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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약한 자”가 “강국”이 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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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약한 자”가 “강국”이 되는 것을 보았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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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파97 11/1 19-22면

나는 “약한 자”가 “강국”이 되는 것을 보았다

윌리엄 딩먼의 체험담

때는 1936년이었고, 장소는 미국 오리건 주 세일럼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해 있었습니다. “큰 무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청중에게 주어졌습니다. (계시 7:9) 새로운 참석자는 나밖에 없었으므로, 청중은 모두 나를 가리키며 “저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성서의 희망을 가진 사람이 1930년대 중반에는 비교적 소수였습니다. (시 37:29; 누가 23:43) 그 때 이후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먼저, 내가 오리건 주 세일럼에서 열린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깨어라!」지의 이전 명칭인 「황금 시대」의 예약 구독자였습니다. 나는 십대 시절에 그 잡지를 즐겨 읽었으며, 그 잡지 속에 중요한 성서 진리가 들어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황금 시대」 뒷면에 있는 쿠폰을 보냈습니다. 그 쿠폰을 보내는 독자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이름과 함께 20부의 소책자와 한 권의 서적이 우송되었습니다. 나는 출판물을 받자마자 집집으로 다니면서 서적은 물론 소책자를 전부 전하였습니다.

그 당시 나는 누구하고도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과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왕국회관 주소를 입수하자, 오리건 주 세일럼까지 약 40킬로미터를 차로 달려가서 집회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집회에서 나는 “큰 무리”로 유일하게 구분되었는데, 그 때 내 나이는 아직 18세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는 봉사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지만, 세일럼 회중과 함께 전파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증거할 때 세 가지 기본적인 점들을 포함시키도록 격려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여호와가 하느님이시라는 점,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임명된 왕이라는 점, 셋째는 왕국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그 소식을 모든 집에 전해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년 동안 세일럼의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한 후, 나는 1938년 4월 3일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세일럼의 증인 친구들은 “큰 무리”에 속한 우리들 몇 사람이 침례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는 1939년 2월에 전 시간 봉사자인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 해 12월에는, 왕국 선포자가 더 많이 필요한 곳인 애리조나 주로 이사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애리조나 주에서의 파이오니아 활동

애리조나 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새로운 일이라 우리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을 때 우리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1942년에 내가 애리조나 주의 스태퍼드에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 일단의 모르몬 교도가 우리에게 집단 폭행을 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나는 파이오니아 짝들과 함께 우연히 모르몬교의 한 주교가 사는 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우리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모르몬 선교인들이 증인들만큼 활동적으로 일한다면, 모르몬 교회는 크게 확장될 것입니다.” 그는 교회 내에서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증인 청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할 것이라는 말이 들립니다. 그런데 내가 그 청년들 가까이에 살고 있으니까 만일 집단 폭행이 있게 되면 내 엽총을 곧바로 담장 너머로 발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엽총은 증인들을 향하여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폭도를 향하여 발사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집단 폭행을 하고 싶으면 무슨 일을 각오해야 할지 알아 두십시오.” 폭도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애리조나 주에서 활동하던 삼 년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한번은 30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봉사의 직무에서 경찰의 괴롭힘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특별 기동대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였습니다. 그 일을 책임 맡은 증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새벽 5시나 6시에 시작해서 집집마다 전도지나 소책자를 한 부씩 남긴 다음, 재빨리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특별 기동대”는 애리조나 주의 꽤 많은 지역을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동대는 결국 해체되었는데, 그러한 전파 방식으로는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길르앗 학교와 특별 봉사

1942년 12월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설립한 새로운 선교 학교에 오라는 초대장을 받은 애리조나 주의 여러 명의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처음에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대학이라고 불렸습니다. 후에 그 이름은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 학교는 약 4800킬로미터 떨어진, 뉴욕 주의 북부 지방에 있는 이시카라는 도시 근처에 있었습니다.

1943년 1월에 오리건 주를 잠시 방문한 후에, 우리 여러 명의 파이오니아들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뜨거운 애리조나 사막을 떠났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뉴욕 주 북부 지방의 겨울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1943년 2월 1일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때 그 학교의 교장인 네이선 H. 노어는 개교 연설을 하면서 백 명의 학생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을 임명받은 봉사자가 되게 준비시키는 것이 이 대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봉사자들이며, 여러 해 동안 봉사의 직무를 활동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 이 대학의 연구 과정이 추구하는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이 가서 활동하게 될 구역에서 여러분을 좀더 자격을 갖춘 봉사자들이 되게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세속 교육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길르앗에서의 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강사들이 나를 잘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학과목들을 대단히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급의 학생들은 다섯 달 동안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후에 졸업하였습니다. 후에 우리 중 몇 사람을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로 보냈는데, 그 곳에서 순회 감독자로서 여행하는 활동에서 봉사하도록 준비시켜 주는 훈련을 더 받았습니다. 나의 첫 임명지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였습니다.

그 초창기에 순회 감독자는 거의 끊임없이 이동하였습니다. 우리는 작은 회중에서는 하루를, 큰 회중에서는 이틀을 머물렀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회중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 온종일을 보낸 후에, 방문을 하고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종종 거의 자정까지 머문 후에,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일어나서 이웃 회중으로 여행을 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약 1년 동안 순회 활동을 한 후에 테네시 주와 뉴욕 주에서 얼마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쿠바로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로

나는 1945년 5월에 몇 사람과 함께, 나의 최초의 외국 선교 임명지인 쿠바로 파견되었습니다!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 도착하던 날 밤, 우리는 잡지 배부 활동을 하러 나갔습니다. 우리는 산타클라라에 집을 정할 수 있을 때까지 아바나에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월수당은 개인당 단지 25달러였는데, 그 돈으로 식비와 집세를 포함하여 필수적인 모든 경비를 충당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침대와 가구를 짰고, 사과 상자로 서랍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듬해 나는 순회 활동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쿠바 전 지역이 한 순회구였습니다. 전임 순회 감독자는 다리가 길고 걷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은 그를 따라가기 위해 말 그대로 뛰어다녀야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맞추어 나의 방문 일정을 모두 계획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날 모두 봉사하러 나가지 않고,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교대로 나와 함께 활동을 하였습니다. 첫째 날은 한 그룹이 나를 멀리 떨어진 구역으로 데리고 가고, 다음날은 또 다른 그룹이 또 다른 먼 구역으로 나를 데리고 가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방문이 끝날 즈음 나는 녹초가 되었지만 그 일은 즐거웠습니다. 나는 그 회중에서 경험한 즐거운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950년에 쿠바에는 7000명이 넘는 왕국 전도인이 있었는데, 멕시코의 전도인 수와 거의 비슷하였습니다. 그 해 7월에 나는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신권 통치 증가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푸에르토리코로 새로운 선교 임명을 받았습니다. 길르앗 학교 제12기 학급 출신의 새로운 선교인 가운데는 에스텔 위클리와 셀마 위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와 함께 푸에르토리코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8년 후에 에스텔과 나는 푸에르토리코의 바야몬에서 순회 대회의 휴게 시간에 연단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순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에스텔과 내가 푸에르토리코에서 10년 넘게 있는 동안 우리는 큰 증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500명도 안 되던 전도인이 2000명이 넘게 증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헌신과 침례의 단계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었으며, 여러 개의 새로운 회중을 설립하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60년 12월에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밀턴 헨첼이 푸에르토리코를 방문하여 선교인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누군가 다른 임명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자원한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 부부도 있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우리 집

우리의 새로운 임명지는 도미니카 공화국이었고, 우리는 1961년 6월 1일을 이삿날로 정하였습니다. 5월 30일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인 라파엘 트루히요가 암살되어 그 나라로 가는 항공 편이 취소되었습니다. 하지만 항공기 운항은 곧 재개되어 우리는 계획대로 6월 1일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 나라는 격변 상태에 있었고 군사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혁명이 일어날까 봐 염려되어 군인들은 간선 도로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수색하였습니다. 우리는 몇 군데의 검문소에서 검문을 당했으며, 그 때마다 짐 수색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가방 속의 모든 것을,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샅샅이 조사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들어가면서 겪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첫 임지인 라로마나로 가기 전에 몇 주 동안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머물렀습니다. 트루히요의 독재 기간 중에 그 공화국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공산주의자이며 가장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증인들은 몹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편견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라로마나에서 짧은 기간 일한 후에, 우리는 또다시 순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1964년에 우리는 산티아고 시에 선교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도미니카 공화국은 혁명을 겪었고 그 나라는 또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분쟁이 있는 동안 우리는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로 임지가 옮겨졌는데, 그 곳은 정치적 행동주의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전파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회중을 하나 구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뒤이어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임명이 몇 번 더 바뀌는 경험을 한 후에 산티아고에 있는 지금의 우리 집이 있는 곳으로 다시 임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 곳 도미니카 공화국에서의 활동을 축복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아 왔습니다. 1961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약 600명의 증인과 20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300개가 넘는 회중에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전도인이 거의 2만 명이나 있습니다. 1996년에 거행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6만 9908명이 참석한 것으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더 크게 성장할 전망이 대단히 밝습니다. 그 수는 전도인 수의 약 세 배 반이나 되는 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강국

세상의 장면은 계속 변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전파하는 성서의 소식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고린도 첫째 7:31)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하느님이시고, 그리스도도 여전히 왕이시며, 왕국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분명하게 세상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한편, 내가 약 60년 전에 오리건 주 세일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이래 여호와의 백성 사이에는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큰 무리는 정말로 커져서 500만 명이 넘는 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 관해 이렇게 예언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 60:22.

나는 거의 60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지만 아직도 내 선교 임명지에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여 “약한 자”가 “강국”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21면 삽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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