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조직과 밀접히 연합함
존 바의 체험담
일년 전 6월, 나는 고향을 방문하는 여행의 마지막 구간인 글래스고우에서 애버딘까지의 비행기 여행에 올랐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녹색으로 수놓은 이 스코틀랜드의 시골 상공을 찌르듯 올라가 유유히 흐르는 클라이드 강 위를 날자, 불현듯 1906년 당시 이 강의 남쪽 저기 어딘가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을 조그만 마을 비솝톤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 에밀리 주얼이, 찰스 T. 러셀의 저서인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읽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해 그곳에서였다. 즉시 할머니의 눈은 열려 성서에서는 지옥불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곧 그의 장성한 두 딸 베시와 에밀리 (나의 어머니가 된 분)도 스코틀랜드의 연합 자유 교회가 가르치던 거짓 교리의 안개 속을 밝게 비추는 진리의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헌신의 상징으로 1908년에 침례를 받았고, 그의 딸들도 그후 얼마 안 있어 침례를 받았다.
나의 아버지는 비솝톤에 있는 같은 연합 자유 교회에서 서기직을 맡고 있었다. 그에겐 항상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교회 교직자는 아버지를 위해 어느 일요일에 특별 설교를 해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곤 정말 그렇게 해줬다! 그가 한 설명을 듣고서, 아버지는 이제 삼위일체 교리가 거짓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탈퇴하였고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1912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후 곧 나의 부모는 두 자녀, 루이와 제임스를 데리고 북쪽에 있는 애버딘으로 이사를 하였고, 나는 1913년에 이 애버딘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정들었던 언덕이며 강이며 계곡 위로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할 때,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며 우리 세 자녀를 “여호와의 징계와 정신적 단속”으로 양육하기 위해 쏟은 부모의 노력에 대한 생각에 젖게 되었다. (에베소 6:4, 신세) 햇빛 찬란한 아름다운 그날 아침에, 부모가 베풀어 준 그 교육에 대해 여호와께 충심으로 감사했다! 그 덕분에 내가 항상 여호와의 조직에 밀접히 연합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기 교육의 가치
우리 가족은 항상 행복하게 연합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더라도, 그분들은 결코 그걸 우리 자녀들 앞에서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 일은 우리가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정 내에 참다운 평화와 안전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정겨운 추억들 중 얼마는 저녁에 가진 가족 모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각기 악기로 반주를 하며 그것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바둑판 게임과 같은 반상 게임을 하는 등 가족 오락회를 가졌다. 또한 아버지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꼭 얼마의 시간을 내어 성경과 워치 타워 출판물, 그외에 가볍게 읽을 수 있거나 좀더 단단한 내용이 담긴 다른 서적들을 거의 매일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우리가 성장해 감에 따라 우리 가족이 계속 친밀하게 연합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 당시 초창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이 북부 지방에 “진리” 가족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 가정은 워치 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당시에는 순례자들이라고 불리었음), 이를테면 알버트 로이드, 허버트 시니어, 프레드 스코트 등 여러 사람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W.E. 밴 앰버그와 A. H. 맥밀란을 포함한 일부 대표자들이 심지어 뉴욕,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오기도 했다. 이러한 방문은 나의 어린 시절에 이정표가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부모가 나타낸 진정한 후대의 영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그러한 후대의 영은 우리의 가족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었으며, 나는 어렸지만 형제들의 총 연합체에 대한 인식을 넓히기 시작했다. 자녀들과 형제들의 전세계적인 연합체 사이에 따뜻하고 사랑스런 관계를 두텁게 맺도록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얼마나 많은가!
개인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일
10대 초에 들어서자 나는 점차 수줍어하고 내향적인 소년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수줍음은 여러 가지 점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특히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함으로써 나의 믿음을 증명해야 할 때 더욱 그러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직후,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애버딘에서 최초의 증인으로서 호별 봉사에 참여하였다. 자녀인 우리들은 책자들을 배부하는 데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실제로 집으로 찾아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건 대단한 변화를 요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실로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이 일을 직면했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호별 봉사를 나가겠다고 말한 1927년 11월의 그 일요일 오후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두 뺨에 눈물—이 경우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나에게 영향을 준 가족에 들이닥친 비극
우리 가족 생활의 평온함은 1929년 6월 25일 저녁에 깨어지고 말았다. 이 때 내 나이는 16세였다. 전도 봉사에서 하루를 보낸 후, 어머니와 누나는 아버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급히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과속으로 질주하던 오토바이가 어머니를 치고는 거리를 따라 약 37미터나 끌고 가버렸던 것이다. 어머니의 머리에 입은 상처가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살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누나 루이가 여러 달 동안 정성어린 간호를 한 덕분에,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어머니는 1952년에 작고할 때까지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현재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여름에 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있게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리를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나는 여호와의 봉사에 헌신하였다. 하지만, 몇년이 지난 후에야 나의 헌신을 상징하는 물 침례를 받는 기회를 가졌다.
전 시간 봉사에 들어감
1932년에 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기계 및 전기 공학 분야의 훈련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오늘날처럼 청소년들에게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전파 사업에 들어가도록 격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는 나의 정력을 어디에다 쏟아야 하는지, 다시 말해 전 시간 봉사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1938년 초에 연구한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호와의 조직에 밀접히 고착하여 조직의 지시를 개인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오는 유익을 나에게 아주 인상 깊게 해준 내용이 있다. 그 「파수대」 기사는 자신의 봉사의 임명을 저버리고 도망가다가 겪은 요나의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 교훈을 마음에 아주 소중히 새기고서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오는 임명은 어떠한 것이든 결코 거절하지 않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 당시에는 나의 이 결의를 시험하는 신권적 임명들이 얼마나 많이 앞에 놓일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기도로써 인도를 구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런던의 협회 본부에서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 응답이 있었다. 나에게 벧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고려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 큰 봉사의 특권들로 인도하는 큰 문으로 들어가는 그 기회를 꽉 붙잡았다. 그리하여 1939년 4월에 나는 해럴드 킹 옆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중국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했으며, 전도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공산주의 나라의 감옥에서 수년 동안 생활했다. 우리는 녹음된 연설을 사람들의 집 문에서 들려 주는 데 사용되는 기계와 축음기를 조립하는 일을 하였다.
해럴드와 나는 우리들이 만드는 도구를 사용해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을 상상해 보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가져올 최종적인 결과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 이래, 나는 벧엘에서 받은 다른 모든 임명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하는 일이 정말 즐거웠을 뿐 아니라, 늘 왕국 전파 사업과 관련되어 있어 뜻깊은 것이 되기도 했다.
봉사의 특권들
런던 벧엘에 도착한 지 얼마 안 있어, 나는 전도인이 200명을 족히 웃도는 한 회중의 부회(部會)의 종(지금의 주임 감독자)으로 임명되었다. 이전에는 전도인이 단지 10명밖에 안 되는 회중의 감독자로 일했었다! 그 다음엔 1941년 레스터에서 개최된 감동적인 전국 대회에서는 확성부를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음향기기에 대해선 겨우 제한된 경험밖에 없었다.
그후에 나는 지금은 순회 감독자라고 불리는 형제들의 종인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1943년 1월에 그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에는 이러한 종이 6명밖에 없었다. 나는 딱 한달간 이 임명을 받았지만, 3년이 넘도록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그 어려운 기간에 나는 세개의 큰 대회를 감독하는 특권을 가졌으며, 이 일은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당시의 여행하는 봉사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우리는 항상 돌아다녔다. 그러한 전시에 영국 전역을 여행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때도 있었다. 회중에서 회중으로 여행하는 데 자전거의 힘을 일부 빌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늘날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하는 것처럼 한 주일마다 한 회중을 방문하지 않고, 작은 회중이라면 한주간에 여섯개의 회중을 방문하곤 하였다!
전형적인 하루 일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5시 30분에 기상하여, 조반을 먹은 다음 8시까지는 회중 기록 검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그 다음 회중으로 여행하였다. 오후는 보통 야외 봉사를 하는 데 보냈으며, 이 일에 뒤이어 저녁이 되면 회중의 종들과 한 시간 동안 모임을 갖고, 그 다음에 회중에게 연설을 하였다. 밤 11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일은 거의 없고 그날 밤에 회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그보다 더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월요일은 그 주간의 보고서 작성을 완성하고, 개인 연구를 하며 다음주를 위해 준비하는 날로 따로 사용하였다.
‘정말로 바쁜 한주간의 일정’이라고 생각되는가? 사실 그러했다. 하지만, 조직과 이전처럼 긴밀한 접촉을 갖는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었던 그 전시에 형제들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일은 실로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회중들이 “믿음이 더 굳어지”게 돕고 있다는 만족감을 문자 그대로 경험하였다.—사도 16:5.
다시 벧엘 봉사로
나는 1946년 4월에 다시 벧엘 봉사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요청을 받고 기뻤다. 하지만 그 3년 반 동안 여행하는 봉사에서 일함으로 내 인생이 영적으로 풍요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조직은 나에게 더욱 소중하였다. 나는 마치 다음과 같은 시편 48:12, 13에 묘사된 일을 해온 것처럼 느꼈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 그 궁전을 살펴[보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더 많이 순행하는 일은 “형제들의 총 연합체”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욱 자라게 해주었다.—베드로 전 2:17, 신세.
벧엘로 돌아가서 나는 우리의 런던 인쇄소에서 수행되는 많은 인쇄일을 돌보는 특권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제판하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에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한 성원이 되는 비길 바 없는 특권이 나에게 주어졌다.
보다 어려운 임명을 맡았을 때 어떤 경우는 ‘달아나’고 싶은 때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럴 때면 요나와 그가 저지른 실수가 생각나서 시편 55:22에 나와 있는 놀라운 약속을 맘 속으로 되풀이하곤 하였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나는 이 말씀이 정말로 참되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그분의 힘에 의지해서만 그분이 요구하시는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점이 있다. 만일 우리 곁에서 함께 일하는 형제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임명받은 일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하여 일함으로써 우리를 지원하고 후원해 줄 것이다.—스바냐 3:9, 신세.
소중한 관계
물론, 각별히 애정이 느껴지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늘 있다. 1978년에 사망한 앨프레드 프라이스 휴스는 그러한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1963년 4월 1일호 (영문) 「파수대」지에 실렸다. 그는 지부의 종으로서, 후에는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서 여러 해 동안 봉사했다. 그는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성 그리고 모든 형제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국의 밭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한 가지 점은 야외 봉사에 대한 그의 애착이었다. 이러한 애착은 그가 어떠한 책임을 떠맡더라도 그의 평생을 통해 식지 않았다. 프라이스와 같은 충실한 형제들 옆에서 일하는 것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기회였으며, 여호와의 조직과 밀접히 연합하여 전도 봉사에서 계속 활동적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의를 강화시켜 주었다.
1960년 10월 29일에 나는 당시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열정적인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길르앗 제 11기 선교인 한 사람과 특별히 소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날 밀드레드 윌렛과 나는 결혼을 하였으며, 그 이래로 그는 내가 벧엘 봉사를 하는 데 충실하게 지원해 오고 있다.
밀드레드의 어머니는 1965년에 사망하기 전에, 그의 딸에게 결코 “여호와를 질투”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밀드레드는 항상 어머니의 이 말을 명심하였으며, 이 말씀에 힘입어 내가 종종 가외 시간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에도 밀드레드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나에게 주어지는 어떤 가외 일이라도 즐거이 돌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 둘은 전도 봉사에서 여러 가지 보람된 경험들을 특별히 함께 누려 왔다.
예로서, 우리와 성경을 연구한 한 젊은 부부는 신속하게 발전하여 헌신과 침례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정규적으로 전도 봉사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느닷없이 뚜렷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들은 연합을 중지하였다. 밀드레드와 나는 실망하였으며, 우리가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서 어디서 잘못이 있었는지 계속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우리는 여호와께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그들이 진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꾸준히 기도하였다. 약 10년이 지난 후에 그들이 다시 활동적으로 연합하고 있으며, 그들의 집은 이제 한 서적 연구 집단의 중심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이 부부로부터 받았을 때, 우리가 느낀 그 행복감을 독자는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남편 윌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저는 두분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그 모든 도움과 사랑에 찬 배려에 대해 감사하고 싶습니다. ··· 떨어져 나간 것은 제 잘못이었으며, 제 마음의 인식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 우리는 여호와의 조직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 오늘밤 즐거운 추억에 잠겨 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두분의 봉사를 계속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어머니는 우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그의 아들 마이크에 관해 이와 같이 썼다. “천사들이 그를 여러분 옆에 앉게 해준 것을 저는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었는가? 마이크는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대회에 참석했지만, 진리에 진정한 관심은 없었다. 밀드레드는 외톨이로 앉아 있는 그 소년을 보고는 말을 걸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다음 우리는 런던 벧엘로 와서 우리가 하는 일을 구경하도록 그와 그의 동생을 초대했다.
그후 마이크가 방문하였으며, 그가 본 것은 그가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데 충분한 관심을 일게 해주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는 지금 자기가 속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고, 그의 아내와 두 아들도 모두 활동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얼마 전에 마이크의 아내는 이렇게 편지했다. “[마이크]는 여러분 두분을 만나고 ··· 여러분이 그에게 베풀어 주신 친절과 나타내 주신 관심에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였읍니다.”
나의 아내와 내가 도울 특권이 있었던 윌과 마이크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저 여호와께 대한 감사로 넘쳐 흐른다! 그러한 살아 있는 “추천장들”은 실로 비길 데 없는 보람이며, 여호와의 조직과 밀접히 연합해 온 결과 누리게 된 기쁨의 일부인 것이다.—고린도 후 3:1-3, 신세 참조.
세계 본부에서의 봉사
“그 자체가 한 나라이다.” 이것은, 브루클린 하이츠의 한 신문 편집자가 뉴욕, 브루클린의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와, 여기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뉴욕 북부에 위치한 워치 타워 농장에서 생활하는 도합 3,500여명의 증인들로 이뤄진 거대한 가족을 묘사한 말이다. 실로,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하나의 영적인 나라이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서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스가랴 8:23; 베드로 전 2:9.
그리고 나의 아내와 내가 이 거대한 벧엘 가족의 영구 성원이 되었을 때 그 일이 얼마나 감격적이었는가를 독자는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인생의 지난 8년은 나의 모든 신권적 경험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영적 양식을 준비하여 지구 사방으로 보낸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영이 작용하여, 내려야 할 중대한 결정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사업에 여호와의 축복이 쌓이는 증거를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많이 알 수 있다. 최근에 이 모든 일을 경험하고 감명을 받고서 나는 여호와의 백성과 더욱 더 밀접히 연합해야 겠다는 자극을 가일층 받았다.
내 생애의 경험들 중 단지 몇 가지만 기술했다. 하지만, 내가 탄 비행기가 마침내 햇빛 찬란한 그 6월의 아침에 애버딘 공항에 착륙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의 세계적인 연합체에 내가 아직도 속해 있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그토록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아마 이러한 경험들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진리 안에서 보낸 여러 해를 회고해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서 받은 갖가지 축복들을 때때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나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시 40:5.
나의 누나 루이가 그곳에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60년 이상을 여호와께 헌신적인 봉사를 드렸고 지금도 변함없이 충실하고, 열정적이고 충성스럽다. 나는 또 이 축복에 대해서도 여호와께 감사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청지기”에게서 요구하는 것이 충실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았던가? (고린도 전 4:2, 신세 참조.) 가족의 한 성원이 계속 충실을 지킴으로써 다른 성원에게 실로 크나큰 격려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한때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밀드레드와 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지혜에 항상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조직과 밀접히 연합해 있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인자하게 그 길을 알려 주신다.
[28면 삽화]
1930년경에 형, 누나, 부모와 함께 한 존 바 (앞줄 왼쪽)
[31면 삽화]
아내 밀드레드와 함께 한 지금의 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