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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어떻게?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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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73 1/15 44-47면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어떻게?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된다. 왜냐 하면 사도 ‘바울’은 그의 영감받은 글에서 “우리는 각각 자기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고백할”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야고보 2:13, 새번역; 로마 14:12.

우리의 관심을 더욱 높여 주는 것은 온 인류에 대해 심판할 하나님의 때가 대단히 임박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언들을 보면, 신비한 “큰 ‘바벨론’” 곧 거짓 종교 세계 제국과 모든 나라들이 얼마 안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힘을 맛볼 것을 알 수 있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은 “큰 환난” 기간에 직면할 것이다. 그 기간을 살아남는 것은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호의적인 심판을 받는 것에 달려 있다. (마태 24:21, 22; 25:31-34, 41; 계시 17:1-5; 19:11-15) 그 환난의 때가 끝나면 하나님의 아들의 이 땅에 대한 천년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그 “심판 날” 동안에, 살아 있는 생존자들과 부활된 죽은 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태 11:21-24; 12:41, 42; 사도 10:42; 계시 20:12, 13.

그러나 현재에도 ‘자비는 심판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은 장차 오게 될 그 심판 기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세계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자기의 종들과 매일 상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육적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바와 같이 그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여러 가지 정도와 방법으로 호의를 보이시기도 하고 그 반대를 보이시기도 하신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 중에서 어떤 사람을 보다 책임 있는 자리를 주어 높이고 다른 사람을 격하시킴으로써 심판을 하시는 수도 있다. (시 75:6, 7 비교.) 또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 논쟁이 벌어질 때에, 아마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비난을 받고 있다거나 반대를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슷하게 자기의 견해를 나타내시고 그 문제에서 자기가 어느 쪽을 좋아하시는가를 나타내시기도 한다. (시 35:1, 23, 24)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하여 심판관 역할을 하는 장로들이 있음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다. 그들의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있으며,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심판을 나타내시거나 징계를 하신다.—고린도 전 5:3-5, 12, 13; 6:2-5.

‘자비없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함

현재의 어떤 결정적인 때이든지 급히 다가 오고 있는 ‘심판 날’에서든지, 하나님 앞과 그의 임명된 심판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사실대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어떠한 판결을 받을 것인가? 여러 가지 요인들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제자이며 이부 동생인 ‘야고보’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한 한가지 점을 고려해 본다면 크게 유익을 받을 것이다. “심판은 자비를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2:13, 새번역) 우리는 ‘자비없는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어떻게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먼저 영감받은 ‘야고보’의 말의 문맥을 고려해 보자. 그는 앞에서, 회중 내에서 편애하는 것,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보다 우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야고보 2:1-9) 그는 또한 제자들 가운데서 빈궁한 자들을 돕고 돌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야고보 1:27; 2:14-17) 그 다음 회중의 선생으로 활약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더 큰 심판”을 논하면서 혀를—저주하고 해를 끼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축북하고 유익을 주는 방법—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야 함을 강력하게 말하였다.—야고보 3:1-18.

그러면, 우리는 이 점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회중 안에서 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빈한한 사람보다 우대하는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책임의 자리에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호의와 특권과 배려를 주는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고, 물질적 소유나 사업 수완보다는 선한 영적 성품을 분별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도 금전적으로 공헌이 많더라도, 그래도 ‘가난한 과부의 동전’이 가장 칭찬할 만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하는가? 그것은 그가 풍족한 중에서 낸 것이 아니고 구차한 중에서 낸 것이기 때문이다.—누가 21:1-4.

그러나 이것은 자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차별대우와 편애가 자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야고보’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요 율법에 의해서 여러분은 범죄자로 판정된 것입니다.” (야고보 2:8, 9, 새번역) 차별대우와 편애는 자비에 역행하는 것이요 자비를 말살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잠언 21:13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는 경향이 있다.

특별한 고려를 나타낼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땅히 나타내야 할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고려를 나타내는 근거는 그 개인의 훌륭한 영적 성품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디모데 전 5:17은 이렇게 말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바울’을 섬기기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이 사도는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하였다. (빌립보 2:25, 29, 30) 이것은 차별대우가 아니다. 그것은 충실한 봉사에 대하여 합당한 것이며, 당연한 인정을 보이는 것이다.

자비는 참 숭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야고보’는 설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 1:27) 심히 궁색한 형제들의 입장을 볼 때에, 그러한 경건 곧 숭배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잘되기를 바란다는 인삿말이나 그들의 입장이 좋게 되겠지 하는 믿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행동할 것이며,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데 까지 해줄 것이다.—야고보 2:14-17.

사도 ‘요한’도 비슷한 요지의 말을 하였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이다.—요한 1서 3:17, 18; 히브리 13:15, 16; 누가 6:36.

뿐만 아니라 참 숭배자라면 “혀를 재갈 먹여”, 그것을 교만하고 투기적으로 사용하거나 뽐내고 차별대우하는 방법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평화스럽고 이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와같이 혀를 친절하고 건전하게 사용한다면 그가 ‘자비가 가득’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야고보 3:13-18) 이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2:34-36.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차별대우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우리의 혀를 다른 사람에 대해 거칠게 사용하고 비평조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우리가 심판 때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판은 자비를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무자비”하다고 ‘야고보’는 말하였다. 그렇다, 틀림없이,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잠언 21:13)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결국 자기들의 행위대로 당하게 하신다.

자비는 어떻게 심판 때에 이길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그러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비로워야 한다. 그 전에 예수께서는 “자비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다”라고 ‘야고보’의 말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시 145:8; 마태 5:7, 새번역.

그러므로, 참으로 동정심이 있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면, 아마 어떤 점에서 잘못을 범하거나 금전상의 실수를 범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자비로운 사람은, 의로운 길을 완전히 버리고 악한 길을 감으로 하나님께서나 하나님의 대표자들도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게 될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는다. (에스겔 18:24) 심판 때에—“큰 환난” 동안이나 그 전이나 그 후에나—자비한 사람의 자비로운 행동은 그를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브리 6:10.

‘다윗’의 예는 이 점을 잘 설명해 준다.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와 그의 아내와 관련하여 범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당시만 보았더라면 ‘다윗’에게 자비를 나타낼 이유가 전연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행동이 ‘다윗’의 일반 성격이 결코 아니고, ‘다윗’은 실제로 동정심있는 사람임을 알고 계시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면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한 헌신을 보였고 그의 마음이 자비롭던 ‘다윗’의 과거의 기록은 그 당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보이도록 크게 기여하였다.

‘욥’은 자칭 벗이라 하는 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하고 질문하였다. ‘욥’의 머리에는 무엇이 떠올랐던가?

앞뒤의 말을 보면, ‘욥’이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었는가, 사랑의 친절이 있는 사람이었는가, 성실을 지킨 사람이었는가 등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음을 ‘욥’은 알고 있었다. (욥 31:13-22, 29-32; 또한 시 37:21-26 비교.) 또한 ‘바울’은 제자 ‘오네시보로’가 자기에게 진정한 친절을 나타냈었기 때문에 주께서 이 사람과 그의 집에 대해 “그 날에 주[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였음을 생각하라.—디모데 후 1:16-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때에 그들의 자비로운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 희생을 통하여 현재 적용할 수 있는 마련을 풍성히 적용할 정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자비는 사실상, 불리한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자비롭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불리한 심판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고보 2:13, 새번역) 그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동정심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정하시게 된다.

회중 내에서 장로로 일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자기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에 여호와의 견해와 방침을 충실히 대표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양떼의 목자장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히브리 13:17, 새번역; 베드로 전 5:2-4) 그들은 심판관으로 일할 때에,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약간 빗나갔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충성을 계속하고자 하는 성실한 염원을 나타내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자비로웠던 훌륭한 과거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심문할 때에 자비의 기록이 많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랄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 “자비는 심판을 이기”기 때문이다.

[44면 삽화]

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편애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인가?

[45면 삽화]

해로운 말질이 자비로운 행동인가?

[45면 삽화]

동료 그리스도인 사이에 어려운 경우가 생겼을 때에 진정한 자비는 말만이 아니라 행동을 요한다

[46면 삽화]

장로들은 자비롭게 행하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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