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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서부터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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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서부터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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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파97 8/1 20-25면

어려서부터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림

루돌프 그라이헨의 체험담

내가 겨우 열두 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에게 예기치 않은 비극이 몰아닥쳤습니다. 맨 먼저 아버지가 투옥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누이와 내가 끌려가, 집을 떠나 생면 부지의 사람들과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게슈타포는 어머니와 나를 체포하였습니다. 나는 투옥되었으며, 어머니는 결국 강제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어려서 겪은 고통스런 박해 기간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악명 높은 나치의 게슈타포가, 그 다음에는 동독의 슈타지가 하느님에 대한 나의 충절을 깨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헌신하고 그분을 섬겨 온 지도 50년이 넘는 지금, 나는 시편 필자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나는 여호와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는 1925년 6월 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 근처의 루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버지 알프레트와 어머니 테레자는 당시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을 읽고 그것이 성서 진리의 소식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던 성서 장면에 관한 그림들을 매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 그림은 이리와 어린 양, 어린 염소와 표범, 송아지와 사자—이 모든 동물들이 한 어린아이에게 평화롭게 이끌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사야 11:6-9) 그러한 그림들은 내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부모는 가능할 때는 언제나 회중 활동에 나를 동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933년 2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지 불과 며칠 뒤에, 작은 읍인 우리 마을에서도 슬라이드, 활동 사진, 녹음된 해설이 들어 있는 “창조 사진극”이 상영되었습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사내아이였던 나는, “창조 사진극”을 광고하기 위한 행진의 일부로 소형 트럭 뒤 칸에 타고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참으로 흥분을 느꼈습니다! 이 때를 비롯하여 여러 경우에, 형제들은 내가 어렸는데도 유용한 회중 성원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도록 훈련받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인 엄정 중립을 지키므로, 나치의 정치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933년에 나치는 우리의 전파 활동과 집회, 심지어는 우리의 성서 출판물을 읽는 것조차 금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37년 9월에는 아버지를 포함하여 우리 회중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몹시 슬펐습니다. 아버지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집에 남아 있는 우리도 사정이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법을 신속히 터득하였습니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파수대」를 읽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간단히 점심 식사를 차려 주기 위해 그 잡지를 작은 찬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접시를 치우고 있는데,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아파트를 수색하여 성서 서적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몹시 겁에 질렸습니다.

그 날은 유달리 무더웠습니다. 그래서 그 경찰은 들어오자마자 헬멧을 벗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수색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이 식탁 밑을 조사하고 있을 때, 그의 헬멧이 미끄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재빨리 헬멧을 집어 들어, 찬장 위에 있는 「파수대」 바로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경찰은 우리 아파트를 샅샅이 뒤졌지만, 출판물을 한 부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 헬멧 밑을 찾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우물쭈물하며 어머니에게 사과를 하면서, 등뒤로 팔을 뻗어 헬멧을 집어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힘든 시험에 대비하게 해주었습니다. 일례로, 학교에서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거기서는 어린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가르치고 나치 철학을 주입시켰습니다. 일부 교사들은 학생 전원을 입단시키려는 개인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담임 교사인 헤르 슈나이더는 완전한 패배감을 맛보았음이 분명한데, 교내의 다른 모든 교사들과는 달리 자기 반의 한 학생 때문에 전원 입단이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이 바로 나였습니다.

하루는 담임 교사가 반 학생 전체에게 이렇게 광고하였습니다. “여러분, 내일은 야외 수업을 하겠습니다.” 모두가 그 말을 듣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거리를 행진할 때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이 훌륭한 히틀러 청소년단원들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모두 히틀러 청소년단 제복을 입어야 합니다.” 다음날 아침,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제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담임 교사는 나를 교실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아라. 그리고 네 모습을 한번 보아라.”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너희 부모님이 가난해서 제복을 사 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그는 나를 자기 책상으로 데리고 가서 서랍을 열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게 이 새 제복을 주고 싶구나. 멋지지 않니?”

나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치의 제복은 입고 싶지 않았습니다. 담임 교사는 내가 그 제복을 입을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화를 냈으며, 반 아이들은 모두 내게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 후 담임 교사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지만, 나를 숨기려고 제복을 입은 다른 모든 학생들 맨 가운데서 걷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반 아이들 가운데서 금방 눈에 띄었기 때문에 많은 마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나의 부모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내게 필요한 영적인 힘을 주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박해가 심해지다

1938년 초에, 하루는 경찰이 누이와 나를 학교에서 차에 태우더니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슈타트로다에 있는 감화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법원은 우리를 부모의 영향력에서 떼어놓아, 나치를 지지하는 어린이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감화원을 책임 맡고 있는 직원들은 누이와 내가 비록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와 관련해서는 확고하지만 공손하고 순종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임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어머니를 개인적으로 만나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례적인 일로서, 어머니는 우리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우리는 매우 행복하였으며, 하루 종일 함께 만나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렸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넉 달 가량 감화원에서 지냈습니다. 그 다음에는 파나에 있는 한 가정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친족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방문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몇 차례 우리를 만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어머니는 그 드문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시험과 상황을 허락하시든, 우리가 그분에게 충실을 유지하려는 결심을 마음속에 다지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고린도 첫째 10:13.

마침내 시험이 닥쳤습니다. 1942년 12월 15일, 겨우 열일곱 살에 나는 게슈타포에게 붙잡혀 게라에 있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약 일 주일 뒤에 어머니 역시 체포되어 같은 교도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법원은 나를 재판에 회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원이 내가 만 18세가 되는 날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6개월간 구치소에서 보냈습니다. 내가 18세가 되던 바로 그 날, 어머니와 나는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재판은 모두 끝나 버렸습니다. 나는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어머니가 바로 내 옆자리에서 법정의 칙칙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입니다. 우리는 둘 다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나는 징역 4년을, 어머니는 징역 1년 6개월을 각각 선고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여호와의 증인이 교도소와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슈톨베르크에 있는 한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거기에는 증인이 나 혼자밖에 없었습니다. 일 년 이상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려서부터 배양해 온 그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수감된 지 2년 반이 지난 뒤인 1945년 5월 9일에, 우리는 희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그 날 나는 석방되었습니다. 110킬로미터를 걸어서 집에 도착하였는데, 탈진과 기아 상태로 인해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여러 달이 걸렸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몹시 고통스러운 소식들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첫째는 어머니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수감된 지 1년 6개월 후에, 나치는 어머니에게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게슈타포는 어머니를 라벤스브뤼크에 있는 여자 강제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용감한 그리스도인—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써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머니를 호의적으로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소식은 여호와께 헌신하지 않은 형, 베르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형은 독일군에 입대하였다가, 러시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는 그 불명예스러운 문서에 서명한 얼마 안 되는 증인 가운데 속해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침울해 보였고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베드로 둘째 2:20.

영적으로 열심히 활동할 수 있었던 짧은 기간

1946년 3월 10일에, 나는 전후 처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매우 감격스럽게도, 그 날 침례 행사가 있을 것이라는 광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여호와께 이미 헌신을 하기는 하였지만, 침례를 받을 수 있었던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달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뒤인 1947년 3월 1일에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벧엘에 초대받았습니다. 협회 사무실은 폭탄에 맞아 상당히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그 보수 공사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이 지날 무렵에는 비텐베르게 시의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어떤 달들에는,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200시간 이상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자유롭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전쟁도, 박해도, 투옥되는 일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자유는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전후에 독일은 분단되었으며, 내가 살던 지역은 공산주의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1950년 9월에는 슈타지로 알려져 있는 동독의 비밀 경찰이 조직적인 방법으로 형제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에 대한 혐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첩자라는 이유로 기소된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악명 높은 슈타지 교도소로 보냈습니다.

영적 형제들의 지원

그 곳에서 슈타지는 내가 낮 동안에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나를 심문하곤 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이러한 고문을 받은 뒤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내지를 않고 그 악명 높은 U-보트 첼렌(깊은 지하실에 있기 때문에 잠수함 감방이라고 알려진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래 되어 녹이 슨 철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높은 문턱을 하나 넘어야만 하였습니다. 발을 내딛고 보니, 바닥에 온통 물이 차 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삐걱 소리를 내면서 문이 쾅 하고 닫혔습니다. 빛도 창문도 없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바닥에 십여 센티미터 가량 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앉지도, 눕지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거기서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추가 심문을 받기 위해 강렬한 불빛 아래로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하루 종일 물 속에 서 있는 것과 밤새도록 고통스러울 정도로 밝은 조명을 정면으로 받으며 견디는 것—과연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차례 그들은 나를 총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며칠 밤 동안 심문을 받고 난 뒤인 어느 날 아침에, 러시아의 한 고위 장교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기회에 나는 그에게 독일의 슈타지가 나치의 게슈타포가 한 것보다 훨씬 더 잔악하게 나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 정부하에서 중립을 유지하였고 공산주의 정부하에서도 역시 중립을 유지하며,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 슈타지 장교 가운데 상당수는 히틀러 청소년단의 단원이었으며, 아마도 그 곳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춥고, 굶주리고, 기진 맥진해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러시아 장교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담요를 덮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가 방문하고 나서 곧 나는 좀더 나은 감방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에 그들은 나를 독일 법정에 넘겼습니다. 아직 미결수로 있는 동안에, 나는 다섯 명의 다른 증인과 함께 한 방을 쓰는 큰 특권을 누렸습니다. 무자비한 학대를 숱하게 견디고 난 나에게, 영적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은 참으로 새 힘을 주는 일이었습니다!—시 133:1.

법정에서 나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형량은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경비가 가장 철저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교도소에는 생쥐 한 마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비가 몹시 삼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일부 용감한 형제들이 성서 한 권 전체를 몰래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낱권으로 나누어 수감 중인 형제들에게 회람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회람하였습니까? 회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은 2주마다 샤워장에 들어갈 때뿐이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샤워를 하고 있는데, 한 형제가 자기 수건 속에 성서 몇 장을 숨겨 놓았다고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샤워를 마치면, 나는 내 수건 대신 그의 수건을 집어 갈 참이었습니다.

한 교도관이 그 형제가 내게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곤봉으로 그를 몹시 때렸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 수건을 집어 들고 재소자들 속으로 몸을 피해야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나와 그 성서 몇 장은 무사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우리의 영적 급식 마련이 위기에 처할 뻔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항상 숨어서 몹시 위험한 환경에서 성서를 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살피”라고 한 말은 실로 매우 적절하였습니다.—베드로 첫째 5:8.

어떤 이유로인가, 당국은 우리 중 일부를 이 교도소에서 저 교도소로 계속 이감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4년에 걸쳐, 나는 다른 교도소로 약 열 번이나 이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형제들을 모두 깊이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감될 때마다 그들을 떠나는 것은 몹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라이프치히로 이감되었으며, 그 곳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나를 풀어 준 교도관은 잘 가라고 말하기는커녕,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악하게도, 내가 다시 투옥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종종 시편 124:2, 3에 나오는 이러한 말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라].”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구출하신다

이제 나는 다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나와 쌍둥이인 누이 루스와, 헤르타 슐렌조그 자매가 교도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내내, 헤르타 자매는 매달 내게 작은 식품 꾸러미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작은 식품 꾸러미가 없었더라면, 정말이지 나는 교도소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자매를 호의적으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석방된 이래, 여호와께서는 많은 봉사의 특권으로 나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나는 독일의 그로나우에서 다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가, 독일의 알프스 산맥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얼마 후에는 선교인을 위한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31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졸업식은 1958년에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 기간 중 양키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나는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리 앞에서 연설하면서, 내 경험을 얼마간 들려 주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졸업 후에는 칠레로 가서 선교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는 칠레의 최남단 지역에서 또다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땅 끝으로 파견된 것입니다. 1962년에는,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 출신의 사랑스러운 선교인인 패트시 보이트나겔과 결혼하였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내 패트시와 함께 여호와를 섬기는 훌륭한 경험을 즐겼습니다.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행복한 순간과 많은 고난을 경험해 왔습니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9) 1963년에 아직 칠레에 있을 당시, 아내와 나는 어린 딸을 잃는 비극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내가 몹시 아파서, 우리는 텍사스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내는 불과 마흔세 살밖에 안 되는 나이에, 역시 비극적인 상황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내 사랑스러운 아내를 호의적으로 기억해 달라고 종종 기도합니다.

이제는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나는 텍사스 주 브래디에서 정규 파이오니아이자 장로로서 봉사하는 특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 삶이 언제나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시험들에 직면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시편 필자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시 71:17.

[23면 삽화]

(1) 현재 장로이자 파이오니아로서 섬기고 있음, (2) 결혼하기 직전에 패트시와 함께, (3) 헤르 슈나이더의 교실에서, (4) 라벤스브뤼크에서 사망한 나의 어머니, 테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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