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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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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7
파87 4/1 22-26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신다

체험담을 쓴 에리히 카트너

딱! 그 책이 내 머리를 쳤다. 이로써 나는 처음으로 성서와 접하게 되었다. 그 책은 가톨릭 사제의 손에 쥐어 있었다. 그렇게 내리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제기한 질문 때문이었다.

그 사제는 교리 문답과 종교를 가르치면서 우리로 사제직을 택하도록 부추기려고 애썼다. 그는 그렇게 애쓰면서 데살로니가 전서 4:17의 성귀를 사용하였다. 이 성귀는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사람들에 관해 설명한다.

나는 늘 의문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 “사도 신경에서는 예수께서 지옥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제들은 곧장 천당으로 간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2:31) 내가 바로 이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성서로 내 머리를 쳤던 것이다.

알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나는 진정으로 대답을 얻기를 원했다. 비록 소년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숭배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렬했다. 나는 지나치던 교회는 거의 다 들어가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나 만족을 얻지 못했다. 어쩐지 일부 교인의 지나친 우상 숭배 행위나 사제들의 행동 등, 내가 본 것 때문에 늘 화가 치밀었다.

여덟살 가량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책을 한권 읽었다. 「브라질의 그리스도교화」(The Christianization of Brazil)란 책이었는데 충격스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살인 이야기,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디언의 살육담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행위들에 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이 모든 일은 1920년대의 일이다. 나는 1919년 8월 19일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나의 부모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여섯살 쯤 되었을 때, 전기 기사인 나의 아버지는 북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인 수데텐에서 직장을 구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고, 마침내는 바른스도르프라는 조그만 도시에 정착했다.

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 매우 환멸을 느꼈다. 어느 날 또다시 사제로부터 벌을 받고는 마음이 괴로와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들판을 지나오는 동안, 내가 보고 알게 된 여러 가지 그릇된 것들로 보건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새들의 노래가 들려왔고, 창조물인 꽃들이며 나비들이며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은 틀림없지만, 소위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결코 인자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마 하나님은 인류를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진실하고 의식적인 기도를 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실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분께 간청하였다. 이것은 1928년에 있었던 일이다.

약 한달 후 어머니는 빈에서 친정 식구와 재회하기 위해 여행을 하였다. 그때는 나의 외할머니의 60회 생일이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어머니의 형제인 리하르트 타우츠를 만났는데, 그는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마리보르에 살고 있었다. 그는 최근에 ‘성경 연구생’이 되었는데 그때는 ‘여호와의 증인’을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는 새로운 성서 진리를 알고서 흥분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이야기해 준 것은 나에게 납득이 갔다. 여호와의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시 121:5.

배운 것을 실행함

후에 ‘성경 연구생’이 독일로부터 왔고, 우리 지역에서 전파 사업이 진행되었다. 몇달 후, 인근의 독일 도시에서 정기적인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수킬로미터를 걸어 국경을 넘어서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 후에 나와 밀접하게 함께 일한 사람, 오토 에스텔만을 만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1932년에 우리 가족은 빈에서 약 72킬로미터 떨어진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이사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다른 ‘증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전파 사업에서 활동적이 돼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장 어려운 구역이라고 생각된, 주로 공무원 가족들이 입주해 있는 아파트 단지를 선택했다. 당시 브라티슬라바에서는 4개국어, 즉 슬로바키아어, 체코어, 독일어 그리고 헝가리어가 사용되었다.

간단한 연설문을 4개 언어로 적은 카드를 갖고 혼자 다니면서, 나는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때때로, 아직 ‘증인’은 아닌 나의 아버지가 길 건너편에 서서 나를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 주곤 하였다. 그후 아버지도 곧 여호와를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1935년 2월 15일, 우리 집에서 한 여행하는 감독자와 가진 특별 집회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다. 나는 그해에 상업 학교를 졸업하였고, 욕심 나는 일자리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초대도 받았다. 부모님과 신중한 토의를 한 후, 우리는 그 문제를 기도로 여호와께 가져갔다. 그리하여 열 여섯살을 넘기 바로 전인, 1935년 6월 1일에 나는 전 시간 봉사에 들어갔다.

역경의 때에 봉사함

프라하의 ‘협회’ 사무실에서, 나는 식자기를 사용하는 것과 조판하는 일을 배웠다. 우리는 히틀러의 금지령 아래 있는 독일의 우리 형제들을 위해 책자들을 출판하였고, 또한 여러 언어로 「파수대」지를 출간하였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우리의 사업에 있어서 이 때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고 급기야 당국은 1938년 12월에 우리의 지부를 폐쇄시켰다.

나는, 행정권이 나치 동조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브라티슬라바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가 호호로 전파하면서 두달 동안 눈에 띄지 않게 봉사하였다. 이 무렵 스위스 베른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의 ‘중앙 유럽 사무실’은, 만일 내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기꺼이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베른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 초대를 받아들여 집을 떠났다. 내가 아버지를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30년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후에 닥쳐온 그 숱한 역경 속에서 우리 세 사람 모두를 지켜 주셨다. 예를 들면, 나는 그 악명 높던 흘린카 구아르다[일종의 슬로바키아 친위대]가, 내가 브라티슬라바를 떠난 그날에 나를 뒤쫓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여행 도중에, 나치 앞잡이들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에서 내가 체포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계속 나를 지켜 주셨다.—시 48:14; 61:3.

베른에서 나는, 중국 상해로 파견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후에 이 임명은 브라질로 변경되었다. 브라질 입국 비자를 받을 때까지 베른의 지부에서 일하였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문제들이 증대하고 있었다. 국경들이 폐쇄되고 있었다. 그래서 1939년 8월에 ‘협회’는 나에게 프랑스로 들어가도록 촉구하였다. 8월 31일에 브라질 상선 시퀘이라 캄푸스호가 프랑스의 르아브르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배를 타야 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4시간 전에, 그 배는 출항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등실에서 나와 함께 여행을 하던 열 두어명의 승객은 모두 나치 앞잡이였다. 그들은 내가 전파하는 것을 아주 꼴 사납게 생각하였다. 여러 차례 그들은 나를 하선시키려고 하였다. 스페인의 비고에서 그 우정적인 선장은 거기 머무는 동안 상륙을 하지 말라고 나에게 경고해 주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나치 앞잡이들은, 내 발을 묶어 놓으려고 안내판에다 배의 출항 시간을 틀리게 표시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여호와께서는 나를 지켜 주셨다. (시 121:3) 나는 1939년 9월 24일 저녁에 브라질의 산투스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날에 나는, ‘협회’ 사무실이 소재하는 상파울루로 갔다.

브라질에서 봉사함

1939년 9월에 브라질에는 ‘증인’이 단지 127명밖에 없었고, 그 당시 인구는 약 4천 1백만이었다. 상파울루에서 약 한 주일을 보낸 후, 남단에 위치한 나의 파이오니아 임지 리우그란데두술주로 출발했다. 나는, 외딴 정글 지역에 사는, 폴란드계 후손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몇몇 ‘증인’과 같이 머물게 될 것이었다.

기차 여행은 나흘이 걸렸다. 이 노선의 종점은 초창기 북미의 황량한 서부 도시를 닮은 지루아였다. 그 ‘증인’들이 사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지루아에서 약 32킬로미터의 정글을 더 가야 했다. 화물 트럭이 나를 태워다, 진흙 도로 위에 내려 주었다. 나는, 사람의 발이 밟지 않은 수풀과 조그만 개천을 지나 1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마침내 도착하였다.

이 지역이 외져 있기 때문에, 나의 파이오니아 봉사는 시간적 제약을 받았고, 누군가가 나를 작은 마차로 태워다 줄 때에만 봉사하러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기 위해서는 여러 날을 여행해야 했고, 뱀을 피하기 위해 진흙 길 위에서 자거나, 비가 올 때는 달구지 밑에서 잠을 자야 하였다. 우리는 또한 크루즈알타와 같은 도시에서도 전파하였다.

1940년에 ‘협회’는 나를 리우그란데두술주의 주도인 포르투알레그레로 임명하였다. 거기서 나는 역시 브라질에 임명되어 있던, 나의 죽마 고우 오토 에스텔만과 합세하였다. 그곳 당국자들은 나치 동조자들 같았다. 우리는 체포되어 우리의 믿음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든지, 아니면 저녁 기차를 타고 우루과이 국경으로 가서 감금되든지 선택을 해야 하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기차를 탔다.

제약 아래서

거기 국경에서 우리는 2년 가량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러나 또다시 여호와께서 도와 주셨다. 유대인 사업가들이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그 결과, 감옥에 갇히지는 않고 세속 일을 하도록 허락되었지만, 엄한 감시를 받았다. 우리는 ‘협회’ 지부 사무실과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거리에서 우루과이에 임명되어 있던, 유럽 출신의 한 파이오니아 형제를 만났다. 그는 우연히 그 국경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재회가 아니었던가! 그는 우리에게 독일어 성서 한권과 영어판 「파수대」 한부를 주었다. 내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런데 1942년 8월 22일에 브라질은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사정에 변화를 의미하였다. 우리는 다시 포르투알레그레로 보내졌고, 약간의 심문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 그후 첫 임지였던 그 정글 지역에서 초기에 사귀었던 몇몇 젊은 ‘증인’을 만났다. 그래서 지부 사무실과 연락할 수 있었고, 또다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젊은이 중 넷은 파이오니아 봉사에서 나와 합세하였다. 우리는 왕국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발견하였고, 그중 얼마의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전파 사업을 하고 있다.

신임 당국자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1943년에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최초의 작은 대회를 개최하였다. 총 참석자수는 50명이었는데, 그중 거의 절반은 사복 경찰관이었다. 1년 후인 1944년에 우리는 또 한 차례의 대회를 가졌다. 그후 나는 상파울루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사한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길르앗과 그 이후

1950년에 나는 뉴욕, 사우스랜싱에 있는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 16기 학급에서 수업을 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1951년 2월에 졸업한 후, 나는 뉴욕, 사우스브롱크스 회중과 연합하여 잠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도록 임명받았으나 후에 브라질로 다시 갔다.

약 1년 반 동안 나는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 곧 지역 감독자와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였다. 그후 1953년 2월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지부 사무실로 다시 부름을 받아 번역일을 하도록 임명받았다. 그후, 1961년 9월부터 1963년 9월까지 뉴욕,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특별 번역 임명으로 일하는 특권을 가졌다. 그곳에 있는 동안 브라질에서 알았던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나와 연구하기로 동의하였고,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몇 개월 후, 다시 브라질에 갔을 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는 약간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와 같이 말해 주었다. “파울, 당신은 토목 기사이지요. 하지만 만일 내가 토목 기사로서 당신에게 지붕이 위에서 막 무너져 내릴 거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난 성서 “기사”로서 당신에게 말하겠는데, 만일 당신이 알고 있는 바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그는 후에, 이 말이 심한 충격타였었다고 말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침례를 받았고,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 장로로서 봉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파울루의 세사리오랑게에서 큰 지부 시설을 신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이곳 지부에 있는 480명은 브라질에서 증가하고 있는 ‘증인’의 영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봉사하고 있다.

계속된 증가

1945년에 우리는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네이선 H. 노어와 당시 부회장이었던 프레드릭 프랜즈의 첫 방문을 맞이하였다. 상파울루시의 파사엠부 체육관에서 대회를 개최하였고, 나는 그 방문한 형제들의 통역자로 봉사하였다. 최고 참석자수는 765명이었다.

나는 노어 형제가, 연접해 있는 커다란 스타디움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곳을 다 채울 때가 과연 올 수 있을지 궁금해 하던 일을 기억한다. 그런데 1973년 12월에 우리는 그렇게 하였다. 그때 94,586명이 “하나님의 승리” 대회에서 파사엠부 스타디움을 꽉 메웠다. 1985년 8월에 상파울루시, 모룸비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충절 고수자” 대회의 참석자수는 최고에 달했는데, 162,941명이 참석하였다. 아울러 동시에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스타디움에도 86,410명이 참석해 있었다. 그후, 23개의 대회가 더 개최되어 브라질에서 “충절 고수자” 대회에 참석한 총수는 389,387명에 달했다!

수년간 나는 뉴욕, 브루클린 본부에서 방문하는 연사들을 위해 통역하는 특권을 가졌다. 최근 그러한 방문객 중 한 사람은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가, 내가 수년 동안 연구를 사회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인사하는 것을 보고서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독신자에게 이렇게 자녀가 많은 것은 처음 보는 일입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실로 절정을 이룬 것은, 내가 다른 나라들의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일이다. 1969년 뉘른베르크 대회에서 나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1973년에 충실함 가운데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 온 이후로 아버지를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1978년에 나는, 내가 출생한 도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큰 국제 대회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 특권을 가졌다.

브라질에서 보낸 이 여러 해 동안, 나는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는 것을 목격해 왔다. (고린도 전 3:7) 1948년에 우리는 전도인 1,000명 선을 돌파하였다. 그후, 전도인 수는 1958년에 12,992명으로, 그리고 1970년에 60,139명으로 뛰어 올랐다. 1939년 9월에 127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1986년 8월에는 196,948명이 되었다. 확실히, 이 나라에서도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고 있다.’—이사야 60:22.

그러나 브라질의 인구 역시 1939년에는 4천 1백만이던 것이, 지금은 1억 3천 5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활동을 요하는 방대한 밭을 갖고 있다. 여호와께서 주신 이 놀라운 증가에 직접 기여하는 일은 나의 기쁨이었고, 실로 감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를 전 시간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처럼 권고할 수 있다. 시작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당신의 출입을 지키실’ 것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시 121:7, 8.

[26면 삽입]

“만일 당신이 알고 있는 바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25면 삽화]

1945년,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N.H.노어의 연설을 에리히 카트너가 통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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