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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80 08월호 11-14면
  • 남편과 함께 믿음을 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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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과 함께 믿음을 유지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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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80 08월호 11-14면

남편과 함께 믿음을 유지함

‘엘자 압트’의 체험담

하랄드는 작센하우젠에 있을 때 가끔 단지 다섯 줄만 편지를 쓸 허락을 받았다. 그 위에는 ‘이 사람은 계속하여 고집스런 성서 연구생이므로 정상적인 편지 내왕을 계속할 수 있는 특권이 거부되었음’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도장은 항상 나에게 격려가 되었다. 내 남편이 믿음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1942년 5월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왔더니 게슈타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을 수색하고 나서 옷을 입고 함께 가자고 명령했다. 우리의 어린 딸 유타가 게슈타포 중의 한 사람인 키가 유난히 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당기면서 유타는 “우리 엄마 놔 줘!”라고 말했다. 아무 반응이 없자 그 사람의 다른 쪽 다리로 돌아가더니 “우리 엄마를 놔 줘!” 하고 애원했다. 이것이 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 아이를 데려가! 침대와 옷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딸아이는 그 건물의 다른 집에 주어지고 문은 봉인되고 나는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그날 구속된 다른 증인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는 증인으로 가장하여 우리의 신임을 샀던 한 사람에게 배반당했던 것이다. 게슈타포가 우리의 등사기의 소재와 지하 전파 사업의 지휘자를 밝히라는 심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투옥되었다.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게슈타포를 좌절시켰다. 한번은 심문중에 장교가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당신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소?” 하고 외쳤다. “당신들은 체포를 해도 상관 않고, 감옥에 집어넣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수용소에 가두어도 걱정하지 않으니 말이오. 또 사형을 선고해도 태연히 서 있기만 하니 당신들을 어떻게 해야겠소?”

감옥에서 6개월 복역한 후 나는 다른 11명의 그리스도인 자매들과 함께 악명 높은 몰살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감되었다.

행실이 다르고 존경받음

우리는 먼저 아우슈비츠의 부속 수용소의 하나인 비어커나우로 송치되었다. 친위대 장교 한 사람이 우리가 성서 연구생이기 때문에 그 곳에 있게 된 것을 알고 “내가 당신들이라면 그 서류에 서명하고 집에 돌아갈 겁니다” 하고 말했다.

“서명을 하고 싶었다면 벌써 전에 했을 거예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여기서 죽을 겁니다.” 그가 이렇게 경고했다. 나는 “각오하고 있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우리는 사진을 찍히고 질문 용지에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료 센터를 통과하느라고 줄지어 기다리고 있을 때 역시 재소자들인 의사 2명이 새로운 재소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 의사는 다른 의사보다 수용소에 훨씬 오래 있었다. 나는 고참 의사가 젊은 의사에게 “성서 연구생들은 항상 알아볼 수 있지요”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그래요?” 젊은 의사가 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이 사람들 중에서 누가 성서 연구생인지 가리켜 보시지요.” 나는 바로 그 때 줄에서 그 사람들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자주색 삼각형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가리키면서 나이 많은 의사가 “이 사람이 성서 연구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젊은 의사가 와서 나의 삼각형을 보고 외쳤다. “맞았어요! 어떻게 아셨지요?”

“글쎄, 이 사람들은 다른 데가 있어요. 금방 구별할 수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사실이었다. 우리는 다르게 보였다. 우리는 똑바로 서서 걸었고 구부정하거나 풀이 죽어 있지도 않았다. 우리들의 시선은 항상 정면을 향했고 다른 사람들을 스스러워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대면하였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대표하는 증인으로 이 곳에 와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색다른 태도를 취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 12자매들은 비어커나우에 며칠밖에 있지 않았다. 그 다음에 아우슈비츠로 이감되어 친위대 장교들의 집에서 일했다. 그들은 그 일을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들에게 독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정직하게 행동했으며 물건을 훔치려 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삶과 죽음

얼마 동안 우리 모두는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커다란 벽돌집 지하실에서 지냈다. 우리들에게 일거리를 줄 때가 왔다. “누구 어떤 곳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 없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몹시 교만하시군.” 여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린 교만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어느 곳에 임명되든 그 곳에서 일하겠습니다.” 나의 친구가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우리의 방침이었다. 우리는 일터를 선택하려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여호와께 인도를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어려운 곳에 배치되면 우리는 돌아서서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한다.

내가 맡은 일은 수용소 밖에 살고 있는 친위대 장교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집을 청소하고 그의 부인을 도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봐주고 시내에 가서 장보기를 해주는 일들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 안심하고 감시병 없이 수용소 밖으로 내보냈다. 물론 줄무늬의 죄수복은 항상 입은 채로였다. 얼마 후 우리들은 밤에 수용소로 되돌아가지 않고 일하는 곳에서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친위대 장교 집 지하실에서 잤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면 친위대 장교가 나를 사무실로 소환하면 문에 서서 “재소자 24,402번, 입실 허락을 바랍니다”라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받은 후에는 “재소자 24,402번, 퇴실을 요청합니다”라고 말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의 이름은 절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다른 수용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양식이 「파수대」와 다른 출판물의 형태로 아우슈비츠에 정기적으로 들어왔다. 나는 하랄드의 편지까지도 받았었다. 이것은 외부의 증인과의 통신망이 얼마나 정기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내 친구 거어트루드 오트를 포함한 몇 사람은 친위대 가족이 살고 있는 호텔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거어트루드가 창문을 닦고 있는데 여자 두 명이 지나가면서 쳐다보지도 않고 그중의 한 사람이 “우리도 여호와의 증인이예요.” 나중에 그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어트루드가 말했다. “화장실로 오셔요.” 거기서 만나 이야기하고 그 다음부터는 만날 약속을 하여 귀중한 성서 서적과 다른 편지들을 몰래 들여보내 주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던 기간중에, 특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여호와께 그분의 도움과 보호에 대하여 감사드렸다. 유대인을 가득 실은 화물이 도착하는 대로 곧장 가스실로 보내고 있었다. 한번은 가스실에서 일한 수용소의 여감독을 간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말해 주었다.

“사람들을 한 방에 몰아넣지!” 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방으로 들어가는 문에 ‘목욕실로’라는 말이 써 있지.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아, 전라가 되어서 목욕실로 들어가면 문을 뒤에서 잠가버리지. 그런데 물이 아니라 가스가 샤우어 꼭지에서 흘러 나오는거야.” 이 일을 목격해 온 그 여자는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병석에 눕게까지 되었다.

수용소에서 수용소로, 마침내 해방

1945년 1월에 들어서면서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참패에 참패를 거듭했다. 수용소를 비우려는 노력에서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을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옮겨 갔다. 밤낮 이틀을 걸어 그로스로젠 수용소로 행진하고 나자 몇몇 자매들은 기진 맥진하여 더 갈 수가 없었다. 사흘째 밤에 마침내 북적거리는 외양간이나마 누울 수 있는 허락을 받았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가! 그 여행중 내내 우리가 먹은 음식이라곤 우리가 가지고 올 수 있었던 적은 양의 빵뿐이었다. 아무도 다음날의 행진에 살아 남을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너무도 이상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날 우리가 출발할 때 내가 일해 준 적이 있는 친위대 의사 한 사람이 우리를 보고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성서 연구생은 나오라! 성서 연구생은 나오라!”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말했다. “모두 나왔는가 확인해 봐요.” 그런 다음 우리 40명의 자매들을 정거장으로 데려가서 기차로 수송할 조처를 취했다. 우리에게는 기적으로만 여겨졌다.

기차가 너무 혼잡해서 우리 셋은 어쩌다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서 브레슬라우(폴란드어로는 브로츨라프)까지 계속 가 버렸다. 우리는 그 곳에서 내려서 수용소로 가는 방향을 알아보았다. 수용소 문에 다다르자 경비원들이 계속 웃다가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 말고는 이 곳에 제 발로 걸어오는 사람은 없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수용소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자매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로스로젠에서는 2주일만 있었고 그 다음 오스트리아 린쯔 근처에 있는 마우타우젠 수용소로 실려 갔다. 그 곳의 상태는 끔찍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음식은 거의 없었고 누워 잘 짚도 없고 나무 판대기뿐이었다. 잠시 후에 우리는 다시 이송되어 독일의 하노버 근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갔다. 우리 자매 하나가 도중에서 죽었다. 이 수용소의 비참한 상태로 인하여 이 때까지 수송되는 동안 살아 남았던 많은 자매들이 여기에서 사망했다.

우리 중 약 25명이 다른 수용소 도라노르트하우젠이라는 이름의 비밀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원래 남자 전용 수용소였는데 최근에 매춘부 얼마를 수감했었다. 그러나 수용소 소장이 여감독에게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알려 주었다. 도라노르트하우젠에서는 그대로 잘 지냈다. 한 형제가 재소자용 부엌에서 일하고 있어서 질이 나은 음식을 먹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즈음 종전이 다가와 있었다. 함부르크 근처 장소로 우리를 수송하는 조처를 취했다. 나는 그 여행을 하는데 통조림된 한 통의 고기와 얼마의 빵을 받았지만 남자들은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한 폴란드 형제가 매우 아파서 내가 받은 음식 배급을 그에게 주었다. 나중에 이 형제는 이것 때문에 자기가 살았노라고 말했다. 도중에 미국 군인을 만나 우리는 풀려 나왔다. 친위대는 자기들이 가지고 갔던 사복을 입고 무기를 숨기고 도주해 버렸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하랄드와 내가 약 한달 후에 서로 만났을 때 그것은 기적과 같았다.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서로 껴안고만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지 기나긴 다섯 해가 흘렀던 것이다.

더 많은 시험과 축복

집에 돌아와 보니 문에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유타 압트가 이 집에서 산다. 그 부모는 수용소에 가 있다.” 집에 있었다니 얼마나 잘된 일이며 안전한 일이었는가! 특히 우리가 여호와께 충실했었다는 것은 참으로 만족스런 일이었다.

독일 수용소에서 지낸 세월은 내게 훌륭한 교훈을 주었다. 그것은 극도의 시험을 받을 때 여호와의 영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체포되기 전에, 심한 시험을 받을 때 여호와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 안정감을 갖게 한다고 쓴 자매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 자매가 좀 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직접 시험을 겪어 보니 그 자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내게 일어났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신다.

딸아이와 헤어질 때 나를 도와준 것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여호와의 명령이었다. (창세 22:1-19) 여호와께서는 정말 이삭을 죽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고 싶어하셨다. 내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우리 아이를 희생하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헤어져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요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유타는 이 여러 해 동안 여호와께 계속 충실하였으므로 우리는 매우 기쁘다.

남편의 충실함은 항상 내게 기쁨이요 힘이 되었다. 나는 여호와께 그러한 충성을 지킨 그를 사랑하고 존경할 따름이다. 그 결과 우리는 넘치는 축복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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