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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76 11/1 496-499면
  • ‘내 상에 둘린 어린 감람나무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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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상에 둘린 어린 감람나무 같도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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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슷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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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파76 11/1 496-499면

‘내 상에 둘린 어린 감람나무 같도다’

‘콜럼비아’의 ‘포르피리오 카이체도’의 이야기

성서 시편 128편 3, 4절에 표현된 판단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매우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나는 열 여덟 자녀의 아버지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벨렌’(‘베들레헴’) 곧 나의 “결실한 포도나무”는 나에게 열 두명의 아들과 여섯명의 딸을 낳아 주었다.

나 자신의 생애는 ‘콜럼비아’의 ‘틀리마’, ‘리바노’ 시에서 64년 전에 시작되었다. 나는 열 자녀의 막내였다. 나의 부친은 내가 어렸을 때 사망하였으므로, 나는 열 두살에 나의 어머니와 막내 누이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주조 공장에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물 여섯살에 ‘벨렌’과 결혼하였고 그 직후 우리는 수도 ‘보고타’로 이사하였다.

통신 강의를 받아 나는 목수로서의 자격을 발전시켰으며 금속 주조를 위한 목판 주형을 전공하였다. 성장해가는 자녀들을 더 잘 감독하기 위하여 나는 집에 작은 가게를 냈다. 그러나 나의 직업이 알려지기까지 나는 다른 수입원을 구해야 하였다. 그래서, 주형을 만드는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기타’와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배우는 것은 항상 나를 매혹시켰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내가 세상의 여러 종교에 싫증을 낸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여러 종교의 형식에 치우친 요술은 배움에 대한 나의 갈망을 결코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1950년 어느날 나의 가게를 방문한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받은 두권의 책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배우기를 원하였다. 증인들은 나에게, 신비주의 없이 명백히 그리고 간결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성서를 연구하면서 나는 나의 자녀를 올바로 교육시킬 수 있는 기초를 놓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다’

자녀를 기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힘이 들고 투쟁과 염려가 있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 현명한 사람 ‘솔로몬’의 말에 온전히 동의한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시 127:3-5) 사람이란 자식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자녀가 가까이에 없을 때에는 그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나는 어린 자녀들을 무척 사랑한다. 그들의 독특한 행동에서 나는 많은 즐거움을 얻는다. 어린 아이에게는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미점이 있다. 어린 아이는 매우 순진하다. 그리고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보고 즐거워한다. 종이 한장 혹은 한 가닥의 끈을 가지고도 기뻐한다. 또한, 아이가 장난감을 잃으면 슬퍼한다. 바로 그러한 때에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돕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나의 아내와 나는 자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올바로 지도하는 일에 물론 관심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는 교훈과 시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성서 자체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하고 말한다. (잠언 13:24)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징계하는 데 항상 열심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어떠하였을 것인가 하고 생각만 하여도 끔찍하다.

부모의 좋은 본의 가치

우리 모두는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모방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어, 태도, 습관 등 무엇이든지 그들은 아주 쉽게 모방한다. 특히, 부모의 행동은 그들에게 법이 된다. 이러한 모방의 본능 때문에 나는 자녀가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은 부모의 훌륭한 본이라고 생각한다. 성서 잠언은 다음과 같이 이 점을 강조한다. “완전히[성실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언 20:7) 정직하고 성실을 유지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을 전달할 것이며 그것은 자녀들에게 장차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성서는 내가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성서에서 나는 진실과 순종의 가치를 배웠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따라서 나의 가족 앞에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내가 지켜야 할 행동 표준을 배웠다. 나는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불변의 법을 알고 그에 따라 생활한다면 자녀 교육을 포함한 나머지 일, 생활과 관련된 다른 일이 비교적 순탄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의 생활에서 가장 큰 선한 영향력 중 하나는 나의 아내와 나 자신 사이의 매우 훌륭한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나는 아내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도 꺼려한다. 내가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태도에는 나를 거스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에 있어서 나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나의 아내는 매우 순종적이고 협조적이고 상냥하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의견을 말하지만 결정은 나에게 맡기고 그것을 존중한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기분이 과히 좋지 않으면 다른 편에서 불만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한 편이 자녀를 시정할 때에는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협조한다.

방심하지 않는 것의 가치

자녀들에게 불필요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한 한 가지는 자녀를 사랑으로 주시하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 식물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항상 그들이 어디에 있으며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였다. 만일 어린 자녀 중 누가 어디를 가게 되면 그는 가족 중 더 나이 먹은 사람이나 믿음직한 사람과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딸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항상 동반자와 함께 다니게 되어 있었다.

요즈음 세상이 매우 불안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특히 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그들이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사귀고 그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박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이 도시에서 거리에 혼자 다니게 내버려 두는 일은 결코 없다.

아들들의 경우에는 위험이 적기 때문에 그들은 딸들보다 더 많은 자유가 있다. 그러나 나이에 관계 없이 그들이 나의 슬하에 있는 한, 특정한 시간까지는 집에 와야 한다. 그들이 늦게 귀가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만일 늦어지면 집에 왔을 때는 문이 잠겨져 있다. 나는 그를 한동안 추운 밤공기를 쏘이게 한 다음에, 나중에 문을 열어준다. 이러한 경우 나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한다.

자녀를 미리 항상 감시하면 흔히 벌을 줄 필요가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예방은 치료보다 낫다.” 감독을 소홀히 하는 부모는 부모 자신이 태만했기 때문에 얼마간 책임을 져야 할 악행에 대하여 자녀를 징계하게 될 수 있다.

나의 마음의 평안을 발견함

자녀를 성공적으로 기르는 데 부모의 좋은 본과 계속적인 관찰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일들이 분명히 있다. 고의적인 불순종이 있을 때에는 문자 그대로 적절히 매를 대는 것이 자녀들에게 놀라운 효과가 있다. 그것은 잠언 29:17에 암시되어 있듯이 부모에게 평안함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만일 내가 자녀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그가 그 일을 신속히 하지 않으면 그에게 그 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불순종이 고의라는 것을 알 때, 징계한다. 나는 한결같이 이러한 방침을 따르기 때문에 자녀에게 두번 말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실제로 매를 대기 전에, 나는 자녀에게 개인적으로 그 일의 필요성에 관하여 이치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벌을 받는 이유를 명백히 이해하기를 원한다. 더우기, 나는 자녀가 나의 단순한 화풀이의 희생자가 되게 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형태의 징계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자녀에 따라 다르다. 모두가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싫어하는 표정이 어떤 자녀에게는 엄한 책망이 될 수 있다.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어떤 것을 금하는 것이 어떤 자녀에게는 효과가 크다.

나는 다섯째 아들에게 문자적인 매가 효과가 없을 때에 효과를 본 징벌의 형태를 기억한다. 그는 여덟살 가량 되었었다. 그는 좋지 않은 친구들과 노는 일에 너무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누이의 옷을 입혔다. 그는 그 옷을 입고는 감히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 있었다.

한번은, 나의 세째와 여섯째 아들이 염치를 모르는 행동을 하기에, 나는 그들을 외조부의 농장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열 여덟살과 열 다섯살 가량되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나의 장인은 그들이 왜 왔는지를 알았다. 그는 손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력적인 근로자였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에 대하여는 참지 못하였다. 그 아이들은 매일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서 적도 부근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밭에서 일하는 동안 뱀과 말벌의 위험을 참고 손에 물집이 생겨도 만족해야 하였다. 한달 동안 일하고 나서 그들이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매우 높아졌다.

더욱 최근에 나는 아들 넷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요구한 일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머리가 너무 길었던 것이다. 넷 중에서 제일 큰 아이가 그 때 스무살 가량되었다. 며칠 후에도 그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에프레인, 라파엘, 호라치오, 치체론, 따라와! 나하고 같이 가자!” 하고 말하였다. “예, 아버지.” 그들은 나의 의도를 모르고 이발소에까지 왔다. 이발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미안하지만 이 아이들의 머리를 내 머리를 이발하듯이 깎아주시오. 짧게, 아주 짧게!”

세속 교육과 훈련

경제적인 이유로 나의 아들들의 교육은 기초 교육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몇명은 나중에 어떤 과목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 나는 몇명에게만 고등 교육을 시키면 그들이 우쭐해져서 교육을 덜 받은 그들의 형제들을 딛고 올라설까 우려하였다. 그러한 가능성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모두에게 베풀 수 없는 것은 아무에게도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환경상 나는 고대 ‘이스라엘’ 부모의 전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친 외에 아들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예외없이 모든 아들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게에서 내 옆에 두고 일을 시키는 것이 나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나는 아들들에게 특수한 기술을 가르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하는 법, 문제를 극복하는 법, 일을 완수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는 법, 이치적으로 생각하는 법,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법 등 일상 생활과 관계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것은 또한 단합과 친밀감을 가져다 주었고 그들과 나에게 중요한 대화를 가능케 하였다. 나의 아들들이 나의 작업대에 앉아서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나와 이야기하면서부터 그들은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확신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하였다. 그들은 나의 한결 같은 동료이며 친구들이다. 그들은 나를 존중하고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일할 때에 나의 명령은 필요치 않다. 친절하게 제안해도 동일한 결과가 있으며 가게의 분위기가 매우 건전해진다.

“일만 시키고 놀리지 않으면 아이는 바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자녀들과 함께 오락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독신 시절에 나는 음악을 공부하였고 ‘밴돌라’, ‘기타’ 그리고, 작은 삼중 ‘기타’ 치는 법을 배웠다. 아들 몇은 ‘기타’를 잘 치며, 우리가 오락회를 가질 때에는 딸들이 우리의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참으로 중요한 교육

세속 교육과 실용적인 훈련 외에 나의 자녀들은 훨씬 더 가치있는 또 다른 교육을 받았다. 물론, 그것은 영적 교육이다.

이 면에서도 ‘벨렌’과 나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훌륭한 본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숭배와 순종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았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 분의 뜻과 일치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복잡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기본적이고 논리적인 직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의로운 행실 표준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한 기본적인 직무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다른 참 숭배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였다. 얼마 후 우리 집은 회중 전체를 위한 혹은 일부를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이래 지금까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가족 모두가 집회를 준비하고 참여한다. 그것은 우리의 습관이며 우리의 영적 복지에 무한한 도움이 되었다.—히브리 10:25.

이 지역에 있는 많은 가정과는 달리, 우리는 또 다른 유쾌한 습관—가족이 함께 식사하는—을 가지고 있다. 만일 나의 ‘어린 감람나무’가 너무 많아서 식당의 한 식탁에 둘러앉지 못할 때에는 일부가 부엌에 있는 좀 더 작은 식탁에 앉았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연합에 기여하였으며, 예를 들면 우리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집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신명 6:6, 7) 그것은 또한 가족의 상황을 살피고 태도 혹은 경향을 관찰하며 우리 모두의 영적 필요에 따라 내가 분별한 시정책을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식사시에 언제나 적극적인 성서 교훈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은 또한 담소의 시간이며 때로는 식후 오락의 형태로 서투른 ‘기타’ 연주도 있다.

나의 그리스도인 사랑이 나 자신의 가정 밖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의 아내와 나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의 가정에 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나의 모든 자녀는 이 가장 건전한 활동에 바쁘며 다섯 자녀는 때때로 그 일에 전 시간을 바쳤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둘째 아들 ‘라울’이 열 일곱살 가량 되었을 때의 그와 관련된 사건을 기억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나는 그에게 “예야, 봉사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는 “나 안갈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놀라서 나는 “왜 안가니?” 하고 물었다. “그건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의무적으로 하는건 아니지. 좋다”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나는 ‘라울’에게 그에 관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음 일요일에도 나는 그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화내지도 않았고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일요일에 그는 다시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그 일이 있은 이래 ‘라울’은 자진적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왕국 봉사에 전념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풍부한 축복을 주셨다. 그는 ‘뉴우요오크’ 시의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가는 특권을 누렸으며 다음에 지역 감독자로 ‘콜럼비아’ 전역에 있는 형제들을 섬겼다. 지금 그와 그의 아내는 ‘바랑킬라’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그는 ‘콜럼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감독하는 일을 돕고 있다.

행복을 느끼는 이유

나는 몇년 전보다 현재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오늘날 기뻐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 자체는 결코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 축복, 그것이야 말로 행복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면, 가정에 화목이 있고 심각한 난관이 없을 때에 행복이 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자녀가 창조주께 헌신하고 위로 네 아들이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는 것을 볼 때, 나의 기쁨과 만족은 참으로 크다.—잠언 10:22.

나의 자녀 열명이 결혼을 하였고 그들 대부분이 그들의 “어린 감람나무”가 있어 그들이 자주 우리를 방문할 때면 나는 행복해진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어머니와 나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도 그러한 친밀함이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의 매우 중요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이름을 주시고’ 우리 가족을 존재하게 해 주신 우리의 천적 아버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다. 또한 우리의 가족 관계가 사망으로 인하여 결코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신 분도 그 분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 후 3:13; 에베소 3: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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