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진정한 해방의 길은 무엇인가?
“여성이여, 뭉치라! 자매 의리는 강력한 것이다!” 이것은 1969년 ‘아틀란틱’ 시(미국)에서 있은 ‘미스 아메리카’ 미인 행렬에 항거한 시위자들의 ‘슬로간’이었다. 나는 CBS ‘뉴우스 라디오’에 이 ‘데모’를 보도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었다. 나는 우연히 이 임명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생애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정식 기자가 아니었다. 그 당시 나의 직책은 CBS ‘뉴우스’ 보도 반장이었다. 아뭏든 그 항거자들이 남성 기자와의 대화를 거절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 사건을 취재하도록 임명하였던 것이다. 당시 CBS에는 ‘뉴우요오크’ 주재 여성 기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여성 해방 운동에 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아는 것이라야, 극단적으로 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조사해 봄에 따라 그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들은 분노해 있었고 불평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허심탄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어떤 문제들에 있어선 정확하게 보았고 사태를 개선시키기를 열망한다는 것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 미인 행렬에 가기 전에 나는 그 운동의 조직자의 한 사람인 ‘로빈 몰간’과 CBS ‘라디오’ 회견을 가졌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이 미인 행렬로 대표된 여성 전체의 ‘이미지’란 일종의 무감각한 ‘성의 대상물’이예요. 선발대회 참가자들은 말도 없이 미소나 지으며 수영복 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심사관들 앞에서 시위하는 것은 마치도 시골 장바닥에서 고기덩이의 등급을 매기는 심사관들이 하는 식의 타락적이고도 야만적인 의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들을수록 나도 그들이 투쟁하는 목적에 동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참으로 진지해 보였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그들이 단지 자신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과의 더 개선되고 균형잡힌 관계를 가지려고 모색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빈’의 설명처럼 남자들도 역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문화적 정의에 의해 압제를 받아왔다: “남자들은 소위 우리가 ‘헤밍웨이’식 신비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압제를 받아왔어요—즉 여자를 때리고 가만있는 동물을 사냥하고 술을 많이 마셔야 진짜 남자라는 것 말이죠.”
그 여자는 남자를 미워하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난 ‘존 웨인’식 ‘스타일’의 남자는 질색이에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런 점에 있어선 난 남성 증오자이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린 남자를 미워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배우기 원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내가 이전에 여성 해방 운동에 관하여 알고 있던 바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전적으로 그 운동에 종사하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고 나는 명실공히 여성 해방의 투사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남자나 여자가 다 해방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인간의 압박으로부터의 해결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여성이 다 여성 해방의 목표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아마 과연 어떤 종류의 여자가 그 운동에 관계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나 자신의 얘기가 하나의 실예가 될 것이다.
세상적 성공
나는 ‘뉴우요오크’ 시의 부유한 교외인 ‘코네티컷’에서 자라나서 사립 여학교에 다녔다. 나의 가족은 문학을 즐기는 전통이 있고 정신 세계에 대한 예리한 감식이 있는 지성있는 가족이었다.
나는 열 여덟살에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 스물 세살 때 그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양육해야 할 아이가 있으므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비서 자리는 여러 번 나왔지만 비서로 출발하면 그 이상 진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나는 점차적으로 승진할 수 있는 직업으로 시작해야 하겠는데 여자에 대한 직장의 차별대우가 문제였다. 나에게는 몇가지 기술이 있었지만, 내가 남자였더라면 신중히 고려했을 것이 여자라는 이유로 제쳐졌다는 걸 알았다. 이 경험은 나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직업을 얻는 데 여자라는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드디어, 우연히도 나는 정치 잡지인 「더 리포터」지의 공보 필자가 되어 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CBS ‘뉴우스’의 보도 반장의 지위를 갖게 하는 길을 터 주었다. 마침내 나는 전국 ‘뉴우스’ 담당 CBS ‘뉴우스’ 부장이 됨으로 이 자리에 앉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한 간부로서 내 밑에는 비서와 기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장으로부터 아래까지 CBS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았다. 나는 거의 매일 ‘월터 크론카잇’을 만나곤 했는데 나는 마치 그 자신이 쓴 것처럼 그에 관한 기사를 쓰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쓴 기사를 훑어 보고 승인하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전국에 걸쳐 여러 도시에 있는 편집자들에게 넘겨 주면 그들은 마치 그들이 개인적으로 ‘크론카잇’과 ‘인터뷰우’를 했거나 그 자신이 그 기사를 쓴 것처럼 해서 인쇄하곤 했다.
이것은 아주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나는 지위도 얻었고 돈도 벌었다. 나는 젊었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갖기를 원하도록 문화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여성 해방의 투쟁자가 되었는지 당신은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여성 해방?
비록 나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직장에서의 여자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 여자만 남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성 해방 운동의 기본 목적이 이 상황을 시정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운동의 투쟁자가 되었다.
여성 해방 운동이 발전된, 그리고 그 운동이 내 마음을 끌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앙등하는 생활비와 현대 생활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아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직업을 가져야 되고 집에 와서는 계속 부엌 일을 하고 빨래하고 가정 관리도 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남편들은 일반적으로 외출하여 그들이 말하는 “남성적” 역할만 하고 그러한 잔일은 “여자들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도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자들에게 지워진 이 무거운 신체적 짐이 불공평하다고 느꼈고 여성 해방 운동이 그것을 변경시키길 원했다.
가족 마련에 있어서도 역시 여자의 역할은 변했다. 우리는 우리 할머니 때처럼 아이들을 열댓씩 키우고 옷을 손수 만들고 우유를 짜고 손수 빵을 굽는 일 등은 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보통 한 가정에서 둘 혹은 세 아이를 키우는데 이것은 여자가 40대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남편은 바로 그때 출세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며 아내는 흔히 뭘 해야 좋을지 몰라 하며 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1960년대의 성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여성의 역할은 참을 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자들로서, 많은 수의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그들의 아내에 대해 불충실했다는걸 안다. 그러나 이제 옛날에는 비밀히 하던 일을 공개적으로 사과도 하지 않고 행하며 여자들도 성에 대하여 비슷한 자유분망한 태도를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여자는 부정(不貞)을 일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것은 여자의 기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의 공개적 난잡이 많은 여자들로 하여금 곧장 여성 해방으로 인도케 했다.
우리는 역시 우리를 성의 대상으로 보는 데 싫증이 났다. 여자들은 그들을 고용하기도 하고 해고시킬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진 직장 상관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 그것을 증오한다. 이것은 직업 분야에 종사하는 여자들의 널리 알려진 문제이다.
나는 1971년에 CBS에서 해고되었는데 이는 나의 ‘보스’와 ‘데이트’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부사장에게 이 문제를 말했는데 그는 나처럼 분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그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옳았다. 그런 일은 예사였던 것이다. 나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고용에서의 차별대우를 고발하는 2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아니 더 많은 일들이 여자들이 직면한 진정한 문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분명히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여자들은 답을 찾기 시작했다.
운동을 조직함
1963년에 ‘베리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영문)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책은 여자들이 현대 세계의 변화하는 방법이 그들의 생활에 나쁜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여자들이 점점 더 편치않아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똑바로 지적해 냈다. 이 책의 효과는 불꽃에 비길 수 있으리라. 전국적으로 여성들은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자기들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966년에 ‘프리단’은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에 종지부를 찍도록 일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전국 여성 단체를 구성하였다. 곧 비슷한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이 발전하는 여성 운동의 기초가 “비난 ‘그룹’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었다. 8명에서 10명으로 이루어진 이 ‘그룹’들은 매주 모여서 여성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 이 ‘그룹’들은 버섯처럼 팽창해 나아갔다.
이러한 모임은 나와 많은 여자들에게는 단지 여성 해방을 찾게 된다는걸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쾌한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경험담을 나누며 이론을 발전시켜 가며 우리가 여자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것을 해소해 가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우리 모두는 남자들 손에서의 불행한 경험들을 나눌 때 감추어졌던 수많은 울분들이 표면화했으며 점점 더 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 여자들끼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러한 결속감, 신뢰감 또 우리가 “자매 의리”라고 부르는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여자들을 어떤 남성의 주의를 끄는 잠재적 경쟁자로 보는 습관을 가지고 성장해 왔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친구로 생각하며 서로 의지해야 할 동료 희생자로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때때로 이 “비난 ‘그룹’”은 더 큰 조직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예를 들면, 내가 속한 “비난 ‘그룹’”은 주로 출판계에 종사하는 여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뉴우요오크 메디아 여성’ 단체의 핵심체를 이루었다. 이 ‘그룹’은 「레이디스 홈 저어널」지에 그 잡지 기획의 여성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려는 기사 내용과 인사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는 폭풍을 일으킴으로 신문의 표제를 장식하게 했다.
여성 해방 운동은 여자에 대한 태도에 혁명을 일으켰다. 고용과 교육, ‘스포오츠’, 여자에 대한 차별대우 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변화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CBS를 상대로 한 나의 소송 같은 경우에도 여성이 직장을 얻는 기회면에서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내가 CBS에서 일할 때는 해외 ‘뉴우스’국의 여기자는 한명밖에 없었다. 나의 소송 제기가 있은 지 몇달 안에 5명의 여기자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어느 정도의 성취는 있었지만 나는 그 운동 자체 내에 심각한 문제들이 있음을 알게 되어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성 해방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볼 때, 나에게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가장 아끼는 개념인 자매 관계가 여자들이 권력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자마자 깨어져버린 것이다. 이론은 인간의 이기심을 고려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여자들의 ‘그룹’들 사이에 여러 번 쓰라린 권력투쟁을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남자보다 더욱 더 피비린내 나게 뒤에서 서로 중상하는 것이었다. ‘뉴우요오크 메리아 여성’ 단체에서 그 운동 전체면에서 볼 때, 많은 여자들이 “앞사람을 밀고 떨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그들은 명성과 성공을 원했으며 그래서 그 운동을 자기들의 개인적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상적 이론이 비실제적임이 증명됨에 따라 급진적 요소가 그 운동을 새롭고, 나에게는 깜짝놀랄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강간 문제를 논점으로 크게 다룬 일이 있었다.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그 운동이 제시한 해결책은 당수와 유도였다. 나는 이 결정에 따라 당수 훈련을 받았다. 나는 이제 어떤 남자의 자비도 받지 않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그룹’ 중의 하나는 강간을 했거나 여자를 구타한 남자를 알게 되면 나가서 그를 병신을 만들거나 심지어 죽이자는 계획을 세우자고 토론하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옳지 않게 보였다. 그것은 내가 한 인격으로서 원했던 모든 것을 범하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도덕적 바탕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수단에 관계없이 변화만 강행코자 했다. 폭력보다도 더욱 나에게 혐오감을 갖게 한 그 운동의 또 다른 지배적 논지는 여성 동성애였다. 나는 얼마 안되어 내가 존경했고 그 운동의 지도를 맡고 있는 많은 여자들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그 운동 자체가 여자들로 하여금 여성 동성애자가 되도록 격려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물론 그것이 그 운동의 본래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여성 해방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상호존경에 기초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남자들이 우리의 불평의 원인을 알게 되자마자 그 정당함을 인정하고 변경시키리라고 진정으로 믿었던 것이다. 대신에 남자들은 여성 해방에 대해 적대감과 조롱으로 대응했으며 권리침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많은 여자들은 해방이란 그들의 남자를 잃는 것을 뜻함을 알게 되었다. 많은 남자들은 그저 집을 나가서 더 “여성적”인 여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버린 여자들도 남자와의 관계 개선의 노력을 흔히 포기한다. 그래서 남자가 그들을 버리면 그들도 역시 남자를 버리고 나가서 다른 여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동성애란 나에게 있어서는 성도착 행위이며 반항적 행위였다. 나는 여성 동성애자가 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어머니로서, 자녀와 가족에 대한 견해에 관해 그 운동이 발전시킨 또 다른 면이 나를 계속 괴롭혔다. 이혼이 권장되었다. 결혼해서 임신하는 여자들은 구식이고 ‘부르죠아’라고 경멸하였다. 자진적인 불임수술이 “해방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여자들만으로서의 교제가 생활 양식으로 격려되었고 시험관 아이가 미래의 꿈이 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자극받아 많은 여자들이 가정을 뛰쳐나왔다. 최근에 나는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 전문 회사인 ‘트레서스 캄패니 어브 아메리카’사에서 출간한 얼마의 통계표를 읽었다. 1960년대 초에는 남편과 아내가 가족을 버리는 대율은 300:1이었다. 60년대 후반에 와서는 100:1이 되었다. 오늘날은 일대 일인 것이다! 이제 여자들은 그들이 남자들을 미워하던 이유 바로 그것을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고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웠다. 나의 오랜 슬픔의 원인의 하나는 내 직업이 나를 아들에게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게 하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 아이를 키우게 하면 결국 어떤 아이가 될까 늘 걱정했었으며,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하고 생각했었다. 여성 해방 운동은 근본적 문제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 양부모가 다 직장을 가지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 심각한 의문은 양부모가 다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더 이상 부모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혼란에 빠졌고 환멸을 느꼈다. 여성 해방은 답을 제공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나를 더 슬프게 했던 것은 내가 다른 여자들을 이 운동에 가담하게 하기 위하여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그들의 남편과 가족들에게 그러한 나쁜 결과가 있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방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여성들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인생을 비참케 하는 데 기여한 진정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지적해냈다. 그러나 해결책은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대치 않았던 근원
한 친구가 그 답이 성서에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극단적으로 회의적이었다. 여성 해방 운동가에게는 성서란 여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가진 일단의 남자에 의해 씌어진 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한번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여성 해방에 관해 얼마나 많은 것이 잘못 전달됐었나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서를 먼저 조사해 보지 않고서 판단을 내린다는게 불공평할 것이라는걸 깨달았다.
나는 전에는 결코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한권을 꺼내들고 우연히 이사야 54장을 펴게 되었다. 내가 읽은 것은 이러한 내용이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이 하나님 여호와가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여인의 감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알고 싶었다. 이 섬세한 인상이 이 하나님에 관하여 더 알아보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였다.
나에게 성경을 보라고 말해 준 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었지만 그들만이 성경을 똑바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1971년 5월에 나는 한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과 접촉하게 되었고, 한 증인이 나와 연구하기로 마련되었다. 주어진 답들은 점차적으로 의미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성서의 사랑에 대한 강조와 동료 인간들끼리 서로 고려해야 할 가치의 필요성에 강조를 하는 점이 참으로 나의 마음을 끌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성귀들은 나를 감동시킨 몇개의 성경 귀절의 예에 불과하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에베소 4:32; 빌립보 2:3; 로마 12:10.
이 충고는 단지 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자와 남자를 불문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고려해야 하며 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남자들은 땅벌처럼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야만” 한다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부도덕한 세상적 견해에 염증이 나 있었다. 이제 나는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결혼은 영예롭게 보존되어야 한다! 더욱이나 로마서 1장은 동성애적 행위를 음란한 것으로 단죄하고 있다. 참으로 구제받은 느낌이었다!
남편과 아내
“그러나”, 많은 여자들은 “성서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묻고자 할 것이다. (에베소 5:22, 23) 나도 그것을 처음 읽었을 때는 역시 역겹게 느꼈다. 어떻게 남편이 그의 아내를 노예로 사지 않았는데 아내의 머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의아했었다. 내가 이 세상의 남자들 사이에서 본 바에 따라 성서의 원칙을 판단하지 말고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고 나와 연구하는 사람은 권하였다.
그리스도인 남편에게 머리가 있고 그 머리에게 복종해야 함과 자기들의 아내를 예수께서 그의 지상 제자들을 다루었듯이 다루어야 할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고린도 전 11:3) 에베소 5장도 이 점에 관해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나는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남편들이 정말로 이렇게 한다면, 즉 그들의 아내를 사랑하여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죽고자 하였다면 여성 해방 운동 같은 것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또한 성서가 남편들에게 그들의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명령을 한 곳을 읽었다. (베드로 전 3:7) 이제 이 머리 원칙의 사상이 조금 더 받아들여질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의심스러웠다. 만일 결혼의 창시자 하나님이 원하는 남편상이 이러한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현재와 같이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연구를 통하여 ‘에덴’에서 인간이 범죄했으며 그 자신이 질병과 죽음을 포함하여 수많은 문제를 자초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설명을 읽으면서 ‘하와’가 받은 벌을 보고 간담이 서늘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 3:16.
얼마나 반감이 가는 말인가! 이것은 성서를 받아들이려면 여자의 운명으로서의 지배도 받아들여야 함를 뜻하는가? 아니다. 내가 더 깊이 연구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그들의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곧 회복시킬 생각을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죄와 질병, 죽음까지도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 (계시 21:3, 4) 이것은 그러면 죄 많은 남자에 의한 지배도 끝날 것을 뜻하는가?
그렇다. 나는 사랑에 찬 머리 직분은 남아 있는 반면, 남자에 의한 이기적 지배는 끝날 것이라는 즐거운 사실을 배웠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가진 남편을 머리로 갖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나는 여호와께서 이 지구를 낙원으로 바꾸실 때까지 그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남자들, 참 그리스도인은 바로 지금도 마땅히 하나님의 의로운 표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그러한가?
이론뿐인가?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에 정규적으로 참석하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교제하도록 권고받았으며 그리고 나 자신을 살펴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성서가 가르치는 것을 참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성서가 참이라고 즉 우주의 창조주께서 친히 그것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음을 믿는다. 그래서 증인들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며 연민을 가지고 남편들은 자기들의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다.
더우기 그들이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할 때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정부가 지구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성서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참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다니엘 2:44.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해방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이 제도가 멸망될 때가 가까왔으며 보존된 인류는 의로운 새 질서로 인도됨을 믿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도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나에게도 이치적이었다. 확실히 이 세상 구석구석에 편만해 있는 이기심과 부도덕이 창조주에게도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인간 스스로 이 상태를 고칠 수 없음을 확신했다.
내가 성서를 계속 연구해 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룩하실 것이 우리 여성 해방 운동이 성취하려고 희망한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왕국 아래에서는 여자들의 문제만 해결될 것이 아니라 심지어 질병과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전 인류가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 약속하신 것이며, 그분은 자기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아직도 남자와 여자 모두의 해방을 위한 투쟁가이다. 매주 여러 시간은 “비난 회기”에서 보내거나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하여 법정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시간을 사람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훌륭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왕국 통치 아래 낙원이 된 “새 땅”에서의 진정한 해방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베드로 후 3:13)—기고.
[230면 네모]
●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들은 남자들에 의해 압제받아 왔고 잘못 취급되어 왔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해방과 동등권을 요구하고 있다.
● 성서는 이러한 여성 해방 운동을 승인하는가?
● 여성의 권리를 위한 한 투사가 여성에게 필요한 해방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성공적인 방법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읽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