 그런 악에 푹 젖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때가 되면 ‘예루살렘’을 파멸시킬 것이며 ‘유다’의 거민을 끌려가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읍니다.—역대 하 33:18, 19; 열왕 하 21:13, 14.

17.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자가 되는 일이 자신의 인내에 대한 시험이 될 것임을 어떻게 알았읍니까?

17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아버지와 같이 악하였읍니다. 그가 2년간 악한 통치를 하고 기원전 659년에 ‘요시야’가 왕위를 계승하였읍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에 대하여 예언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은 ‘요시야’ 통치 제13년이었으며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40년 전이었읍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에 참 숭배를 회복하고자 진력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땅에는 악이 범람하였읍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직분에 불리움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일이 그에게 인내의 시험이 될 것을 알았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유대’인들이 항쟁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억눌려버릴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께서 ‘예레미야’를 후원하실 것이며 그의 편에서 그를 구출할 것이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말은 무엇이든지 말해야 하였읍니다.—예레미야 1:7, 8, 17-19.

18. ‘예레미야’가 그의 소식을 전하는 데는 왜 인내가 요구되었읍니까?

18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이 큰 반대를 초래할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밝히셨읍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특히 ‘유다’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군왕들에게 그들의 면전에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다고 폭로시켜야 하였읍니다. ‘유다’의 옷단에는 무죄한 자들의 영혼의 핏자국이 있으며(예레미야 2:26, 34), ‘유다’ 나라는 음녀와 같고(예레미야 3:1), ‘유다’는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다고 말해야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1:3-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바벨론’ 왕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였읍니다. 이러한 언사는 ‘유다’의 방백들이 생각할 때 사형에 해당하는 반역죄이고 매국적인 언행이었읍니다. (예레미야 27:12, 17) 뿐만 아니라 그는 ‘유대’인들에게, ‘바벨론’이 그들을 정복하여 그들을 70년간 억류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읍니다. 참으로 그것은 맹렬한 소식이었읍니다.—예레미야 25:7-11; 32:24, 36.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유사점

19. ‘예레미야’의 경험과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험과 다섯 가지 뚜렷한 유사점은 무엇입니까?

19 ‘예레미야’의 행동을 조사해 보는 것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적절한 일입니다. 그들은 보통 이상의 주의를 그에게 돌려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경험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험과의 유사점은 쉽사리 알 수 있읍니다. 첫째로, 임무가 여호와의 심판의 긴급한 선포라는 점, 둘째로, 여호와의 열심있는 종들의 영적 재건 사업, 세째로,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골수에서, 꺼지지 않고 그가 인내할수록 점점 맹렬히 타오르는 불과 같았읍니다. (예레미야 20:9) 네째로, 여호와께 헌신한 종들인 ‘유대’인들의 태도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소수의 사람들과 같았읍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사업을 지지할 수 있었건만, 그들은 서로의 믿음과 여호와 안에서의 기쁨과 열성과 영적인 마음을 침식하여 생명을 위태롭게 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인내의 필요성입니다.

20. ‘예레미야’는 그렇게 모질게 인내하고도 왜 행복합니까?

20 예수의 이부 동생이며 그의 충실한 제자였던 ‘야고보’는 “보시오. 우리는 인내로 끝까지 견디어 낸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야고보 5:11, 새번역) 끝까지 인내한 ‘예레미야’는 행복하였읍니다. 그는 그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다윗’ 계통의 왕이 잡혀갈 때까지도 인내하였읍니다. 그는 ‘바벨론’ 사람들이 그 땅에 남겨 둔 ‘유대’인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도 예언 사업을 계속 하여, 도합 40년 이상을 점점 험악해만 갔던 임명 구역에서 여호와의 봉사에 인내하였읍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성전이 훼파되는 것을 보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사실상 그는 「애가」를 기록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돌려진 치욕에 대한 깊은 슬픔을 표현하였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자신이 여호와의 참 예언자임이 입증되는 것을 볼 때 행복하였읍니다. 그의 예언하는 일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서글프게 비난하는 불평을 오늘날 영어로 “예레미야드”(jeremiad)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는 그의 전파가 결실을 맺는 것을 보았읍니다. 즉 그의 소식에 격려적인 면이 있어서 역시 생명이 보존된 다른 여호와의 찬양자가 있었읍니다. 그 중에 ‘바룩’과 ‘에벳멜렉’이 유명합니다.

21. ‘예레미야’는 어떠한 사람이었읍니까?

21 ‘예레미야’는 40년간 예언하면서 낙오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는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신 분의 충성스럽고 인내력이 강한 숭배자에 속하였읍니다.—히브리 11:16; 요한 1서 2:19.

22. (ㄱ) 여호와께서는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십니까? (ㄴ)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있다면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22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불리움을 받은 예언자로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감동을 받았읍니다. 그는 또한 제사장이었읍니다. (예레미야 1:1) 오늘날 여호와의 말씀은 완전하여 그분께서는 더 이상 사람들을 감동시켜 그를 대변하여 예언하게 하지 않으시지만 지상에 그의 증인들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 위에 그의 영을 두시며 제사장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보내셨고, 또한 전파하도록 사명을 주셨읍니다. 그의 충성스런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기록된 예언과 그 적용을 선포하는 면에서 예언자들입니다. (사도 2:17) “다른 양”의 “큰 무리”인 그들의 동료들은 그들을 도와 천국의 기쁜 소식을 전세계적으로 선포하고 있으며 남은 자들이 발표하는 예언을 선포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믿음과 인내를 유지할 수 있읍니까? 우리는 다음 기사에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고려하겠읍니다.—마가 13:10.

[414면 삽화]

인내에 대한 세상의 견해는 구명정에 탄 조난자의 경험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다르다. 그는 자진하여 그의 행로를 출발하고 점점 강해진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