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는 금지된 책이 아니다깨어라!—1986 | 8월 15일
-
-
더는 금지된 책이 아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 일부 가톨릭 국가에서는, 성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가 과감하게 변화되어 왔다. 연만한 가톨릭 교인이라면 성서를 읽는 것이 완전히 단죄시되진 않았다 해도 불쾌감을 샀던 시절을 아직도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이 유력한 많은 국가에서, 일반 사람들은 성서를 프로테스탄트 서적으로 간주하고 멀리 피하였던 것이다.
18 및 19세기 중의 프랑스 상황에 대해, 프랑스 루앙에 있는 명문 신학교의 성경학 교수인 죠르쥬 오주는 교회의 인가를 받은 그의 저서 「라 파롤 드 디외」(하느님의 말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성서를 읽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 사실상, 교직자나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면, 나머지 가톨릭 교인들은 성서를 더는 읽지 않았다. 성서는 [가톨릭계] 서점에서 사라져 버렸었다. 성서가 위험하고 불건전한 책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조장되었다 ··· 성서는 수녀원들과 그리스도교의[가톨릭계] 교육 기관 등에서 완강히 배격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프레쥐와 툴롱의 가톨릭 주교인 미뇨는, 비구르의 「성서 사전」(Dictionnaire de la Bible: 1891-1912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성서 연구에 대한 각성이 이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성서에 관한 질문들은] ··· 매우 제한된 초심자층만의 관심을 끌 뿐이었다 ··· 성서를 읽거나 연구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시 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은 결코 거론되지도 않았다. 혹 어떤 경건한 평신도가 「이사야」나 「잠언」을 인용하거나 하면 사람들은 놀란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혹시 프로테스탄트로 은밀히 기울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협회들이 활동을 증가시키자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에,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1920년에,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1943년에 각각 성서 연구에 관한 회칙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서한들은 가톨릭 평신도들에게 보다는 오히려 신학자들과 교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실제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1962-65년)가 있은 후였다. 그 공의회는 이와 같이 천명하였다. “신성한 본 종교 회의는 또한 충실하고 특히 독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자주 읽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존귀한 지식’ (필립비 3:8, 공동번역)을 배우도록 진실로 그리고 각별히 촉구한다. ‘왜냐하면, [제롬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무지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966년에 「가톨릭 독서 안내」(A Guide to Catholic Reading)라는 책의 저자들은 이와 같이 쓸 수 있었다. “근래 여러 세기 동안, 일반 가톨릭 교인들은 성서를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자, 전승을 지닌 모든 가톨릭 교리의 근원으로서 믿어 왔다. 그러면서 또한, 성서를 읽는 방법에 극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권고를 받았으며, 가급적이면 교직자나 교단측의 면밀한 감독하에 읽도록 권고를 받았다. ··· 다행히도, 상황이 급격히 바뀌어서 오늘날의 가톨릭 교인들은 ‘책 중의 책’을 읽도록 모든 면으로 촉구와 권고와 간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고딕체는 본지에서.
교회의 인가를 받은 저서로부터 모두 발췌한 이런 인용문들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성서가 더는 금지된 책이 아님을 알려 준다. 하지만, 마지막 인용문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가톨릭 교인들은 또한 그들 교회의 전승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음 기사에서 살펴보겠지만 많은 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에게, 심지어는 가톨릭 교회 자체에까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켜 왔다.
-
-
성서 혹은 전승?—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이 처한 궁지깨어라!—1986 | 8월 15일
-
-
성서 혹은 전승?—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이 처한 궁지
근년에 와서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성서를 구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표준 스페인어 성서 번역판들이 지난 50년 동안 그 이전 500년간보다도 더욱 많이 발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프랑스의 가톨릭 교인들도 교회의 인가를 받은 원문에서 번역된 여러 권의 성서를 의향대로 볼 수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학자들 역시 몇 종류의 새로운 성서 번역판들을 출간해 왔다.
따라서, 오늘날은 가톨릭 교인일지라도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주석이 필히 갖춰져 있고 정식 인가를 받은 역본만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가톨릭 교회 당국이 이런 조건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전승(傳承)’이라는 또 다른 하느님의 계시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주석들이 성서와 전승을 조화시켜주는 데 필수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톨릭 교회는 성서 혹은 전승 두 근원 중에서 어느 것을 더욱 중요시하는가?
허용은 되나 필수적은 아님
「가톨릭 성경 주해서」(A Catholic Commentary on Holy Scripture)라는 책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 “성서를 읽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가?” 그 책의 대답은 이러하다. “하느님의 교훈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에도 모든 충실한 남녀, 어린이들이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교훈은 전혀 없다.”
그와 같이, 현재 가톨릭 교회는 그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허용하고, “만일 최소한 30분 동안 계속 읽는다면” 대사면을 베풀기까지 하지만, 그와 같이 성서를 읽는 것을 필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a 프랑스어 가톨릭 「성서 사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앙에 관한 모든 가르침이 인류에게 전해지는 가장 정상적인 경로는 바로 전승이다. 신약 성경은 후일에 사용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는 신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다 들어 있지 않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전승을 성서보다 앞세우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인들에게 성서를 읽는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들이 성서를 읽는다해도, 성서는 전승 다음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가톨릭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기록된 말씀을 받기 이전에 구전(口傳)에 의존했으며, 따라서 교회가 보전한 전승에 비추어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교인들이 성서를 읽는 데 도울 목적으로 발행된 한 서적은 그러한 견지를 이렇게 뒷받침한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할지라도, 충실한 교단인 ‘살아 있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서와 전승과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일으킨다. ··· 이처럼 [성경에] 부가되는 빛은 일단 주어지면, 보배로운 전승과 결합하여 그 전승을 완성시켜 준다. 따라서, 성경은 전적으로 전승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성서 입문」(Initiation Biblique) 963, 971면. 고딕체는 저자에 의한 것.
성실한 가톨릭 교인으로서, 성경학 전공인 한 가톨릭 교수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는다면 도대체 얼마 만큼이나 성서에 확신을 둘 수 있을 것인가? “전승은 성경보다 우선하고 성경을 포용하고 동반하며 능가한다.”b 또는, 그가 「가톨릭 사전」(A Catholic Dictionary)에서 문득 이런 글을 읽게 될 때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교회는 ··· 모든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확언하지만, 동시에 성경에 더하여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고 언명한다.”
성서를 읽는 가톨릭 교인들이 처한 궁지
수세기 동안 일반 가톨릭 교인들은 의심을 품는 일 없이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평신도에게 교회 교리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톨릭 교인들은 교리 문답 학습에서 기계적인 방식으로 교리를 배웠다. 만약 그들이 삼위일체나 마리아의 무염 시태와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들을 설명해 달라고 교리 문답 교사나 담당 사제에게 요청하면, 그들은 십중 팔구 언제나 이러한 식의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오묘입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 교인들 사이에서 전례없이 자기 관찰을 할 기회를 터준 근대화 즉 최신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적합하고 정확한” 성서 “번역판들”을 추가로 발행할 수 있도록 청신호를 비추었으며, 가톨릭 주교들에게는 “그들에게 맡겨진 충실한 교인들에게 신성한 책을 올바로 사용하는 면에서 적합한 교훈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일반 가톨릭 교인들도 현재 성서를 구입해서, 읽고, 읽는 것을 그간 배웠던 것과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있게 되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많은 가톨릭 교인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교리들이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들 중에는 마리아 숭배, “성자들”에게 하는 기도, 성물 숭상, 사면, 연옥 및 림보 등이 있다.
후자에 관해, 「가톨릭 사전」은 이렇게 시인한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초를 당해야 한다는 믿음에는 당연히 모순이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도로써 신학자들은 갖가지 이론들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림보는 그러한 이론들 중 하나인 것이다.c
하지만, 성서는 죽은 자들이 무덤 속에 잠들어 있으며 부활을 기다린다고 알려 준다. (전도 9:5, 10; 요한 5:28, 29) 불멸의 영혼이란 없으므로, 지옥의 고초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신학상의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림보 이론을 만들어 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를 읽는 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이제서야 깨닫는, 그들이 처한 궁지의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가톨릭 교인들은 사람이 만들어 낸 전승과 성서 중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가톨릭 교회가 처한 궁지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아마 어떤 사제는 앞서 언급한 가톨릭 교인 개개인이 처한 궁지를 이러한 말로 회피할지 모른다. ‘그건 별 문제가 아니다. 성서의 계시란 전승에 의해 완성되어 왔다. 교회의 전승을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상황은 그 정도로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파리의 가톨릭 연구소에 있는 예수회 교수 폴 앙리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성경은 생활, 숭배, 도덕 및 교회의 신학적 교리의 기준을 설정한다. [권위있는 표준을 확립한다]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거나 원하시는 모든 것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행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서 성경과 결코 모순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전승이 성경을 완성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가톨릭 교인들이 자신의 성서로 고린도 전서 4:6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과 본질적으로 모순된다. 더구나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명백히 “성경과 모순”되는 지옥불, 연옥 및 림보와 같은 교리들을 가르치는 일로 인해서 가톨릭 교회는 궁지에 빠져 있는 것이다.—에스겔 18:4, 20; 로마 6:23.
성서에 비추어 전승을 측정해 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모든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자주 읽”도록 공적으로 촉구하였다. 더 나아가, 한 「가톨릭 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가톨릭 교인은 교회가 성경과 모순되는 어떤 교리도 가르칠리 없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해도 전혀 무방하다.” 본지는 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에게, 성서를 읽으라는 가톨릭 교회의 권유에 유의하고 가톨릭의 어떤 교리가 “성경과 모순”되는지의 여부를 직접 확인해 보도록 권유하는 바이다.
만일 가톨릭 교인들이 ‘제 3차 성서의 사도직을 위한 가톨릭 세계 연맹 총회’에서 부여된 사명, 즉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에 유의하고자 한다면, 성경을 직접 검토해 보는 것은 더욱더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사명과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에 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각주]
a 「사면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 1968년, 50호.
b 「라 파롤 드 디외」, 26면.
c 림보는 “세례받지 않은 어린이나 예수 이전에 살았던 의인이 사후에 머무는 곳으로, 지옥의 변방”으로 정의되어 왔다.
[5면 삽입]
“성경에 더하여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가?
[6면 삽입]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서 성경과 결코 모순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
[6면 삽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자료 제공]
UPI/Bettmann Newsphotos
-
-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깨어라!—1986 | 8월 15일
-
-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서를 사랑하는 가톨릭 교인들의 한 모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본인은 ‘성서의 사도직을 위한 세계 가톨릭 연맹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분들에게 진심어린 안부를 전하며, 본인이 영적으로 함께 함을 확언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본 총회가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수 11:29, 공동번역)는 모세의 말에서 영감받은 주제를 택하였다는 것과 총회에서 이 말씀을 장차 착수하려는 과업에 적용시켰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뻐하는 바입니다.”—「로세르 바토르 로마노」 1984년 8월 24일호.
가톨릭의 성서 교육 사업
‘제 3차 성서의 사도직을 위한 세계 가톨릭 연맹 총회’는 1984년 8월 인도의 뱅갈로루에서 개최되었다. 53개국의 대표자들이 회합을 가졌다. 그 연맹은 1969년 로마에서 창설된 것이다. 그때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에 있는 독일인 추기경에게 성서와 관련된 문제에서 가톨릭 교회에 필요한 점을 연구하도록 임명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현재 이탈리아 레그호른의 주교인 몬시뇨르 아블론디가 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는 그 연맹에 본연의 목표를 재검토하도록 권하면서 그 메시지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본 연맹의 임무는 세계 전역의 가톨릭 교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 실로, 교회에서의 모든 활동 및 증거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백성이 지닌 ‘예언자의 임무’는 성서에 관한 진실한 봉사로서 의식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 성서의 번역, 출판 및 전파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비교 아모스 8:11) 이것은 또한 앞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헌신할 사람들을 조직하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총회의 주제와 일치하게, 본 가톨릭 성서 총회는 마지막 성명에서 이렇게 발표하였다. “본 연맹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각기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각기 자기 언어로 된 개인용 성서)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바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성경 지식으로 훈련받을 권리가 있다 ··· 본 총회는 교회의 복음 전도 사업이 성서에 중점을 둔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바이다.”
불가능한 상황
그러므로, 지금 가톨릭 교인들은 성서를 읽을 뿐 아니라 성서에 중점을 둔 복음 전도 사업에 활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를 받고 있다. 이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가톨릭 교회는 전승이 성서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인이 성서를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서 동시에 가톨릭 교회에 계속 충실히 머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를 들어, 그는 성서에서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귀절을 읽게 된다. (에스겔 18:4, 20; 참조 가톨릭판 개역 표준역; 비교 두에이역)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서는 영혼이 불멸이며 모든 영혼은 지옥, 림보, 연옥 아니면 천당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는 가톨릭의 교리와 성서—그 중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겠는가?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에서 발행하도록 승인한 성서 번역판들은 주석과 주해가 딸린 것으로, 이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라는 독자의 확신을 침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신 미국어 성서」(The New American Bible)는 “성서를 읽는 법”이란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교황 바오로 6세의 서두 축사를 싣고 있다. “다루는 내용이 역사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의 비유적인 말씀인지를 독자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어쨌든 인종(人種)이 하등 종류의 생물에서 진화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므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의 ‘방법’을 재고하게 되고, 창세기 2, 3장의 내용이 인류학에 관한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우화이며, 죄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창세기의 첫 페이지에 이르기도 전에, 가톨릭 성서의 독자들은 역사가 아닌 우화에 불과한 것을 읽게 되리라는 설명을 듣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일부일처제의 근거로서 아담과 하와의 예를 사용하셨을 때, 그분은 하나의 우화를 사용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태 19:3-9; 창세 1:27; 2:24) 또한, 만일 인류에게 하나의 공통 조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마태 20:28; 로마 5:12, 17-19; 고린도 전 15:45.
심지어 그 동일한 가톨릭 성서는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의 신빙성에 의혹을 던지기까지 한다. “성서를 읽는 법”이란 제하에서 그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복음서 필자들이 과학적 의미에서 역사를 기록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예수께서 이러한 대화들에 말려드셨는가? 그분은 성서에 언급된 꼭 그대로 대답하셨는가? 그 점은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그처럼 믿음을 파괴하는 견해가 실린 간행물을 승인한다면, 성실한 가톨릭 교인들이 어떻게 성서를 확신있게 읽겠으며,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헌신”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믿음을 침식시키는 유사한 해설들을 「예루살렘 성서」나 그외의 가톨릭계 성서 및 백과사전들에서 볼 수 있다. 매우 공정을 기하면,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성서 주해서들도 그처럼 성서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부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 모두는 예언자들이다
「신 미국어 성서」는 정확하게 이와 같이 설명한다. “예언자란 ‘다른 이를 대변해 주는 자’ 특히 하느님을 대변하는 자를 뜻한다. 그 의미는 반드시 장래사를 예언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하느님의 백성이 지닌 ‘예언자의 임무’는 성서에 관한 진실한 봉사로서 의식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가톨릭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참다운 예언자나 증인이 되려면, 주로 전승에 근거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저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의 사도직을 위한 세계 가톨릭 연맹’은 그 마지막 성명에서 특히 젊은이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의 성서 교육, 저렴한 성서 및 성서 교육용 책자들, 성서 번역 및 성서 번역자들, 그리고 전 시간 일꾼들의 필요성을 표명하였다. 그 연맹은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그에 따라 생활하면서 “시대의 표징들을 분별”해야 한다고 표명하였다.
독자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모두가 하나님의 예언자요 증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백성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 보는 데 관심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세계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노유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적인 성서 교육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전 시간 자진 봉사자들이 수십만명이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저렴하게 또는 심지어 무료로 배포되는 성서와 성서 교육용 책자들을 번역하고 인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을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엔 생활의 일부를 봉사에 바치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라도, 독자가 “시대의 표징들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들어 있는 훌륭한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기꺼이 돕고자 할 것이다.
[8면 삽화]
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예언자들이다
[7면 사진 자료 제공]
UPI/Bettmann Newsphot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