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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생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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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생활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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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1
파91 7/1 20-23면

‘여호와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생활함’

라일 로이시의 체험담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의 가정 생활은 다가오는 의로운 신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그것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리는 것’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를 읽어 주곤 하였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해서 그 어린아이가 바로 나라고 상상할 정도였다.—베드로 후 3:11-13; 이사야 11:6-9.

1890년대에 할아버지 오거스트 로이시는 찰스 T. 러셀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기본적인 성서 진리를 배웠다. 할아버지는 캐나다의 북서 지역인 지금의 서스캐처원 주 요크턴에 있는 집 안팎에서 널리 전파하였다. 그분은 자녀들에게 “얘들아, 1914년을 주시해라!”고 거듭 권하였다. 아버지는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는 신념에 영향을 받아 평생 긴박감을 지니고 살았으며, 내게도 그것은 생활 방식이 되었다.

우리 부모는 후대를 매우 잘하는 분들이었다. 서스캐처원 주 새스커툰의 성서 연구 그룹인 성경 연구생들은 정기적으로 우리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순례자들이라 불린) 여행하는 봉사자들은 종종 우리 집에서 묵었다. 베른 형과 베라 누이와 나는 영적으로 유익을 얻었으며, 왕국 소식에 대한 현실감과 그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항상 느꼈다. (마태 24:14) 장래에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이런 순례자 활동을 하면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1927년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로 이사하였다. 그후 경제 공황의 와중인 1933년에 고등 학교를 졸업하였다. 베른 형과 나는 캘리포니아 주 리치먼드에 있는 포드 자동차 회사 공장에서 일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1935년 어느 봄날, 곰곰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면, 가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 낫겠다.’ 그날 나는 사표를 제출하고, 다음날,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의 벧엘에서 봉사하고자 신청서를 써 보냈다. 1935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감동적인 대회에 참석한 후 벧엘 봉사를 하도록 초대되었다.

벧엘 봉사

공장 감독자 네이선 노어는 내게 건물 관리 일을 시켰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20세 청년으로 나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공장 어느 곳이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으며 아무도 내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노어 형제는 나의 일하는 방식은 인정해 주었으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어느 정도 겸손해질 수 있도록 계속 내 마음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에야 노어 형제가 정말로 나를 돕고자 애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 태도에 대해 사과하면서 더 잘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냈다. 노어 형제와의 오래 지속된 따뜻한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1942년 1월에 제3대 워치 타워 협회장이 되었다.

건물 관리 일에 더하여, 제본실 기계의 대부분을 조작하거나 보조하는 법을 배웠다. 때가 되자 공장 전체의 작업 지시서를 작성하여 보내는 사무를 보았다. 1943년 봄과 여름은 특히 바쁘고 긴장된 시기였다. 세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공격과 체포 및 온갖 부당한 고발로 인한 금고형을 견뎌야 하였다. 1940년에 미국 최고 법원은 학교측이 학생들에게 기 경례를 요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48개 주 가운데 44개 주에서 폭력 사태가 연이어 일어났다. 증인 자녀들이 퇴학당하고 부모들은 체포되었으며, 폭도는 증인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총에 맞은 사람도 있었고 온몸에 타르 칠을 당하고는 새털로 덮인 사람도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법정에서 맞서 싸움에 따라 영장, 변론 취지서 및 협회의 법률진이 만든 서류 등 인쇄해야 할 제반 형태의 서류 일감이 내 책상으로 쇄도하였다. 우리 모두는 마감일에 맞추기 위해 많은 시간의 가외 근무를 하였다. 결국 1943년 5월과 6월에 내려진 최고 법원 판결은—13건 중 12건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하게 판결됨—법률사(法律史)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여호와께서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는 데 어떻게 길을 열어 주시는지를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한다.—빌립보 1:7.

신권 전도 학교

그 당시에는 마태 복음 24:14에 예언된 엄청난 일 즉 ‘끝이 오기 전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을 완수하기에 몇몇 부면에서 준비가 부족하였다. 협회장 노어 형제는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벧엘 가족의 남자 성원들과 함께 나는 “신권 전도 상급 코스”에 등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마련이 확대되어 결국 신권 전도 학교가 되었으며, 1943년 이래 여호와의 증인의 각 회중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는 1942년 2월 16일 월요일 저녁, 벧엘 가족의 모임 장소에서 집회를 가졌으며, 노어 형제가 첫 교훈 연설을 하였다. 연설 제목은 “성서 사본들”이었다. T. J. 설리반 형제가 학교 감독자로서 우리가 진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해주었다. 때가 되자 나는 벧엘 학교 감독자의 이 임무를 맡았고 큰 특권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훈련을 받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한 연로한 형제에게 충고하면서 지나치게 비평적이었고 적절한 존경심이 부족함을 나타냈다. 그러자 노어 형제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기분 상하게 권위를 행사하면 그걸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당황하여 내 얼굴이 붉어지자, 노어 형제의 커다란 갈색 눈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시편 141:5을 읽어 주었다. “의인이 나를 칠찌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찌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찌라.” 다른 사람들에게 시정하도록 충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여러 번 그 성구를 사용하였다.

신권 전도 학교가 시작되기 전에, 공개 연설을 많이 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러더퍼드 형제가 사망하자 노어 형제는 자신의 연설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벧엘 숙소의 내 방이 그의 방 바로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가 연설 연습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942년 클리블랜드 대회에서 연설을 하기 전에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공개 강연을 문자 그대로 수십 번 소리 내어 읽었다.

여행하면서

13년 간 벧엘에서 봉사한 후, 노어 형제는 내가 야외에서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하였다. 새로운 임명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 주면서 노어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라일, 이제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직접 관찰할 기회가 생겼소.” 이 말을 염두에 두고 두 개의 가방을 들고서, 1948년 5월 15일 여행하는 감독자로서의 임무 수행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역 감독자 일을 시작하기 전 몇 달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내가 섬긴 첫 부회 즉 회중은 미네소타 주 워시카의 한 조그만 시골 회중이었다. 나는 그 마을 부회의 종(당시 주임 감독자의 호칭)인 딕 케인에게 미리 편지를 하여 기차 역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였는데,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겨울을 보냈던 셋집에서 여름 숙소인 텐트로 막 이사를 한 터였다. 그러나 5월의 미네소타는 언제나 여름철 날씨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텐트 안에서 덜덜 떨면서 이런 생활 방식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심한 감기로 여러 주일을 앓다가 회복되었다.

여러 회중과 순회구를 방문하던 처음 몇 해 동안은 형제들의 집에 묵으면서 딱히 정해진 거처가 없이 생활하였다. 부엌 바닥, 거실 소파, 환기가 안 되는 무더운 다락방에서 자는 등 온갖 형태의 잠자리를 경험하였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반대하는 가족 성원이 있는 집에서 묵었다. 위스콘신에서 한 믿지 않는 남편은 일주일 내내 내가 드나들 때마다 노려보았다.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저 놈을 쏴 죽이겠어”하고 위협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집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유쾌한 경험은 비교적 드물었으며 오히려 내 임무에 양념 구실을 해줄 뿐이었다. 후일에는 그러한 일들이 재미있는 화제가 되었다.

반려자를 발견하다

지금도 그때 일이 기억난다. 오하이오 주 티핀에서 열린 한 순회 대회에서 나는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에서 온 리오나 어먼이라는 갈색 눈의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만났다. 리오나 역시 그리스도인 믿음 안에서 양육받았고 여러 해 동안 충실한 파이오니아였다. 끊임없이 여행하는 일로 인해 교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편지로 접촉하였다. 그리고 나서 1952년, 내 청혼에 리오나가 동의하여 우리는 결혼하였다. 종종 우리는 집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가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섬기는 약 44개 주에 있는 형제, 자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가족인 것이다.—마가 10:29, 30.

‘지쳐서 그만두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으세요?’하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한 사람이 쓰러지면 한 사람이 세워 준다. 한번은 베른 형에게 편지로 그의 페인트 사업을 같이 할 수 있겠는지 물어보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형은 우리가 자랄 때 매우 친밀했으므로 사업을 같이 할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고 답장하였다. 그러나 심사 숙고하여 결정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때 노어 형제가 벧엘 가족 성원에게 자주 하던 이런 말이 생각났다. “그만두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임명에 고착하는 데는 용기와 충절이 요구됩니다.” 그 말은 여전히 훌륭한 조언이었다.

결혼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아내가 충성스럽게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임명에 오래 고착할 수가 없다. 리오나는 나에게 바로 그런 아내였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고 회중에서 항상 명랑한 태도를 나타냄으로 리오나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리오나에게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를 말해 주는 데 결코 싫증내지 않는다. 그런 말은 리오나가 임무에 고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

여호와의 축복의 증거

지역 감독자의 주 업무는 순회 대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순회 대회에서 매주 사회자로, 공개 연사로 그리고 학교 감독자로 봉사한다. 내가 감독해 온 수백 회의 순회 대회 중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한 적이 없다는 사실로 볼 때 여호와께서 이러한 마련을 축복하심이 명백하다. 그렇다. 방해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취소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50년 봄, 오하이오 주 우스터에서는 토요일 저녁 회기의 마치는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했을 때, 대회가 열리고 있던 극장 바깥에 천 명이 넘는 반대자들로 이루어진 폭도가 있었다. 폭도는 우리가 나오기만 하면 던지려고 썩은 계란 여러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판단하고서 노래와 경험담 그리고 즉흥 성서 강연 등으로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였다. 800명의 증인은 계속 침착함과 참을성을 나타내었다.

새벽 2시, 날씨가 몹시 추웠다. 마치 나갈 준비를 하기라도 하듯이 참석자들은 소방 호스를 가져와서 앞 보도 위에 떨어져 있는 계란들을 물로 씻어내기 시작하였다. 근처 버스 정류소의 따뜻한 곳에 있던 폭도가 다시 모여들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그 행동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청중을 뒤쪽 출구로 조용히 나가게 하였다. 모두가 안전하게 자기들의 차 있는 곳으로 갔다. 폭도의 방해는 오하이오 주 캔턴, 디파이언스 및 칠리코드에서 열린 다른 대회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유리하게 내려진 미국 최고 법원의 판결이 무법한 자들에게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폭도의 폭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후 건강 문제로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에 협회의 친절한 배려로 남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도록 임명받았다. 그 지역은 회중들이 밀집해 있고 진료 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지역 감독자의 임무에는 여행을 더 많이 하면서 여러 순회구를 돌보고 감독하는 일이 포함되는 반면, 순회 감독자의 임무에는 순회 대회를 마련하고 각 프로그램을 임명하고 예행 연습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에 더하여,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을 마련하고 제공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지역이든 순회든 여행하는 감독자의 일이란 전 시간이 요구되는, 보람있는 생활 방식이다.

여전히 여호와의 날을 고대함

70여 년 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항상 긴박감을 예리하게 느껴 왔다. 내 머리 속에서는 아마겟돈이 항상 머지않아 있을 일이었다. (계시 16:14, 16)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여호와”, 「신세」]의 날이 임하기를 ·⁠·⁠· 간절히 사모하라”고 촉구한 대로 평생을 살아 왔다. 항상 약속된 신세계를 “보이지 않는 실체”로 여겨 왔다.—베드로 후 3:11, 12; 히브리 11:1, 「신세」.

어린 시절부터 내 속에 심어진 이러한 기대는 곧 실현될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그것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릴’ 것이다. (이사야 11:6-9)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그러한 약속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하신 계시록 21:5의 이러한 말씀으로 보증된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니라.]”

[23면 라일 로이시와 리오나 로이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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