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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79 03월호 25-29면
  • 행복한 생활에 기여한 결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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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생활에 기여한 결정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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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족스러운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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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 특별 임명들과 ‘길르앗’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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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파79 03월호 25-29면

행복한 생활에 기여한 결정들

‘마아가리타 쾨니거’의 경험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해인 1939년에 나의 아버지는 독일 육군에 징집되었다. 6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는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 동안에 나는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치명적인 사고를 슬픈 일로 보도하던 ‘라디오’ 방송이 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나의 승리라고 보도할까?’ 하고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음량을 낮추고 어떤 방송을 듣곤 하였다. 그러한 방송을 듣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폭격을 당해 화염에 싸인 집들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나의 친오빠는 전사하였다.

나는 고향인 ‘뮤니히’(독일)에서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 교회에서는, 매번 ‘미사’가 끝나면 참전하고 있는 군인들과 ‘퓌흐레르 아돌프 히틀러’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한번은, 나의 어머니께서 교구 사제 앞으로, 전쟁을 멈추도록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 한장을 학교에 가는 내 편으로 보낸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미사’를 좋아하실리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나의 아버지는 한 수용소에서 자유케 되셨다. 식품을 얻는 것이 용이해지고 여러 가지 역경은 점차적으로 경감되었다. 그리고 ‘뮤니히’는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10대 소녀로서 ‘스포오츠’, 연극, ‘오페라’ 및 여러 가지 사회 활동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학생 친선 교환 계획에 따라 미국에서 대학 유학을 하도록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모두는 나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기본적으로 평화를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고, 서로 증오하게 하려는 힘이 있는 듯이 보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독일로 돌아와서 나는 ‘뮤니히 공과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나는 학생 자치회에 관여하게 되었으나, 그들이 취하려는 여러 가지 수단을 보고 나는 실망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첫째로 구하는데, 어떻게 참된 평화가 도래할 수 있겠는가? 혹시 성서에 그 해답이 들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조사를 해 보기 위해 나는 ‘뮤니히’에 있는 큰 도서관으로 갔다.

만족스러운 해답

성서에 대하여 상호 모순이 되는 비평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 때쯤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종교는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는가?」라는 책을 받았다. 어머니와 나는 종교 역사와 인류에게 미친 종교의 영향을 다루고 있는 그 흥미진진한 책을 교대로 읽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찾고 있던 해답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게 하려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얻었다. 나는 성서로부터 악한 영(靈)들 즉 ‘사단’ 마귀와 그의 악귀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서는 그들을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사단’이 “온 천하를 꾀[고 있다]”고 성서는 말한다. (에베소 6:12; 계시 12:9) 여러 나라들과 민족들의 불경건하고, 악귀적인 행동으로 판단해 볼 때, 이것은 얼마나 이치적이며, 만족스러운 해답인가!

이 지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련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크나큰 즐거움을 얻었다. 현 세상의 교육자들이 제안한 어떤 인간의 이념이나 행정에 의한 마련이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의 새로운 하늘 정부가 이 지상사를 관장할 것임을 알려 준다. 그 정부는 현 악한 세계 통치를 제거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 6:10) 나는 이 왕국이 실제 정부이며, 오직 이 정부에 의해서만 참된 세계적 평화가 이루어질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을 변화시킨 결정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배워 감에 따라, 나는 그 목적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시작했다. 때가 되어 나는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모방하여, 온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가 새로 발견한 이 인생의 목적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는 나와 함께 같은 실험실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 학생이다. 우리는 곧 결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 중요한 점에 있어서 우리의 인생의 전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마침내 긴장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그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새로 발견한 믿음을 선택해야 하였다. 그 후 즉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헌신을 표상하기 위해 침례를 받았다.

‘뉴우요오크’ 시(미국)에서 개최될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약 한 달 전인 1958년 6월에 그곳에 도착하여, 나는 한 여객선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 여름에 나는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뮤니히’에 돌아오자, 나는 오전에는 한 특허 대리인 사무실에서 일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왕국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방문하면서 전 시간 봉사를 했다.

여러 특별 임명들과 ‘길르앗’ 학교

1959년에 나는 왕국 전도인들에게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내 짝인 ‘게르다’와 나는 ‘프란토니아’ 주(독일)의 ‘스타이거 포리스트’에 있는 여러 조그마한 마을들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중에는 조그마한 ‘오오토바이’를 타고서, 그 지역의 구릉지를 오르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투석을 당했으며, 우리 두 여자들이 성서를 전파하기 위하여 도착하면 일종의 경고로서 교회 종들이 울렸다. 심지어 그러한 상황에서도, 결국 얼마의 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게르다’와 나는 매우 행복했으며, 마치 “주의 양”을 찾아 다니던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느꼈다. 밤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때때로 키큰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별들로 수놓여 있는 고요한 밤 하늘을 바라보고 감탄하거나, 혹은 태양이 밝게 빛나는 날이면, 점심 시간에 개울가에서나 목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우리는 지상 낙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로 감사했다! 3년 후에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하지만, ‘게르다’는 아직까지 나의 어머니에게는 딸 같이, 나에게는 언니 같이 여겨지고 있다.

현재 새로운 짝 ‘기셀라’와 나는 거의 16년 동안 함께 생활해 오고 있다. 1962년 가을에 우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라는 또 다른 임명을 받았다. 그 당시에 ‘프랑스’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20,000명이 좀 못되었지만, 현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곳에 67,000명의 ‘증인’들이 있다. 관심자들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가슴설레이는 일이었다. 나는 전 시간 전파 사업을 하기로 한 나의 결정을 매일 기뻐하였다.

1965년에 ‘기셀라’와 나는 선교인 훈련을 위한 ‘왙취타워 길르앗’ 학교에 초대를 받았다. 이 학교는 ‘뉴우요오크’에 자리잡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본부에 있으며, 그 당시 그곳에는 1,000명이 넘는 가족 성원이 생활하며 일하고 있었다. 현재 이 가족 성원은 거의 2,000명에 달하고 있다. 나에게 6개월이란 체제 기간은, 성서 교훈을 받고, 일치 조화하여 협조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국제 대회처럼 느껴졌다. 우리 제 41기가 졸업할 때, 그곳에서 우리의 벗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새로운 임명지는 ‘아프리카’ 근해에 있는 ‘인도양’의 한 큰 섬인 ‘마다가스카르’였다. 그곳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는 성서의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이르게 하며, 그들을 벗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생활

우리가 탄 비행기가 수도 ‘타나나리브’ 상공에서 하강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논이 펼쳐져 있고, 끝없이 이어져 있는 구릉들과 계곡들의 경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공항에는 약 20명의 벗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 날 밤에 우리가 집회에서 돌아올 때, 밝게 빛나는 별들이 달라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별들로 수놓아진 하늘의 모습은 정말로 달라 보였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때 지구를 돌아 남반구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의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이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똑같이 사랑이 있고 친절함을 알았다.

‘피아나란초아’ 시에서 봉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우리는 ‘말라가시’에서 하루에 11시간씩 4주간에 걸쳐 언어 교습을 받았다. 어원이 ‘유럽’어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우리는 그곳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참을성있고 공손하게 들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성서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의 가정으로 방문하면, 크게 감사함과 환대를 받는다. 종종 여러 가족 성원들은 함께 모여 열심히 듣는다.

또한 우리는 점차적으로 그들의 관습을 따랐다. 예를 들어 외국인은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받지 않으면, 현관 부근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우정적이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거의 무의식중에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면서 왼손은 오른 손목 밑에 받치고 오른손을 내미는 습관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아직 방법을 몰라 어려워한다면 누구나 다 당신이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줄곧 다정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문화인임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여러 마을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까지도 성서와 성서 서적을 읽기 좋아한다. 책들을 가지기 위하여 그들은 물건으로 교환하기를 좋아한다. 어린이들은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와 교환할 쌀을 가지고서 우리 뒤를 쫓아왔다.

‘피아나란초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노르웨이’ 족속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은 우리에게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실은 그들이 ‘노르웨이’의 ‘루터’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의미였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모두는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의 주된 신앙인 조상 숭배를 행하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집에는 그 옆에 조그만 집이 딸려 있는데 그것은 무덤집들이다. 우리가 알기 전에는, 호별 방문 전파를 하는 동안 가끔 무덤을 두드렸다. 한 가지 종교적 습관으로 몇년 마다 무덤에서 뼈를 취하여 특유한 새 천으로 싸는 일이 있는데 이 일은 하나의 큰 종교 축제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들 자신의 철학과 관습의 차이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에 대하여 분개하게 되었다. 어느날 청천벽력 같이, 우리는 ‘타나나리브’로 소환되어 즉시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과 성서 연구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울퉁불퉁한 길 위로 차를 타고 나올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로 가득찼다. ‘유우칼리’ 나무, 함수초와 대나무 및 논과 황토집들은 우리 마음에 한폭의 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4년이 지난 후인 이 때 이 섬은 우리에게 고향이 되었었다. ‘말라가시’의 벗들에게 작별의 손을 흔들면서, 또 한번 그 섬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일몰 광경을 감탄하면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의 봉사

우리는 그날 한 밤중에 ‘아프리카’에 있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많은 벗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이번에 또 우리는 ‘스와힐리’에서 4주간 언어 교습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부드러운 고가 도로 위로 자동차를 타고 우리의 새 임명지인 ‘나쿠루’로 갔다. 이 곳은 서구식 가옥들이, 정지된 ‘메낸가이’ 분화구의 비탈에 운집해 있는 하나의 조그만 농촌이다. 이 곳은 홍학들이 구름 같이 나르는 ‘나쿠루’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곳에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된 하나의 훌륭한 회중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하나의 주요한 일은 집회를 볼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그 도시 사람들은 족속과 인종이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 및 어린이들이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배합하고,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고 ‘페인트’칠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몇년전 ‘마우—마우 운동’ 때만 하더라도, 이들 족속들은 서로 죽이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이러한 평화스런 연합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예측했던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반가와하지는 않았다. 얼마의 사람들, 분명히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의 활동을 ‘케냐’ 정부에게 잘못 인식시켰다. 그래서, 어느날 우리는 우리의 사업이 ‘케냐’에서 금지된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우리 선교인들은 그 나라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형제와 자매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를 전송하기 위하여 ‘나이로비’ 공황에 나와서, 그들의 사람과 여호와께 대한 강한 믿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케냐’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정말로 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금지를 해제했다.

‘기셀라’와 나에게 주어진 다른 임명지는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다호메이’(현재 ‘베닌’이라 불리움)였다. 길게 뻗어 있는 하얀 모래와 푸른 태양을 따라 서 있는 야자수들은, 그 지방 주민들의 다채로운 전통적인 의복과 더불어 우리에게 정말로 즐거운 첫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수도 ‘코토노우’ 시의 공항에 마중나와 있는 벗들에게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 아름다운 지부 건물에는 선교인 집, 왕국회관 그리고 정원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파라코우’로 이사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이곳은 기차를 타고 하루쯤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하나의 조그마한 도시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그 기차의 차장은 우리를 돌봐 주었고, 심지어 그 기차 머리칸에 잠간 동안 탈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가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풍경은 좀 건조했으나 ‘티이크’, ‘캐슈우’, ‘카라이트’ 및 ‘바오밥’과 같은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밤이 된지 얼마 안되어 우리의 도착을 알리는 기차의 경적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번잡한 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형제들을 알아 볼 것인가? 그러나,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객차 창문 옆에서 마냥 기뻐하는 미소짓는 얼굴들만 보고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우리를 알아 보았다.

‘파라코우’의 조그마한 회중은 서로 다른 족속과 언어에서 나온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회는 불어로 열리고 있었다. 우리가 거기에 있는 동안 훌륭한 왕국회관을 세웠다. 우리가 성서 연구를 사회하던 많은 사람들이 회관을 세우는 일을 도와 주었다. 그들 중에는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 지방의 ‘페울’ 유목민에 속하는 여자가 한 사람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되어, 그가 아는 여러 언어로 좋은 소식을 전파했다.

‘파라코우’에는 지방적 전통이 매우 강했다. 왕이 서거하면, 활동의 중심지인 시장이 4개월 동안 문을 닫았다. 서거한 왕의 신하들과 새 왕의 신하들이 말을 타고 큰 군중 집회 시위를 했다. 밤에는 온통 축제 행사에 반주를 맞추는 ‘드럼’ 소리로 가득찼다.

결국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반종교 사상이 그 주민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사람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영광은 민중에게, 모든 권력은 민중에게’와 같은 ‘슬로건’을 반복하여 외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가 ‘파라코우’에서 1년이 좀 넘게 봉사한 후에, 정부 당국은 우리에게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중지하게 하였다. 얼마의 형제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고, 몇달 후에는 우리도 그 지방의 증인들이 보다 더 눈에 덜 띄는 방법으로 전파 사업을 계속하도록 남겨 놓고 그 지방을 떠나 ‘코노노우’로 가야 했다.

정부가 제한을 더 많이 가하자, 형제들이 박해를 대비할 수 있도록 박해를 다루는 주요점들이 「파수대」에서 강조되었다. 때가 되어 얼마의 형제들이 혁명 ‘슬로건’을 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했다.

어느날 ‘기셀라’와 내가 마을에서 돌아왔을 때, ‘코토노우’에 있는 지부 건물에는 무장한 혁명 위원회의 회원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고, 거기서 우리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감금되었다. 그 이튿날 제복 차림을 하고 기관총을 든 사람들이 우리 집과 짐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들 중에 두 사람은 나의 한 ‘노우트’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그 이름에 대해 신중하게 따졌다. 결국 우리는 이 사람들이 2,500여년 전에 살았던 하나님의 예언자들임을 그들에게 이해시켰다.

우리는 국가 보안대 본부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그 이튿날 그 나라에서 추방된다는 말을 들었다. 한 관리는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믿소. 그러니 오늘 밤에는 당신들이 집으로 가서 머무를 수 있소.” 하고 말했다. 그 이튿날 우리는 대부분의 선교인들이 ‘나이지리아’로 이송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날 오후에 한 경찰관이 우리를 ‘토고’ 국경선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 그 자가용 운전수는 우리를 ‘로메’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지부 사무실까지 먼 길을 태워다 주었다.

‘토고’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있게 되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또 다시 왕국 소식을 가지고 집집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뻤던가! ‘토고’에서 여러 주일을 즐겁게 보낸 다음에, 우리는 새로운 임명지로 가게 되었다.

1976년 5월에 우리는 차편으로 ‘어퍼볼타’로 갔다. 이틀 동안 아름다운 시골 지역을 여행하면서 ‘오우아가도우고우’에 있는 선교인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는 ‘무르’에서 언어 교습을 마치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불어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불어는 이 지방 언어였다. 나는 이곳에서 성서의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협조할 수 있어 정말로 기뻤다.

벗들로 구성된 세계적인 가족

나의 인생을 여호와의 봉사에 사용하기로 한 결정을 내가 후회해 본 적은 결코 없다. 나는 화학 학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보상을 주는 직업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독일, ‘프랑스’, ‘마다가스카르’, ‘케냐’, ‘베닌’ 그리고 이 곳 ‘어퍼볼타’에서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에 대한 진리를 배우도록 사람들을 돕는 특권을 그것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처럼 흥미진진함과 새로운 경험들로 가득찬, 만족과 보상을 주는,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이 나에게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최근에 나는 이제 80노인이 되어서도, ‘뮤니히’에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선교인으로 봉사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 ‘뮤니히’에 갔다가 다시 ‘어퍼볼타’로 돌아오는 여행을 하게 되어 ‘기셀라’와 나는 우리가 얼마나 축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공항에서 수년 전에 우리와 함께 봉사했던 벗들의 영접을 받았다. 우리는 즐거운 추억들과 새로운 소식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지만, 단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정쯤에 이야기를 줄여야 했다. 그 다음에 ‘니제르’ 공화국인 ‘니아메이’에서 잠간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 때 우리가 ‘베닌’에서 사귀었던 ‘아프리카’의 여러 벗들이 공항으로 우리를 마중나왔다. 우리가 열렬히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한 공항 관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집단의 사람들이기에 흑인과 백인이 그처럼 자유롭게 교재를 하는지 우리에게 물었다.

마침내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오우아가도우고우’의 공항 건물 부근에 멈추었다. 관망대에서 손을 흔들면서 미소짓고 있는 얼굴들은 이곳에서 그들과 다시 함께 있게 된 우리의 즐거운 감정을 반영해 주고 있었다. 진실로, 진실한 형제들과 자매들로 구성된 세계적인 가족의 일원이 되면, 마음 속 깊이 사무치며, 만족을 주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당신도 역시 이러한 가슴 뜨거운 축복들을 가져다 줄 인생에서의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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