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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노년에 참된 안식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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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노년에 참된 안식처를 찾았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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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파77 6/1 260-262면

나는 노년에 참된 안식처를 찾았다

‘루이사 그레고리오’의 이야기

나는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70평생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 현재 102세가 되어 온다. (시 90:10) 그러나 내가 항상 원했던 것 즉 참된 안식처와 희망을 알게 된 것은 70세가 지나서였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숭배의 자유를 위하여 피신하였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1837년 부터 1901년까지 영국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초기에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 주민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로부터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의 성서는 불태워졌고 다른 면으로도 학대를 받았다. 후에 ‘빅토리아’ 여왕은 그 섬으로 배 한 척을 보내어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떠날 수 있게 하였다.

그 배를 탄 사람들 중에는 어린 두 소녀도 끼어 있었다. 그 배는 영령 서인도 제도로 향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안티구아’라는 섬에 내렸고 그 두 소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이곳 ‘트리니다드’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운 ‘이스트 드라이 리버’에서 돌을 가져다가 ‘스코틀랜드’의 성 ‘앤’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지금도 서 있다.

그 피난 소녀들 중의 하나가 나의 외증조모였다. 그분이 ‘마르셀리아나’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의 외조모가 된다. 나의 외조모 ‘마르셀리아나’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어머니 ‘메리’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어머니되시는 ‘메리’가 ‘마누엘 페레이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우리집에는 딸이 셋이었고 아들이 하나였는데 그 아들은 어려서 사망하였다. 아버지도 역시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가족과 가정을 돌보기 위해서 상점에 취직하셨다.

어려서의 교육과 결혼

우리는 ‘헨리’ 가와 ‘듀크’ 가가 있는 곳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그곳이 ‘포트오브스페인’의 번화가가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빅토리아’ 가에는 나의 모교가 있었다. 내가 16세 되었을 때 이웃에 사는 두 청년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집이 가난하였다. 나의 마음은 가난한 ‘앨버어트 그레고리오’에게 쏠렸다. 20세 되어서 나는 결혼하였는데 그를 남편으로 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남편과 나는 행복한 생활을 하였으며 자녀들을 위하여 우리 가정이 아늑한 보금 자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였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셋, 딸이 셋 있었다. 남편은 마차를 끌어 생활비를 벌었다. ‘벨몬트’에 있는 우리집은 그리 볼품은 없었으나 우리 가족은 연합된 행복한 가족이었다.

몇년 후 남편은 ‘벨몬트’에 조그만 장의사를 차리게 되었는데 그 ‘그레고리오’의 장의사는 오랫 동안 ‘옵저어버터리’ 가의 명물이었다. 장례비를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나의 남편은 빈곤한 사람의 친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적인 것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일차 세계 대전중에 ‘에반더 J. 코와드’라는 사람이 ‘트리니다드’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 강연을 들려 주었다. 그는 성경 연구생 즉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었다. 나의 언니인 ‘애니에’와 그 남편 ‘윌프레드 페레이라’와 나의 어머니는 성경 연구생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윌프레드’는 아주 열성적인 성경 연구생이 되었으며 전파 활동을 위해서 다른 섬들로 여행하였다. 나는 ‘윌프레드’의 말을 귀담아 들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1931년에 나의 남편은 폐염을 앓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일어나서 돌아 다니려고 하였으나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집에서 운명하게 되었다. 성경 연구생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나에게 매우 훌륭한 남편이었다. 남편이 없으니 참으로 적적하였다. 이제 가족 부양의 책임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나는 ‘블라우스’나 ‘스커어트’ 혹은 그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 염가로 팔았다. 그렇게 하여 여러 해 동안 내 자신의 생활을 꾸려 왔다.

성서 진리에 반응을 나타냄

나의 태도가 달랐더라면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나는 1940년대 후반에 가서야 참된 안식처와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나라로 가서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서를 무료로 가르쳐 줄 선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미국에다 ‘길르앗’이라는 특수 학교를 설립하였다. 1946년에 그러한 선교인들의 얼마가 ‘트리니다드’로 파견되어 왔다.

그 선교인들 중에 ‘앤 블리자아드’라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성서 연구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나는 배우는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날 우리는 베드로 후서 3:13을 토론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한 의로운 하늘과 땅을 생각하니 참으로 행복하였다. 나는 그러한 의로운 제도에 살고 싶었다. 그 때는 내 나이 76세 때였다.

나는 같이 살고 있었던 손녀 ‘조이 헤른’에게 우리의 연구에 같이 참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 손녀 딸은 기꺼이 그렇게 하였는데 그 애도 역시 우리가 배우는 성서 진리를 곧 받아 들였다. 결국 나는 ‘벨몬트’ ‘노르포오크’ 가 6-B에서 개최되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집회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또한 배운 훌륭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호별 방문이나 가정 성서 연구에서 여러 가지 흥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 예로서 ‘알마 포오드’와 성서 연구를 하던 일이 기억나는데 착한 그 여자는 진리를 받아 들여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포오트오브스페인’에서 남쪽으로 약 48‘킬로미터’를 가면 ‘산페르난도’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나의 딸 ‘이비’에게 선교인과 연구하도록 권하였다. 그 딸은 자기의 딸과 같이 성서 진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고, 결국 그의 남편 ‘잭’도 그렇게 하였다. 나의 손자인 ‘피터’도 진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 날 즉 나의 딸 ‘이비’와 나의 두 손녀 딸 ‘조이’와 ‘제안’이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서 함께 침례를 받게 되었을 때인 1950년 11월 25일에 내가 얼마나 즐거워하였던가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노쇠와 죽음이라는 적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는 내가 계속 집회에 참석하고 성서 진리를 이웃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노령으로 인한 약화를 나도 겪게 되었다. 나는 시편 90:10이 진리임을 잘 알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

나의 한 아들이 병들어 회복되지 않았을 때 나는 고뇌를 더 느끼게 되었다. 회복되는 듯 하더니 다시 도져서 사망하고 말았다. 내가 부활과 지상 낙원에 관한 성서에 약속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세실’의 죽음은 나를 참으로 슬프게 하였다.

그 후 내 나이 96세가 된 후 어느날 나는 거실 창문을 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미끄러져 넘어졌고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의사를 불러 왔고 그 의사는 즉시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였다. 골반이 부서져서 수술을 해야 하였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내가 수혈을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니 수혈을 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를 받아 들이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거부하였다. (창세 9:4; 레위 17:10; 사도 15:20, 29) 내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회복된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그 병원에 80대의 두 부인이 같이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골반이 부서졌다. 둘 다 수혈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골반이 나은 후에는 한 쪽 다리가 짧아졌다. 특수 구두를 맞추고 보행 보조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사용하여 나는 집 주위를 다니며 가사를 어느 정도 돌보고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때는 시련기였으나 회중 성원들은 아주 친절하였고 나에게 많은 격려를 해 주었다. 진정으로 나는 ‘아마겟돈’ 전쟁을 살아 남아 하나님의 새 질서로 들어가기를 원하였다.

그 후 나의 아들 ‘비비안’이 사망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케니스’가 또 다시 사망하여 나는 아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 나의 언니 셋도 사망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부활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남편을 하나님의 의로운 새질서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성서에 기초한 그러한 소망은 나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나는 시편 56:11의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라는 귀절을 즐겨 읽는다.

지금은 몸이 아주 약해져서 더 이상 혼자서는 밖에 나갈 수도 없다. 이러한 나이에 살아있기가 상당히 어려움을 종종 느낀다. 나는 ‘아마겟돈’을 통과하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나의 나이로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즐거운 일이 실현되고 현재의 불행한 상태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그 때에 부활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계시 21:3, 4.

[260면 ‘루이사 그레고리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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