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85 1/15 4-7면
  • 종교는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종교는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경건—그것은 무엇인가?
  • 사실들은 어떠한가?
  •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 종교의 부흥인가, 영적 위기인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 여러분의 인내에 경건한 정성을 더하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2
  • 그리스도께서 하신 바와 같이 항상 경건한 정성을 다하라
    우리의 왕국 봉사—1991
  • 예수께서 보이신 경건한 정성의 본을 따르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0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파85 1/15 4-7면

종교는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가?

대중적이고 종교적인 잡지와 신문들은 모두 일부 교회들이 거두고 있는 “성공”에 관해 신속히 보도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기도와 찬양의 집회에 관해 알려 준다. 그들은 일부 교회들의 설교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기보다는 더욱 영적인 것이 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그들은 불우한 자들에 대한 봉사, 부흥의 주말, 성서 연구 집단, 예배식 춤 교습반, 그리고 사제나 수녀가 부족한 곳에서 자원한 평신도가 관여한 일에 관해서 말해 준다. 이 모든 일은 종교적 부흥의 징후로 간주되고 있다.

작년 3월, ‘전국 복음 전도자 협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처럼 공언했다. “미국은 영적인 재각성을 시작했읍니다. 믿음과 희망은 다시 부흥되고 있읍니다. 미국민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있읍니다. ·⁠·⁠· 그리고 본인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 복된 땅을 치료하기 시작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확신의 표시는 고통을 당하는 인류가 직면해 있는 많은 문제들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재각성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 모든 소식들은 매우 훌륭하게 들린다. 그러나 “영적인 재각성”과 “부흥”이 무엇을 성취했는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는가? 사람들은 그들이 더욱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가? 만일 불경건이 오늘날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생각되어 왔다면, 그들은 경건을 나타내도록 도움을 받아 왔는가? 그 대답들은 종교가 오늘날의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이다.

경건—그것은 무엇인가?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정성 혹은 하나님 지향적임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경건은 단지 겉으로 독실함 혹은 종교심을 나타내는 것을 훨씬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다. 경건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개인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에 주된 관심을 갖는다. 그 결과로 개인의 생활은 훨씬 나은 것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디모데 전 4:8.

단지 현실 생활에 불만을 느껴 종교로 향하고 있는 개개인들이 그러한 범주에 어울리는가? 아니면 그들은 사도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언급한 자들에 더 가까운가?—디모데 후 3:5.

어떤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분을 섬기려는 목적을 위해서 보다는 단지 어떤 개인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향한다면, 그의 정성의 대상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는 그 자신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종류의 정성은 그 개인의 생활을 이기적인 일을 추구하는 생활에서 하나님께 진실하고 자기 희생적인 봉사를 드리는 생활로 변화시키는 데 무력하다.

‘바울’이 말한 점은 예수의 유명한 산상 수훈과 조화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다 그분께 가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시면서, 이처럼 부언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 7:22, 23.

그러므로, 하나님께 중요시되는 것은 외견상의 종교심이 아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받으려면, 그는 성서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침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편 필자가 이처럼 말한 바와 같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오늘날 종교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지침들을 배우고 따르도록 도움을 받고 있는가?

사실들은 어떠한가?

미국의 60개 교구에 속해 있는 10,000명의 활동적인 ‘가톨릭’교인을 상대로 한 최근의 한 조사는 그들 중 77‘퍼센트’가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더욱 관심이 있고, 그에 비해 단지 40‘퍼센트’만이 “개인의 구원 문제”에 관심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비슷하게도, ‘갤럽’ 여론 조사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고 싶은 질문 전체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는 질문은 “지속적인 세계 평화가 과연 있을 것인가?”로 나타났다고 한다.

확실히, 이 위험한 때에 장래에 관심을 갖는 것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은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얼마나 다른가?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누가 21:28) 그 조사 결과가 보여 주는 바는 영적인 재각성에 관한 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장래에 관한 염려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이 위험한 때의 위기를 대처하도록 돕는 데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참조 누가 21:26.

‘제 칠일 예수 재림교’ 잡지 「미니스트리」의 한 사설은 교회 성원들을 더욱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문제에 있어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우리 교인들이나 우리 자신의 실제 생활 방식에 있어서 이웃에 사는 비그리스도인인 이웃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오히려 그 잡지는 계속해서 교회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최상의 생활을 원하며 그들이 그것 얻기를 보고자하는”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교회 성원들에게 비신자들의 “물질주의와 소비적인 생활 방식을 혼합시키는 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런던’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종교 문제에 관한 관심이 지속된(심지어 증가한)다는 얼마의 징후가 있다”고 보도하면서, “영국 교회의 난문제는 교회가 믿고 있는 것 그 자체를 교회가 확신하고 있지 못하는 데, 믿음에 관해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가 라는 점”이라고 역설한다.

가정이나 인간의 가치 기준에 대한 분야는 어떠한가? 교회들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부패케 하는 영향과 부도덕한 방식들을 저항하도록 교회 성원들을 강화시켜 왔는가? 그들은 그 결과 더 나은 남편, 더 나은 아내, 더 나은 부모 또는 더 나은 자녀들이 되었는가? 교회에 다니는 13개 교파에 속해 있는 가족 중 8,000명의 청소년과 10,000명의 부모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한 조사는 그 상황을 다소나마 엿보게 해준다.

「오늘의 그리스도교」(Christianity Today)지에 따르면, 그 조사 결과는 그 청소년들의 42‘퍼센트’는, 그들의 가족은 종교 문제들에 관해서 결코 토론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40‘퍼센트’는 성 문제들에 관해서 부모가 더욱 지도해 줄 것을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15세의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53‘퍼센트’는 ‘알코올’을 사용해 왔고 20‘퍼센트’는 ‘마리화나’를 사용해 왔다. 「앤 아버 뉴우스」지에 보도된, 보다 앞서 행해진 조사 결과에는 18세가 되기까지, 59‘퍼센트’의 소년들과 42‘퍼센트’의 소녀들이 성교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끝으로, 종교들은 그 추종자들이 세상의 폭력적인 영을 멀리하도록 도움을 주어 왔는가? 참으로, 종교가 오늘날의 위험한 때에 안정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그것 만큼은 기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인류를 괴롭혀 온 대부분의 전쟁과 투쟁들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기여해 왔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레바논’, 또는 ‘이란’과 같은 곳을 언급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종교 교서와 평화 운동 등에도 불구하고, 주요 종교들이 오늘날 가장 유혈적인 얼마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소위 종교적 재각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종교적 부흥의 징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영적인 재각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의 여러 종교로 향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세움을 받거나, 위험한 때를 직면하도록 강화되는 대신, 안락한 ‘현상 유지 방식’ 즉 형식주의적인 숭배 방식으로 틀잡혀지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예언한 바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피상적인 “재각성” 또는 “부흥”은 분명히 이 위험한 때를 특징짓는, 악화되어 가는 나머지 상태—도덕적 부패, 가정의 붕괴, 범죄와 폭력 등등—와 부합한다.—디모데 후 3:1-5.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성서는 고대 종교적 도시인 ‘바벨론’을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해서, 세계 종교는 완전히 붕괴될 운명임을 지적한다. 「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계시 18:21.

그러나 그처럼 순식간에 끝이 오기 전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계시록 18:4의 하나님의 경고에 청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205개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그 경고에 청종해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의 왕국으로 도피했다. (마태 24:14) 당신은 그들과 합류하여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것인가? 그 결정은 독자 자신이 내려야 할 일이다.

[5면 삽입]

종교 교서와 평화 운동 등에도 불구하고, 주요 종교들이 오늘날 가장 유혈적인 얼마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5면 삽화]

사람들은 그들이 더욱 종교적이 되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일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6면 삽화]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짓 종교를 떠나라는 경고를 청종하고 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