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17 10월호 3-6면
  •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축복을 맛보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축복을 맛보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연구용)—2017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새로운 짝
  • “우리가 하겠습니다!”
  • 다시 잉글랜드로, 그다음 스코틀랜드로
  •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임명을 받다
  • 아일랜드 신권 역사의 전환점
  • 임명에 큰 변화가 생기다
  • 1921—100년 전의 역사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연구용)—2021
  • 내 인생을 바칠 만한 최상의 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5
  • 계속 씨를 뿌리라—여호와께서 반드시 자라게 하신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1
  •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4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연구용)—2017
파17 10월호 3-6면
올리브 매슈스

체험기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축복을 맛보다

올리브 매슈스

“우리가 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구역에서 봉사할 사람이 있냐는 말을 듣고 우리 부부와 오빠 부부가 한 말입니다. 우리가 그 기회를 붙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먼저, 내 배경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는 1923년에 잉글랜드 요크셔에 있는 헴즈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게는 밥이라고 하는 오빠가 한 명 있었죠. 아버지는 종교의 위선을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는 거짓 종교를 폭로하는 책을 몇 권 구해서 아주 감명 깊게 읽으셨지요. 몇 년 뒤에 밥 앳킨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축음기로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을 들려줬습니다. 우리는 그 연설을 제작한 단체가 예전에 아버지가 읽은 책을 발행한 단체라는 걸 알게 됐죠! 부모님은 앳킨슨 형제에게 매일 저녁 우리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성경에 관한 질문들에 대답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앳킨슨 형제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한 형제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우리를 초대했지요. 우리 가족은 바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결국 헴즈워스에 작은 회중이 생겼습니다. 얼마 뒤부터 우리는 지구의 종(현재의 순회 감독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근처에 사는 파이오니아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어요. 그들과 교제하면서 좋은 영향을 참 많이 받았죠.

그 무렵 우리 가족은 사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오빠에게 “네가 파이오니아를 하겠다고 하면 사업을 접을 거야” 하고 말씀하셨죠. 오빠는 알았다고 했고 스물한 살 때 집을 떠나 파이오니아를 했습니다. 2년 뒤, 나도 열여섯 살에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지요. 주말을 빼고는 증거 카드와 축음기를 이용해 거의 혼자서 봉사했어요. 하지만 여호와께서 정말 잘 발전하는 성서 연구생을 만나게 해 주셨죠. 결국 그 연구생의 가족 중 여러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듬해에 나는 메리 헨셜 자매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어요. 우리는 체셔 주의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했지요.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어요. 여자들에게는 전쟁을 지원하는 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죠. 우리는 전 시간 봉사자인 특별 파이오니아였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교직자들처럼 그 일에서 면제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하지만 법원은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고, 나는 31일간의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열아홉 살 때인 다음 해에 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등록했습니다. 나는 두 번 더 법원에 소환되었지만 나에 관한 소송은 기각되었어요.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성령이 날 돕고 있고 여호와께서 내 손을 잡고 나를 강하고 굳건하게 해 주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이사야 41:10, 13.

새로운 짝

나는 1946년에 아서 매슈스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3개월간 수감되었는데, 출소하자마자 특별 파이오니아인 남동생 데니스와 함께 봉사하려고 헴즈워스로 왔어요. 그 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여호와에 관해 배웠고 십 대 때 침례를 받았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데니스는 아일랜드로 임지가 바뀌었고 아서는 혼자 남아 봉사했어요. 이 젊은 파이오니아의 열심과 좋은 행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우리 부모님은 아서에게 자신들의 집에서 살라고 하셨어요. 나는 부모님 집에 갈 때면 식사 후에 아서와 함께 설거지를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지요. 1948년에 아서는 다시 한 번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우리는 1949년 1월에 결혼했어요.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생활을 잘 계획했고 휴가 기간에 과일 따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신 덕분에 계속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1949년에 아서와 올리브 매슈스의 모습

1949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뒤 헴즈워스에서

1년이 조금 더 지나서 우리는 북아일랜드로 가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첫 임지는 아마였고, 그다음은 뉴리였어요. 두 곳 다 가톨릭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지요. 종교적인 편견이 심했기 때문에, 우리는 봉사할 때 분별력을 나타내고 아주 조심해야 했어요. 집회는 우리가 살던 데서 16킬로미터쯤 떨어진 한 부부의 집에서 열렸어요. 보통 8명 정도가 참석했죠. 그 집에서 종종 하룻밤 묵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잠은 바닥에서 자고 아침에는 푸짐한 식사를 함께 했지요. 지금 그 지역에 많은 증인들이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오빠와 그의 아내 로티는 이미 북아일랜드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어요. 1952년에 우리 네 사람은 벨파스트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형제가 친절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어요. 당시 영국 지부의 종인 프라이스 휴스 형제도 함께 묵었습니다. 하루는 저녁에 대회에서 발표된 「하나님의 길—사랑」(God’s Way Is Love)이라는 소책자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어요. 그 소책자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지요. 휴스 형제는 아일랜드 공화국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파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형제들은 숙소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교직자들이 선동한 폭도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죠. 프라이스 형제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일랜드 전역에 이 소책자를 배부하는 특별 운동을 해야 하는데, 차를 가진 부부들이 필요합니다.”a 우리는 곧바로 “우리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기사 제일 처음에 나온 바로 그 말을 하게 된 거예요.

동료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모습

아서와 올리브 매슈스가 동료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모습

더블린에는 오랫동안 충실히 여호와를 섬긴 러틀랜드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는 파이오니아들에게 늘 숙소를 제공해 주었죠. 우리는 그 집에 잠시 머물면서 얼마의 물건들을 처분했어요. 그다음에 우리 네 사람은 사이드카가 달린 오빠의 오토바이에 다 같이 타고 자동차를 구하러 다녔죠. 그러다 적당한 중고차를 찾아서 판매자에게 차를 배달해 달라고 했어요. 우리 중에는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남편은 그날 저녁에 침대에 앉아 차를 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기어 변속 연습을 했지요.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차고 밖으로 차를 빼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데 선교인인 밀드레드 윌렛 자매(나중에 존 바 형제와 결혼함)가 왔어요. 그 자매는 운전을 할 줄 알았어요! 그 자매의 도움을 받으며 차도로 나와 연습을 조금 더 한 뒤, 우리는 봉사하러 갔습니다!

아서와 올리브 매슈스가 자신들의 자동차와 이동식 주택에서 찍은 사진

우리 자동차와 이동식 주택

다음으로, 우리는 숙소를 구해야 했어요. 형제들이 이동식 주택은 반대자들이 불을 지를 수도 있으니까 구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해서 일반 주택을 찾으러 다녔는데 헛수고였죠. 그날 밤 우리 넷은 차에서 자야 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개인이 만든 조그마한 이동식 주택밖에 찾을 수 없었죠. 그 이동식 주택에는 작은 이층 침대 1개가 딸려 있었어요. 그곳이 우리의 집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친절한 농부들의 소유지에 아무런 문제 없이 이동식 주택을 세워 둘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곳에서 16-2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역에 가서 봉사했습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면, 그 전까지 이동식 주택을 세워 두었던 구역을 돌며 봉사했지요.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아일랜드 공화국 남동부에 있는 집들을 모두 방문했어요. 2만 부가 넘는 소책자를 전했고 관심을 보인 사람들의 명단을 영국 지부 사무실에 보냈죠. 기쁘게도 지금 그 지역에는 수백 명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다시 잉글랜드로, 그다음 스코틀랜드로

나중에 우리는 런던 남부 지역으로 임지가 바뀌었어요. 몇 주 뒤 영국 지부 사무실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는데, 다음 날부터 순회 활동을 할 수 있냐고 묻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는 일주일간 훈련을 받은 뒤 스코틀랜드에 있는 순회구로 갔습니다. 남편은 연설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지만 여호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힘든 일도 기꺼이 하려고 했지요. 그 모습이 내게 큰 격려가 됐어요. 우리는 아주 즐겁게 순회 활동을 했지요.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몇 년간 봉사하다가 이제 아주 많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남편은 1962년에 10개월 동안 열리는 길르앗 학교에 초대되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죠. 우리 부부는 내가 혼자 지내야 하더라도 남편이 이 특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남편이 없는 동안 나는 헴즈워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약 1년 뒤 남편이 돌아왔을 때 남편은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우리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부, 북아일랜드에서 봉사했어요.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임명을 받다

1964년에 남편은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지부의 종으로 봉사하라는 새로운 임명을 받았어요. 나는 여행하는 봉사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새로운 임명을 받고 걱정이 많았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베델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 별로 내키지 않는 임명이 주어져도 그 임명을 받아들이면 언제나 여호와의 축복을 받게 되지요. 베델에서 나는 사무실 업무, 출판물 포장, 요리, 청소를 하면서 바쁘게 지냈어요. 이따금은 지역 활동을 하면서 전국에 있는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역 활동을 하고 우리의 성서 연구생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일랜드의 형제 자매들과 가족처럼 가까워졌어요. 정말 큰 축복이지요!

아일랜드 신권 역사의 전환점

1965년에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최초의 국제 대회가 열렸어요.b 여러 면에서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대회는 매우 성공적이었죠. 총 3948명이 참석했고 65명이 침례받았어요. 외국에서 온 3500명의 참석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사람들은 모두 감사 편지를 받았습니다. 집주인들은 참석자들의 훌륭한 행실을 칭찬했지요. 이 일은 아일랜드의 신권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아서 매슈스가 1965년에 네이선 노어와 찍은 사진

남편이 1965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노어 형제와 인사하는 모습

1983년에 아서 매슈스가 게일어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발표하는 모습

1983년에 남편이 게일어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발표하는 모습

1966년에는 더블린 지부 사무실이 북부와 남부를 포함한 아일랜드 전체를 감독하게 되었어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된 그 지역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대조가 되었지요. 많은 가톨릭교인이 진리 안으로 들어와 이전에 기독교인이었던 형제들과 함께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건 큰 기쁨이었습니다.

임명에 큰 변화가 생기다

2011년에 영국 지부와 아일랜드 지부가 합병되고 우리가 런던 베델로 임명되면서 우리의 삶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을 무렵, 나는 남편의 건강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죠. 나와 66년을 함께한 남편은 결국 2015년 5월 20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고 우울감과 슬픔을 겪어 왔어요. 예전에는 늘 남편이 곁에 있어 주었지요.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 여호와와 더 가까워지죠. 남편이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게 될 때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아일랜드, 영국, 심지어 미국에 있는 벗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 주었어요. 남편의 남동생 데니스와 그의 아내 메이비스, 내 조카들인 루스와 주디도 날 격려해 주었죠. 벗들과 가족의 이러한 도움은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큰 힘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30:18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이 큰 격려가 됐어요.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시며, 너희에게 자비를 보이려고 일어서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공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계속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다.” 여호와께서 신세계에서 문제들을 없애고 우리에게 흥미진진한 일을 맡기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이 정말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여호와께서 아일랜드의 전파 활동을 인도하고 축복해 오셨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 성장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영광이에요. 분명,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언제나 축복을 받게 됩니다.

a 「1988 여호와의 증인 연감」 100-102면 참조.

b 「1988 여호와의 증인 연감」 108-111면 참조.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