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구하는 이웃 사랑을 나타냄
통용 기원 1559년의 일이었다. ‘네델란드’ 군주 ‘윌리암’과 ‘프랑스’ 왕 ‘헨리’가 ‘파리’ 변두리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우연히 자기들만 떨어져 있게 되었을 때, ‘헨리’ 왕은 그 군주에게 ‘스페인’의 ‘필립’ 왕이 ‘네델란드’와 ‘프랑스’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전부 죽이려는 계획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이야기하였다. ‘네델란드’에서 그 일을 집행할 자들은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스페인’ 군대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 ‘네델란드’ 군주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는 그러한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a 그 자신은 (‘루터’파 배경을 가지고) ‘가톨릭’ 교인으로 양육받았지만, 그는 살해당하게 되어 있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모두를 깊이 동정하게 되었다. 아주 신중하게도, 그는 이러한 흉악한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움이나 어떤 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침묵자 ‘윌리암’”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네델란드’로 돌아 가기 전에 그는 이러한 끔찍한 음모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고향에 돌아 오자 마자, 자기 나라로부터의 ‘스페인’ 군대 철수를 주장하는 여론을 일으켰다. 사실상, 그는 그 악한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국부”가 되게 하는 길을 열어 주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윌리암’에게는 “신교(新教) 혐의를 받고 있는 저명 인사들”의 일부 명단과 함께 그들이 결코 도망하지 못하게 해두라는 지시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지시를 이행하기는커녕, 그러한 “저명 인사들”에게 경고를 하여 도망할 수 있게 했다. 그가 나중에 설명한 것처럼, 그는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모든 일로 ‘윌리암’은 참으로 생명을 구하는 이웃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b
오늘날 발해지고 있는 경고
오늘날 그와 비슷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운 장래에 그들에게 임할 어떤 무서운 운명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란 분별력 없는 사람들의 종교적 편협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에 모욕을 돌리고 있고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 모두에 대해 곧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 예언의 성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지정된] 때”가 급히 다가 오고 있음을 알려 준다. (계시 11:18, 신세 참조) 그렇다, 큰 환난의 첫 부분이 일어날 때는 가까왔다.—마태 24:21.
이 비극적인 사건이 가까왔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 즉 “큰 ‘바벨론’” 영역 내에 있는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러한 천사의 경고를 발하고 있다.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시 18:2, 4) 물론, 이들 진실한 사람들이 조직화된 모든 거짓 종교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또한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으로 도피해야 한다. 그래서 ‘증인’들은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세계에 계속 전파하고 있다.—마태 24:14, 신세.
그러한 이유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또한 그들의 온갖 노력을 바쳐, 진실한 진리 탐구자들로 성서 ‘스바냐’에 나와 있는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도록 돕고 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2:3) 그리하여 이들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하신 이러한 고별시에 주신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 20.
집집으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
여호와의 심판 날이 가까왔기 때문에, ‘증인’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의 유일한 도피 수단임을 알리는 데 긴급성을 느낀다. 생명이 매우 중요하므로 사람들을 이런 방법으로 돕는 것은 확실히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고들을 보면, 훌륭한 그리스도인 행실이 어떤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 왔다. 독일에서 열린 ‘증인’의 대회에 참석한 한 ‘러시아’ 저술가는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여러분의 행실은 최상의 교훈입니다.” ‘증인’들은 길 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서 잡지들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증인’들은 그들이 사업 관계상, 그리고 여행할 때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들을 찾아 내거나 만드는 데, 혹은 자기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깨어 있다. 사실들은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성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호와의 백성이 증거하는 일을 이러한 활동들에 국한시켰더라면,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틀림없이 경고의 소식과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듣기에 합당한 많은 사람들을 간과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증인’들은 호별 형태의 전파 활동을 채택하였다. 사실상, 그들은 이러한 방법의 전파 활동에 매우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자면, ‘증인’들의 상표처럼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는 어느 가족이 ‘아마 분명히 ‘여호와의 증인’일거야’ 하는 말로 문전 ‘노크’에 응하는 것이 나오기도 하였다.
얼마 전에 ‘증인’의 이러한 활동이 중앙 ‘아메리카’의 한 나라에서 금지되었었다. ‘증인’들이 탄원하였을 때 그 탄원을 취급한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종파들은 여러분 ‘증인’들처럼 집집으로 찾아 다니질 않습니다. 이 활동은 여러분의 숭배의 일부입니까?’ 그는 이것이 그들의 숭배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들의 숭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결과,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증인’들이 호별 활동을 실행하는 데에는 건전한 성경적 선례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내보내셨을 때 그들에게 그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의 집들로 가라고 명하셨다. (마태 10:7, 12, 13, 42; 누가 10:5, 6) 더우기 사도 ‘바울’은 ‘에베소’ 회중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 너희도 아는바 ···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집집으로, 신세]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사도 20:18-21.
그렇다, ‘바울’은 ‘각 집에서’ 가르쳤다. 그가 의문의 여지 없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강화시키고 격려해 주기 위해 방문하였겠지만, 우리는 결코 이 귀절의 ‘바울’의 말을 그러한 목자의 활동 즉 양치는 활동들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왜냐 하면 ‘바울’은 자기가 ‘유대’인과 희랍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파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가 이 일을 생명을 구하는 일로 여겼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그가 자기의 전파 활동의 결과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다.—사도 20:25-27.
예언적 본
전술한 내용을 확증하는 것은 에스겔 9장에 나와 있는 예언으로써 그것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의 호별 활동을 전영하였다. 그것은 예언자 ‘에스겔’이 약 2,500년 전에 본 환상에 관하여 알려 준다.
그 전 장에서 이 예언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갖가지 우상 숭배와 배교를 보여 주는 환상을 받았음을 알려 준다. 그 다음 9장에서 ‘에스겔’이 기록하고 있는 환상은 살육하는 무기들로 무장한 여섯 명의 사람들 및 갑옷이 아니라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일곱번째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 일곱번째 사람은 ‘예루살렘’ 성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4절) 살육하는 무기를 가진 여섯 명의 사람들은 그를 따라 다니면서 그 표가 없는 모든 자들, 그렇다, 그 성에서 자행되는 온갖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식하며 울지 않는 모든 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은 탄식하며 우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 낼 것인가? 「파수대」 1972년 5월 1일 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광장이나 장터에 가서 찾아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정, 즉 집집으로 가야 하였읍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토로’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그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할 것인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조급한 작업이 아니라 참을성 있고 성실하게 집에서 집으로,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다니면서 정직하게 살피고, 편애하지 않고, 그 왕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보고 진실로 탄식하는 사람들에게만 표를 해야 하였읍니다. ··· 그는 벗에게나 원수에게나 다 공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마에 구별하는 표를 하였읍니다.”
마치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이 처형을 면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표하는 그의 임무를 온전히 이행하려면 호별 방문을 해야 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 내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면 호별 방문을 해야 한다.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이 처형을 면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의 이마에 표하는 그 표에 상응하는 것은 오늘날 무엇인가?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한 성품을 배양함으로써만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여호와의 집행자들의 처형을 면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태 24:21)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은, 마치 이마 위의 표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성서는 그러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배양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권하고 있다. 물론, 사람에게 그러한 표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힘, 자산이 든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희생을 기꺼이 치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또한 생명을 구하는 이웃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에베소 4:20-24; 골로새 3:9-11.
그렇다, 만연해 있는 악한 상태 때문에 울며 탄식하는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집집으로 찾아가는 첫 단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여호와의 종이 생명을 구하는 이웃 사랑을 나타내려면, 재방문을 하고 성서 연구를 함으로써 호별 방문 후에 따르는 일들도 잘해야 한다. 그러한 성서 연구생들은 또한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그리스도인 회중과 연합해야 하고, 성서 원칙들을 자기들의 생활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 다음,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게 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그분께 헌신하고 침례받는 단계로 인도해야 한다. 이러한 행로는 ‘표를 받’는 일에 매우 중요하므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옷입는 일에 부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수행함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으로 생명을 구하는 이웃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각주]
a ‘윌리암’이 이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은 신의 섭리였음이 확실하다. 그 음모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더라면, ‘유럽’의 역사와 종교의 자유를 향한 발전이 얼마나 바뀌었을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b 「‘네델란드’ 공화국의 기원」 제1권 239, 2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