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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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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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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의 필요성
  • 인간 통로
  • 신사적인 견해
  • “종”에 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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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1
파81 10/15 22-24면

성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가?

지난 4월에 ‘브라질’의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삼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한 평범한 신문 기자 겸 ‘필름’ 제작자이며 사진사로서, ·⁠·⁠· 본인은 하고 싶어하는 모든 일을 다 해보았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본인은 중요한 것이 결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읍니다. 이미 2년 동안, 본인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출판물들을 구독해 왔고,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인류를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신문들이 제 일면에 실어서 성인들과 아이들이 탐독하게 되는 매음과 살인, 마약 사용, 폭력 및 그 밖의 갖가지 나쁜 짓을 고무하는 영화 각본이나 특종 화제 및 특집 기사를 쓰기에 진력이 났읍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창의력을 사용할 시간은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읍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상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기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삼가 여러분의 친절한 회답을 기다리겠읍니다.”

이 사람에게 단순히 성서 읽기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서를 읽으라고 말해 주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였겠는가? 그는 어느 정도 성서를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이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복음서 필자 ‘누가’가 사도행전 8장에서 언급한 ‘에디오피아’ 사람과 같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병거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에 따라 복음 전도자 ‘빌립’이 그 병거에 접근하였다. ‘빌립’은 그 사람이 지금의 ‘이사야’ 53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고 있는 것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 ‘에디오피아’인은 대답하였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사도 8:30, 31.

그렇다, 그 ‘에디오피아’ 사람은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때 언급한 분의 신원을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밝혀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빌립’은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은 이 증거를 받아 들였고 첫째 기회가 이르자 침례받기를 요청하였다.—사도 8:32-38.

설명의 필요성

이 동일한 지도의 필요성을 예수의 두 제자에 관한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으신지 셋째 날에 ‘엠마오’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들은 「히브리어 성경」에 익숙해 있었으나, 아직도 예수께서 왜 고난을 겪고 죽으셔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활되신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다른 형태로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이 슬픈 얼굴을 한 제자들을 돕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성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밝히시고 다음에 자취를 감추시자, 그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말하였다.—누가 24:27, 32.

같은 날 조금 후에,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의 한 방에서 열 한명의 사도들을 만나 자기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아직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갑자기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더욱 계몽을 주셨는가? 그렇다, 그분은 이와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이어서 ‘누가’는 이렇게 부언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니라.]”—누가 24:44, 45.

또한 “성경에 능한 자”였던 ‘아볼로’의 경우도 올바른 근원으로부터의 지도가 필요함을 설명해준다. ‘아볼로’는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하여 유창한 언변과 강력한 설득력으로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도 ‘바울’과 밀접히 연합하고 있던 한 부부가 그에게 성경적인 지도를 베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그리스도인 부부는 ‘아볼로’가 전도하는 것을 듣고 그에게는 어떤 교리에 관해서는 더욱 설명해줄 필요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한 예로, 그는 단지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사도 18:24-26.

인간 통로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성서를 온전히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분이 마련하신 인간 통로와 접촉할 필요가 있도록 성경이 기록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도움은 또한 우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합당한 통로와의 연합을 통해서 오게 되는 것이다.—고린도 전 2:6-10.

성서는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기 위해 조직된 회중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 4:11-14.

제1세기에,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러한 회중적 마련에 주의가 돌려졌다. 예를 들면, 이방인 개종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해 의문이 생겼을 때에 이 점이 대두되었다. 그 경우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즉 ‘보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셨고 나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게 하셨으며 예언과 영감으로 은사를 베푸시고 강력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이 할례 문제에 관해 내가 여러분에게 진상을 밝히겠읍니다.’라고 말하였는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의 통치체의 견해를 듣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할례 문제에 관한 결정을 알려준 사람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그 당시에 분명히 ‘예루살렘’ 회중을 사회하는 감독자였던 예수의 이부 형제 ‘야고보’였다. 그후에 ‘바울’과 ‘실라’ 및 다른 사람들은 이 결정을 형제들에게 전해 주었다.—사도 15:1-35.

‘바울’의 선교 여행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는 어떤 집단에 대한 하나의 사도로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맡기신 책임에 관하여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는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의 책임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사실이 후에 ‘예루살렘’ 통치체의 “기둥[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이 점에 관해서 갈라디아 2:9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사도 9:15; 13:1-4; 22:17-21.

나중에,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곳의 ‘유대’인들은 그에 관한 그릇된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장로들은 이 보고를 무마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바울’이 할 일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바울’은 기꺼이 그들의 지시를 따랐다.—사도 21:17-36.

우리가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게도 그리스도의 지휘아래 하나의 보이는 조직인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을 마련해 주셨다. 이 조직의 인도하에 수행된 활동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번영케 하신 방법을 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조직을 승인하신다는 사실에 관해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마태 24:45-47.

신사적인 견해

우리는 이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마련해준 영적 양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태도로 보아야 하는가?—물론 그것이 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주 비판적으로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얼마의 사람들은 분명히 이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7:11을 인용해 왔는데, 그 귀절은 ‘베뢰아’에 있는 새로 관심가진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라.]”

그러나 이것은 ‘베뢰아’ 사람들이 그들이 듣고 있는 소식에서 결점을 찾으려 했다거나 혹은 의심하는 태도를 가졌음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발행한 간행물들을 결점을 찾아내려는 생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례를 세운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신사적인 견해를 가졌던 ‘베뢰아’ 사람들에 관한 진술 내용에 유의해 보자. ‘실라’를 동반한 ‘바울’이 두번째 선교 여행중이었다. 발생된 박해로 인하여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은 그들을 ‘베뢰아’로 보내었다. ‘베뢰아’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믿음을 둔 진실한 ‘유대’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히브리어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로써 만족해야 했던 단순히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때까지 ‘베뢰아’의 이 독실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그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이처럼 ‘베뢰아’의 그 신사적인 ‘유대’인들은 ‘바울’이 언급한 것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성서를 매일 탐구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정신적 태도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하였는가? 회의론적인 태도로써 ‘바울’이 그릇됨을 증명하려고 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마르스’ 언덕에서 ‘바울’을 비난한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도 17:11, 32.

이 ‘베뢰아’ 사람들은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으며 그 결과, 믿게 되었다. 그들은 편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좋은 소식이 참된 것으로 증명되기를 원하였다. 사실상 어떤 사람이 믿음을 획득하려면 “믿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가 믿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아무리 많은 증거로도 그를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찾고자만 한다면, 믿음으로 인하여 그가 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구실이나 그럴듯한 이유들을 언제나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적절하게도 이렇게 이야기한 바와 같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데살로니가 후 3:2)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믿으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을 받아들이려는 정신적 자세로 숙고하였다. 그 결과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더라.]”—사도 17:12.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회중들과 이미 “진리의 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베드로 후 2:2) 그러나 우리는 그 형제들이 우선 그 편지들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필자들이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회의적인 정신 태도로 조사했다는 것을 아무 데서도 읽어볼 수 없다.

“종”에 대한 견해

우리는 이 점을 고려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영적 양식을 나눠주기 위하여 “종”으로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는지 확인하였다면, 그 양식에 해로운 것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 간행물들을 발행해 내는 ‘브루클린’ 본부에서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많은 장성한 연로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남은 자”와 “다른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간행물을 준비하는 형제들도 전혀 잘못이 없을 수는 없다. 그들이 집필한 것은 ‘바울’과 기타 성서 필자들의 기록처럼 영감받은 것이 아니다. (디모데 후 3:16) 그러므로 때로는 이해가 더욱 분명해짐에 따라 견해를 시정할 필요가 있었다. (잠언 4:18)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인정하는 성서에 근거를 둔 전체 진리를 계속 가다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러 해에 걸쳐서 이 전체 진리에 조정이 가해짐으로써 그것은 이 “마지막 날”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에 이전 어느 때보다도 훌륭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성서 주석가들 역시 영감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심지어 기본적인 성서 진리, 즉 다가오는 지상 낙원과 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 및 죽은 자의 상태 등을 밝히지도 못했다.

반면에 우리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조직이 지난 백여년간에 이루어 놓은 기록을 볼 때, 예수께서 사도들도 자기를 떠나기를 원하는지 물었을 때,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베드로’가 표현한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다. (요한 6:66-69) 이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며,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조직 밖에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성경적인 인도를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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