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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무와 쾌락—당신은 어느 것을 앞자리에 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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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무와 쾌락—당신은 어느 것을 앞자리에 두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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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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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4
파84 2/15 11-14면

의무와 쾌락—당신은 어느 것을 앞자리에 두는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 도덕 행위자로 만드셨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에게,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이 말은 때때로 의무와 쾌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뜻이 된다.

잘 알려진 한 시귀는 “의무와 쾌락이 부딪칠 땐, 쾌락을 깨뜨려 버리라”고 말한다. 의무와 쾌락이 흔히 부딪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처럼 부딪치는 경우라면, 우리는 어느 것을 앞자리에 두는가? 의무는 ‘사람이 해야 할 또는 해서는 안 될 도덕적 책무’로 정의된다. 쾌락이란 ‘만족한 상태; 기쁨; 향락,’ 유쾌하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우리의 의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셨듯이, 우리의 우선적인 의무와 책무는 우리를 지으신 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것들이다. (마가 12:29, 30)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그분의 목적 가운데 주된 것은 그분의 이름과 왕국에 관해 증거하며 제자를 삼는 일이다. (이사야 43:10-12; 마태 10:7; 24:14; 28:19, 20)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무를 합당히 이행할 수 있도록, 꾸준히 성서 지식을 얻고 정기적으로 동료 숭배자들과 교제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우선적 의무에는 이들 다른 의무들이 수반된다.—디모데 전 4:16; 히브리 10:23-25; 로마 12:12; 전도 12:13.

또 우리에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책무도 있다. 주로 이것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부류의 책무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여 살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므로, ‘먹으려면 일해야’ 한다. 우리 가족을 위하여 필수품을 공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는 교통 법규 같은 나라의 법을 준수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로마 12:17; 13:1-7; 데살로니가 후 3:10; 디모데 전 5:8.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 가족에 대한 의무, 이웃에 대한 의무, 또한 바로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다. 의무, 의무, 의무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개인적 쾌락을 즐길 시간도, 기회도 없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쾌락을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사는 많은 사람들, 즉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같아서는 안 된다.—디모데 후 3:1, 4, 새번역.

즐겨서는 안 될 “쾌락”

쾌락을 제 자리에 두는 일에 있어, 어떤 부류의 쾌락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이른 바 “짜릿한 흥분”, 즉 그 일로 말미암는 “쾌락 자체”를 얻기 위해 교통 법규를 비웃거나, 습관적으로 들치기나 다른 형태의 범법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히, 이 모든 행동은 즐겨서는 안 될 “쾌락”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약을 사용하여 쾌락을 추구하다가, 마취제의 노예가 된다. 여러 가지 담배를 피우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습관들 역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상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속박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또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는 교훈을 받고 있다.—고린도 후 7:1; 마태 22:39; 로마 6:6, 16; 13:10.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으나, 즐겨서는 안 될 쾌락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불의한 성과 관련된 것이다. “자신의 쾌락을” 갈망하여 자행되는 이같은 온갖 성적 부도덕 행위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상치된다. (야고보 4:3, 새번역; 잠언 6:20-35) 우리는 성적 부도덕에 빠지는 일뿐 아니라, 장난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부도덕한 쾌락들을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들이 더 바람직하고 즐길 만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 같다. 마치 창녀가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며 유혹하는 것과 같다.—잠언 9:17.

이런 쾌락들이 타락한 육체에 유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여야 한다. (창세 8:21; 고린도 전 9:27) 우리가 하나님의 승인받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이런 불의한 쾌락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린도 전 6:9-11.

쾌락을 즐기는 일에 적용되는 원칙

그리스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쾌락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쾌락을 합당한 자리에 두기 위해서는 질, 양, 시간, 비용의 원칙에 따라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람들이 가장 널리, 가장 자주 즐기는 쾌락은, 의심의 여지 없이, 먹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즐거움이 되게 해주신 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친절의 표현이다. 이 즐거움은 ‘살기 위해 먹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원칙으로 한계가 그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로, 먹는 데에도 원칙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각을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몸에도 좋은 음식을 골라 먹고자 할 것이다. 또 우리는 과식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알맞은 양 이상 먹지 않고자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시간 조절에도 주의해야 한다. 과식이 집중력과 고도의 숙련된 활동을 흔히 방해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직업 가수들이 음악회 바로 전에는 푸짐한 ‘스테이크’나 칠면조 정식을 먹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어려운 임명을 다루거나, 성서 강연을 하기 바로 전에 과식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잔뜩 배부르게 식사를 하면 심지어 어떤 다른 사람의 성서 연설을 우리가 즐기는 데도 지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알레르기’ 증세나 당뇨병으로 고생하거나, 몹시 비대한 사람들은 식도락을 즐길 때 이러한 질과 양과 시간의 원칙에 유의해야 할 이유가 한층 더 많다. 또 그런 경우 우리는 비용에 아랑곳하지 않음으로 이런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면에서 낭비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또 다른 쾌락은 ‘텔레비젼’ ‘프로’를 보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보는 ‘프로’가 즐길 만하며 건전한지, 그리고 또한 교육적인지도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그런 경우 우리는 양에도 주의하여, 너무나 많은 시간을 ‘텔레비젼’을 보는 데 바쳐, 잠을 충분히 못자거나 우리의 의무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원한다. 시간 조절 또한 고려해야 한다. ‘텔레비젼’ ‘프로’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휴식을 취하는 일이나 회중 집회에 참석하는 일 같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수행하는 일이 방해받기를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젼’ 시청을 즐기는 데 적용되는 내용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스포오츠’ 행사에 참석하는 일에도 같은 효력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성서 강연을 들어야 하는 시간에, 어떤 구기를 보러 운동장에 가 있다면, 참으로 부적절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는 음악을 좋아하다가 같은 유의 잘못을 범하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어떤 취미 생활을 통해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역시 우리는 자제력을 행사하며, 앞자리에 둘 것을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취미 때문에 우리가, 담배를 피우고 불경스러운 말을 쓰는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면 어떨 것인가? 혹은 우리의 취미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거나, 우리의 건강에 해롭거나 가족에게 어려움을 준다면 어떨 것인가? 이런 경우라면, 다른 취미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취미나 오락에 문제가 될 만한 점이 없는 경우라해도, 우리는 그것을 제 자리에 두도록 유의해야 한다. 어떤 기혼 남자가 ‘보울링’을 좋아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이 그와 함께 ‘보울링’을 즐길 수 없다면, 그가 이런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 현명하고 사랑에 찬 일일 것이다. 또 ‘보울링’ 시합에 나간다면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는 일이 지장을 받게 될 경우, 그런데 참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보울링’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하이킹’, 수영, ‘보우트’ 타기 같은 다른 여가 활동에도 같은 효력을 가지고 적용된다.

휴가철은 쾌락의 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때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낯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거나 여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행동에 조심성을 잃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는 일을 접어 두고, 관광을 하거나 어떤 기분 전환을 할 만한 장소를 찾아가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의무를 다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그렇다. 의무를 다하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의무와 즐거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는 의무를 다하는 데서 커다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정신 태도를 올바르게 갖기만 한다면 그러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첫 사람 ‘아담’은 ‘에덴’에 있는 아름답고 공원같은 정원인 자신의 집을 돌보는 데서 큰 즐거움을 누렸다. 그는 또한 그 동산에 살던 모든 동물들과 사귀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에서 많은 즐거움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 ‘하와’를 선물하셨을 때, 그의 즐거움과 행복은, 창세기 2:15, 18-23에서 알려 주듯, 넘쳐 흘렀다.

남편은 자기가 하는 일의 성질이 어떠하든, 그 일이 자신과 가족을 훌륭히 부양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올바른 정신 태도를 가진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집을 산뜻하게 유지하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마련하는 일 등에서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의무를 다함으로 즐거움을 얻는 면에서 뛰어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새 진리를 배우는 데서 큰 기쁨을 얻는다. 이 점에서 그들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말한 시편 필자처럼 느낀다.—시 119:162.

또 ‘여호와의 증인’들은 회중 집회에서 함께 모이며 정기적으로 대회를 개최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더 나아가 이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참됨을 발견하고 있다. (사도 20:35) 호별 방문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들이 가진 의무를 우선적으로 다하고 있다. 잘 들으려고 하며 그들과 함께 성서를 토론하려고 하는 사람을 발견할 때, 특히 이 사람이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할 때, ‘증인’들은 그 일에서 즐거운 만족을 얻는다.—마태 5:3, 신세.

우리의 의무감을 한층 날카롭게 함

우리의 의무감을 한층 날카롭게 하고 쾌락을 적절한 자리에 두는 데는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 공평과 분별력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참으로 관대하기 위해서는 공평함을 나타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돕느라고 자기 가족이 필수품에 곤란을 느낄 정도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공평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분별력이 있다면, 우리의 의무 이행을 소홀이 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과 해를 끼치는 정도에까지 이르는 것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우리 역시 그들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누가 6:31.

특히 사랑이 있다면 쾌락보다 의무를 먼저 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1서 5:3)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의 복지만이 아니라,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린도 전 10:24.

그러므로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생활에서 즐거움을 가질 여지는 있다. 우리는 의무를 다하는 데서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쾌락을 잘 통제하여 우리의 의무를 거스르지 않도록 한다면, 그것 역시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즐기는 쾌락의 질, 양, 비용 그리고 우리가 그에 바치는 시간에 유의하도록 하자. 물론 이것은 의무를 쾌락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말이 된다.

[13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들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서 진정한 즐거움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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