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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 국가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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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 국가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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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파99 3/1 24-29면

공산 국가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미하일 바실레비치 사비츠키의 체험담

「파수대」 1956년 5월 1일호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대추방”이 1951년 4월 1, 7, 8일에 있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동 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날들은 러시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들입니다. 그 사흘 동안 서부 우크라이나, 백러시아[벨로루시], 베사라비아, 몰다비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모든 여호와의 증인인 7000명 이상의 남녀가 ·⁠·⁠· 마차에 태워져서 철도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가축용 화차에 실려 먼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때는 1951년 4월 8일이었습니다. 아내와 생후 8개월 된 아들과 부모와 동생, 그 외의 많은 증인들은 우크라이나의 테르노폴과 그 인근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축용 화차에 실린 다음 약 2주 동안 여행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이칼 호 서쪽에 있는 시베리아의 타이가(아한대 지방의 삼림 지대)에 내렸습니다.

이 추방된 사람들에 내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 후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어떻게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서 진리가 우리에게 이르다

1947년 9월, 내가 겨우 15세였을 때,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테르노폴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만 마을인 슬라비아틴에 있는 우리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앉아서 그 젊은 여자들—그 중 한 사람은 이름이 마리아였음—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나는 그것이 단지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명확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고 우리가 하는 성서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실망해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곤 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지옥불 고초에 대한 설교로 사람들을 겁주지만, 자기들은 무서운 게 하나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고 속이기만 하니 말이야.”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우리 마을의 폴란드인 주민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방화 행위를 기억합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러한 공격들은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살해된 많은 희생자들을 보았으며, 그러한 잔학 행위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하면서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본적인 성서 진리들을 배웠는데, 그 중에는 불타는 지옥이 없으며 사탄 마귀가 거짓 종교를 이용하여 전쟁과 유혈 행위를 조장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개인 연구를 하다가는 멈추어서 내가 배우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성서 진리들을 동생 스타흐에게 전해 주기 시작하였으며, 동생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함

나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고 즉시 담배를 끊었습니다. 또한 조직적인 성서 연구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함께 모일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숲 속으로 약 10킬로미터를 걸어서 집회가 열리는 비밀 장소에 갔습니다. 어떤 때는 여자들 몇 명만이 집회에 올 수 있었으므로, 나는 아직 침례도 받지 않았을 때였지만 집회를 사회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성서 출판물을 소지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는데, 그러한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면 최고 25년 형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개인용 출판물들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웃 사람 중에 예전에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하였지만 두려움 때문에 중단하고 갖고 있던 출판물을 정원에 파묻어 버린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책과 잡지를 모두 파내서 내게 주겠다고 하였을 때, 나는 참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나는 그 출판물들을 아버지의 벌통에 숨겼는데,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1949년 7월, 나는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 비밀 침례 행사를 주관한 증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시련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침례받은 증인으로서의 나의 인생은 기쁘게 시작되었습니다. 침례받은 지 두 달 후에 나는 마리아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어머니와 나에게 진리를 처음으로 알려 준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첫 시련이 닥치다

1950년 4월 16일, 조그만 마을인 파드기치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느닷없이 군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내가 우리 연구 집단으로 가져가던 얼마의 성서 출판물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체포되었습니다. 감금 기간의 처음 며칠 동안, 나는 몽둥이로 맞았으며 먹거나 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나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100번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너무 지친 나머지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춥고 습기 찬 지하실에 던져져 24시간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학대를 한 목적은 저항하려는 나의 의지를 약화시켜서 쉽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출판물은 어디서 났고 누구에게 가져가던 중이었나?” 그들은 캐물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밝히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법조문의 일부를 내게 읽어 주었는데, 나는 그에 따라 재판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법조문에는 소련을 반대하는 내용의 출판물을 배포하고 소지하면 사형이나 25년 형에 처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처벌을 받고 싶나?” 그들은 물었습니다.

“둘 다 싫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호와를 신뢰하며, 그분이 도와 주신다면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7일 후에 나를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 경험은 이와 같은 여호와의 약속이 참됨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히브리 13:5.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심하게 앓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의사에게 데려가 준 덕택에 이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머지 가족의 종교적 신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숭배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투옥과 유형

몇 달 후에 나는 소련군에서 복무하도록 징집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양심적 거부 의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사야 2:4) 그런데도 나는 1951년 2월에 4년 형을 선고받고 테르노폴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후에 나는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더 큰 도시인 리비프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 수감되어 있을 때, 많은 증인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951년 여름, 우리는 시베리아를 지나 곧장 극동으로 보내졌습니다. 한 달 동안 약 1만 1000킬로미터를 여행하면서 11개의 시간대를 가로질렀습니다! 열차에서 2주 이상을 지낸 후, 우리는 어떤 곳에서 딱 한 차례 내려서 목욕을 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목욕을 한 장소는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의 큰 공중 목욕탕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나는 한 남자가 많은 죄수들 가운데서 큰 소리로 “이 중에서 누가 요나답 가족입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나답”이라는 표현은 당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을 가진 사람들을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열왕 하 10:15-17; 시 37:11, 29) 몇몇 죄수가 즉시 자신이 증인임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쁨에 넘쳐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교도소 내에서의 영적 활동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동안,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서로를 식별할 수 있게 해 줄 암호를 함께 정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멀지 않은 동해상(上)에 있는 수용소에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서 연구를 위해 정기적인 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장기형을 받은 그 장성되고 연로한 형제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참으로 영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그들은 교대로 집회를 사회하였는데, 성구들과 「파수대」지에서 기억나는 관련된 요점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질문이 제기되면 그 형제들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빈 시멘트 포대에서 종이 조각을 잘라내어 거기에다 그 해설들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필기한 것들을 모아서 함께 묶은 다음, 개인 참조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몇 달 후, 장기수들은 시베리아 북단에 있는 수용소들로 보내졌습니다. 우리 젊은 형제 세 사람은 일본에서 650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인근 도시인 나호트카로 이송되었습니다. 나는 그곳의 교도소에서 2년을 복역하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파수대」 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파수대」는 여러 달 동안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편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형살이 중이던) 가족으로부터 첫 편지를 받았을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그 편지에는, 서두에 인용한 「파수대」에 설명된 것처럼 사람들이 증인들의 집에 들이닥쳤고 가족들에게는 그곳을 떠나는 데 단지 두 시간의 여유밖에 주지 않았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가족과 함께

1952년 12월, 나는 형기 4년 중 2년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습니다. 시베리아의 툴룬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 가달레이에서 가족과 재회했는데, 나의 가족은 그곳으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시 가족과 함께 있게 되어 매우 행복했습니다. 그때 아들 이반은 거의 세 살이, 딸 안나는 거의 두 살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자유는 조건부였습니다. 나는 지방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했고 철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3킬로미터 밖으로는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말을 타고 툴룬에 있는 시장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나는 신중을 기하면서 그곳에서 동료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때쯤에 우리에게는 두 딸 안나와 나디아, 그리고 두 아들 이반과 콜랴가 있었습니다. 1958년에는 아들 볼로댜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1961년에는 또 다른 딸 갈리야를 낳았습니다.

KGB(이전의 국가 보안 기관)는 종종 나를 감금하고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나로 하여금 회중에 관한 정보를 털어놓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나를 고급 식당에 데려가서, 내가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웃고 있는 사진을 찍으려 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동기를 간파하여, 계속 찡그린 얼굴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매번 감금될 때마다 형제들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이 나의 충성에 의문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수용소 내부와의 접촉

여러 해에 걸쳐 수백 명의 증인들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수감된 형제들과 계속 정기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출판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였습니까? 형제나 자매가 수용소에서 석방되면, 그들로부터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몰래 출판물을 들여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우리는 폴란드와 다른 나라들을 통해 입수한 잡지와 서적들을 그러한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에게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많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아주 작은 글씨로 출판물을 베껴쓰는 단조로운 일을 장시간에 걸쳐 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잡지 한 부 전체를 성냥갑만큼이나 작은 물건 속에 숨길 수 있었습니다! 1991년에, 우리가 더는 금지령하에 있지 않게 되고 아름다운 총천연색 잡지를 받게 되자, 우리의 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잊혀지겠군요.” 그 자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잊을지 몰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충성스런 사람들이 수행한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히브리 6:10.

이주와 가슴 아픈 일들

1967년 말,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생의 집이 수색을 당했습니다. 성서 출판물들과 그러한 출판물들의 필름이 발견되었습니다. 동생은 유죄로 판결되어 3년 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을 수색하였을 때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하였으므로, 우리 가족은 그 지역을 떠나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쪽으로 약 5000킬로미터 떨어진 카프카스의 네비노미스크 시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계속 분주하게 비공식 증거를 하였습니다.

1969년 6월, 방학 첫날에 가슴 아픈 일이 닥쳤습니다. 12세 된 아들 콜랴가 고압 변압기 근처에서 공을 주워 오려다가 심각한 감전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콜랴는 몸의 70퍼센트 이상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서 콜랴는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함께 그 섬에 갈 수 있을까요?” (콜랴는 우리가 즐겨 찾곤 했던 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물론이지, 콜랴야. 우린 다시 그 섬에 갈 거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일으켜 살아나게 하실 때 우린 틀림없이 그 섬에 갈 거란다.” 콜랴는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왕국 노래 한 곡을 계속 불렀는데, 콜랴는 회중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으로 그 곡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사흘 후에 콜랴는 부활 희망을 확신하면서 사망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20세 된 아들 이반이 군복무를 하도록 징집되었습니다. 군복무를 거부하자 이반은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나도 징집되었고,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투옥될 것이라는 협박을 또다시 받았습니다. 나에 대한 소송은 여러 달을 끌었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암에 걸렸고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송은 취하되었습니다. 마리아는 197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충실한 반려자였으며, 죽기까지 여호와께 충성스러웠습니다.

가족이 국외로 흩어지다

1973년에 나는 니나와 결혼하였습니다. 1960년에 니나의 아버지는 니나가 증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니나는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열심히 잡지를 베껴쓰는 일을 한 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열심 있는 봉사자였습니다. 나의 자녀들 역시 니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네비노미스크에서의 우리의 활동에 당황하여 우리에게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 아내와 딸들과 나는 그루지야의 남부 카프카스 지역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아들 이반과 볼로댜는 카자흐스탄의 남쪽 국경에 위치한 잠불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루지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막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흑해 연안에 있는 가그라와 수후미와 주변 지역에서 비공식적으로 증거하였으며, 1년 후에는 산을 끼고 흐르는 강에서 10명의 새로운 증인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당국에서는 우리에게 그 지역을 떠나도록 강요하였고, 우리는 그루지야 동부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양 같은 사람들을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소규모의 집단 단위로 함께 모였습니다. 언어가 문제였는데, 우리는 그루지야어를 할 줄 몰랐으며 일부 그루지야 사람들은 러시아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러시아어로만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루지야어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잘 발전하였으며, 지금은 그루지야에 수천 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습니다.

1979년, KGB로부터 압력을 받은 고용주는 내가 그 나라에서 더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딸 나디아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나디아와 어린 외손녀가 모두 사망한 것도 바로 그때 즈음이었습니다. 그 전해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동생을 남겨둔 채, 여호와께 충실한 가운데 네비노미스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인내에 대한 축복

네비노미스크에서도 우리는 지하에서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한번은 당국자들에게 소환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우리의 잡지를 숨기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내가 떠날 때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 더는 어떻게 당신네 출판물을 숨길 것인지에 대해 꿈을 꾸지 않아도 되길 바라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머지않아 그 출판물은 당신의 책장에 진열되고, 당신은 아내와 팔짱을 끼고 손에 성서를 들고 집회에 가게 될 거요.”

1989년에 딸 안나가 뇌에 생긴 동맥류로 사망하자 우리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안나는 불과 38세였습니다. 그 해 8월, 네비노미스크의 증인들은 열차를 전세 내서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여행하여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6만 366명이 참석하였는데, 거기에는 소련에서 온 수천 명의 증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1991년 3월 27일에 나는 소련에서 오래 된 다섯 명의 회중 장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모스크바에서 역사적인 문서에 서명하는 특권을 누렸는데, 그 문서는 여호와의 증인 종교 조직을 법적으로 인가하는 문서였습니다!

나는 남아 있는 자녀들이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그리고 안나와 나디아와 외손녀, 그리고 콜랴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하느님의 신세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콜랴가 부활되면 나는 우리가 오래 전에 그토록 함께 즐겨 찾던 그 섬에 데리고 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그동안, 성서 진리가 이 광대한 나라에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큰 기쁨을 느껴 왔습니다! 나는 나의 삶에 대해 참으로 행복하게 여기며, 여호와께서 나를 그분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신 데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시편 34:8의 이러한 말씀이 참됨을 확신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5면 삽화]

툴룬에서 가족과 재회했던 해에 찍은 사진

[26면 삽화]

위: 아버지와 나의 자녀들, 시베리아 툴룬의 우리 집 밖에서

위 오른쪽: 교통 사고로 사망한 딸 나디아와 외손녀

오른쪽: 1968년에 찍은 가족 사진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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