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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답을 요하는 질문
    깨어라!—1990 | 10월 15일
    • 대답을 요하는 질문

      생애중에 어느 때엔가 이런 질문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였는가? 그리고 인간 역사 전체에 걸쳐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허락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은 언젠가 끝날 때가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여 한이 맺혀 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등지거나 자신들의 불행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 대전중 나치가 수백만 명을 살육한 대학살을 살아 남은 한 사람은 몹시 한이 맺힌 나머지 “내 심장을 핥는 사람은 독살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민족 박해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여러 벗과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은 한 사람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하고 비통하게 묻는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은 혼란을 느낀다. 그런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선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악한 일이 있게 허용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해온 일

      분명한 사실로서, 사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사실, 수천 년에 걸쳐—다른 사람들에게 수많은 악을 저질러 왔다. 그 모든 악의 규모와 참상은 아연 실색케 할 정도다.

      이른바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상해하는 한층 더 무시무시한 도구들, 이를테면, 대포, 기관총, 전투기, 탱크, 미사일, 화염 방사기, 화학 무기와 핵무기를 고안해 냈다. 그 결과 금세기에만도, 나라들의 전쟁으로 인해 약 1억 명이 죽었다! 그 외에도 수억 명이 다치거나 다른 면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그리고 집과 소유물 같은 재산이 파괴된 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전쟁이 야기한 엄청난 슬픔, 고통, 눈물을 생각해 보라! 연로한 남녀와 어린이, 아기들과 같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대개 많은 가해자가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바로 이 순간에도 고통은 끊일 줄 모른다. 날마다 사람들은 범죄로 인해 살해되거나 피해를 당한다. 폭풍,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다. 불공정, 편견, 가난, 굶주림, 질병 혹은 그 외의 갖가지 이유로 고통을 당한다.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해 놓고, 여러 세기에 걸쳐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그토록 자주 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난해한 문제—인체에서도 보게 됨

      이러한 난해한 문제는 인체에서도 나타난다. 인체를 연구한 과학자들과 그 외의 사람들은 인체가 비길 데 없이 훌륭하게 만들어졌음에 의견이 일치한다.

      인체의 놀라운 특징 몇 가지만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어떤 카메라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눈, 가장 진보된 컴퓨터도 무색하게 할 정도인 외경심을 갖게 하는 두뇌, 복잡 미묘한 신체 부분들이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협조하는 방식, 단지 9개월 만에 부모를 꼭 닮은 귀여운 아기를 출생케 하는 출산의 기적이 있다. 많은 사람은 설계의 걸작인 이 인체는 반드시 설계의 대가 곧 창조주인 전능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놀라운 인체는 쇠약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체는 병과 노화, 죽음에 사로잡힌다. 결국 한줌의 흙이 된다. 참으로 가엾다! 사람이 수십 년 간의 경험을 통해 유익을 얻고 현명해져야 할 그 때 인체는 허물어지는 것이다. 인체는 그 출발시에 잠재해 있던 건강, 활력, 아름다움과는 반대로 너무 애처롭게 끝난다!

      인자한 창조주는 왜 인체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 서글프게 끝나게 하는가? 창조주는 왜 그토록 훌륭한 출발과 상당한 잠재력을 갖게 창조한 구조를 그토록 형편없이 끝나게 하는가?

      일부 사람들의 설명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향상시키시려고 악과 고통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신다고 말하였다. 한 감리교 교직자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악인 때문에 선인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다.” 그는, 선한 사람은 인격을 도야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악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면 인자한 인간 아버지는 자녀를 사악한 범죄자의 손에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 자녀의 인격을 향상시키려고 하겠는가? 한편, 사고로 죽거나 살해되거나 전쟁에서 죽은 많은 청소년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희생된 청소년은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킬 기회를 더는 가질 수 없다. 죽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개인의 인격을 향상시키기 위해 허락된 것이라는 견해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치적이고 인자한 인간 아버지라면 가족에게 고통이나 비극이 닥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가족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게 할 계획을 하는 아버지는 부적합한 사람, 심지어 정신적으로 균형잡히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고로 인자한 아버지, 우주의 전지한 창조주인 하나님이 ‘구원을 위한 계획’의 일부로, 의도적으로 고통을 마련하셨다는 것이 이치적인 말인가? 그런 말은 그분에게 극도로 잔인하고 극악 무도한 속성 곧 신분이 낮은 우리 인간에게서조차 누구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답을 찾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통과 악을 허락하신 일을 둘러싼 질문들의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질문들에는 하나님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분 자신이 무슨 대답을 제시하시는지 알아보는 것이 이치적이다.

      우리는 그분의 대답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지침서로 저술하셨다고 말씀하신 출전 곧 성서를 살펴봄으로써이다. 그 출전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 없이 그것은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 사물을 바로잡는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디모데 후 3:16, 신세) 그는 또한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a—데살로니가 전 2:13.

      고통이 허락된 일에 관한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단순히 지적 훈련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그 대답은 바로 지금 세계 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까운 장래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우리 각자가 어떻게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우리는 마땅히 성서 곧 하나님께서 인간 가족에게 보내신 통신문 자체가 말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성서는 고통이 시작된 경위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대답을 이해하는 열쇠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와 관련이 있다. 성서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기질 속에 매우 중요한 특성인 자유에 대한 욕망을 심어 주셨음을 알려 준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신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간단히 고려해 보자.

      [각주]

      a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에 관해 논한 사단 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성서—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말인가?」 책 참조.

  • 놀라운 선물인 자유 의지
    깨어라!—1990 | 10월 15일
    • 놀라운 선물인 자유 의지

      우리는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가?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게 일평생 매순간 사사건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지시해 주기를 원하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 의해 온전히 통제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압박감을 주고 욕구 불만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처럼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악과 고통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악과 고통을 끝내는 조치를 취하시지 않고 기다리신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만들어진 방식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놀라운 선물 중에는 자유 의지가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지닌 특성 중 하나는 선택의 자유임을 알려 준다. (창세 1:26; 신명 7:6)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바로 그 훌륭한 특성 곧 자유 의지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압제적인 통치자에게 예속되는 것보다 자유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칠고 억압적인 다스림에 분개하면서 자유를 얻으려고 항거한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성서는 근본적인 이유를 이러한 말로 제시한다. “주[여호와, 신세]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 후 3:17) 그러므로 자유를 원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분 자신이 자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린도 후 3:17.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자유 의지와 일치하게 작용하는 지각력, 이지력, 판단력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도 베풀어 주셨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우리는 생각하고 문제를 신중히 고려하고 결정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히브리 5:14) 우리는 자체의 의지가 전혀 없는, 지성 없는 로봇처럼 창조되지 않았으며, 짐승처럼 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도록 창조되지도 않았다.

      우리의 첫 부모는 자유 의지와 더불어 누구나 이치적으로 원할 만한 모든 것을 받았다. 즉 그들은 공원 같은 낙원에 거하였고, 물질적으로 풍족하였으며, 정신과 몸은 완전하여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을 것이며, 역시 행복한 미래를 누릴 자녀를 가질 것이며, 늘어나는 후손들은 땅 전체를 낙원으로 바꾸는 만족을 주는 일을 하게 되어 있었다.—창세 1:26-30; 2:15.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것에 관하여 성서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한다. (창세 1:31; 사체로는 본지에서) 성서는 또한 창조주에 대해 “그 공덕[하시는 일, 공동번역]이 완전”하다고 말한다. (신명 32:4; 사체로는 본지에서) 그렇다. 그분은 인간 가족이 완전한 출발을 하게 하셨다. 그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한계가 있는 자유

      하지만, 놀라운 선물인 자유 의지에는 한계가 없도록 되어 있었는가? 우선, 교통량은 격심한데 교통 법규가 전혀 없이 어느 차선이든, 어느 방향으로든, 어느 속도로든 임의로 달릴 수 있는 곳에서 운전하고 싶어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처럼 교통상의 제한 없는 자유는 참사를 초래할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부 사람들의 제한 없는 자유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가 없게 될 수 있다. 무제한의 자유는 모두의 자유를 손상시키는 무정부를 초래할 수 있다.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유를 선물로 주신 것은 인간들이 다른 사람의 복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의로 처신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I 베드로 2:16,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가 공통 유익을 위해 규제되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받는 상대적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누구의 법?

      우리는 누구의 법에 순종하도록 설계되었는가? 누구의 법이 우리에게 최상의 유익을 주는가? 앞서 지적된 성구 베드로 전서 2:16(공동번역)의 다른 부분은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이라고 기술한다. 이 말은 압제받는 종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법에 복종할 때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그 어느 법률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법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최상의 지침이 된다. 이사야 48:17에서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언명한 바와 같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법은 그 경계 내에서 폭넓은 자유를 허용한다. 이로 인해 개인 선택권과 다양성이 풍부해지며, 인간 가족은 더 흥미있고 실로 매혹적인 상태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물리 법칙에도 복종한다. 예로서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 특별한 호흡 기구 없이 잠수할 경우 몇 분 안 되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체내 법칙을 무시하고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면 역시 죽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첫 부모와 그 후손 모두는 하나님의 도덕적, 사회적 법을 비롯하여 물리 법칙에 순종할 필요가 있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짐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복지에 그리고 후에 있을 인간 가족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게 되어 있었다. 첫 부모가 하나님의 법의 한계 내에 머물렀더라면 모든 일이 잘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 훌륭한 출발이 망쳐지게 되었는가? 그 시작과는 달리 왜 악과 고통이 만연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악과 고통을 그토록 오랫동안 허락해 오셨는가?

      [7면 삽화]

      놀라운 선물인 자유 의지로 인해 우리는 지성 없는 로봇 그리고 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과 구별된다

  •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
    깨어라!—1990 | 10월 15일
    •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소서.]”—예레미야 10:23, 24.

      이 말은 인간이 창조된 지 수천 년 후에 기록되었다. 예레미야는 당시까지 인간 역사가 하나님께서 첫 부모에게 베푸신 훌륭한 출발에 비할 때 비참한 것임을 잘 알았다.

      예레미야의 관찰은 그 시대 이후 흘러온 2500여 년의 역사 기록에 의해 더욱더 강력해진다. 인간의 참상은 한층 더 악화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자유 의지의 오용

      우리의 첫 부모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법을 떠나서는 번영할 수 없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로 인해 삶이 향상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를 남용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유 의지의 한계를 넘어갔다.—창세 3장.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과 하와를 즉시 없애시고 또 다른 인간 부부로 새 출발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분의 우주 주권과 다스리는 방법이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이자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므로 그들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그분은 전지한 분이므로 그분의 다스림은 모든 피조물에게 최상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이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창조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셨음이 분명하다. 인간에게 그 답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들이 간절히 원한 제한 없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허락해 오신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의 다스림이 성공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a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과 후손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심은 대로 거두었다.’ (갈라디아 6:7) “그들은 그들 스스로 파멸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흠은 그들 자신의 것이다.”—신명 32:5, 신세.

      첫 부모는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독립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창세 2:17) 그것은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건강과 생명의 원천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쇠약해져 가다가 죽고 말았다.—창세 3:19.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 가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저버리고 고안한 정치·사회·경제 제도가 온전한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충분히 증명할 만한 시간을 허락하셨다. 이러한 제도 중에서 범죄나 전쟁이 없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가져다 줄 제도가 있을 것인가? 모두에게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 줄 제도가 있을 것인가? 병, 노화, 죽음을 정복할 제도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 모든 것을 달성하도록 설계된 것이다.—창세 1:26-31.

      세월이 가르쳐 주는 것

      역사는 곧 로마서 5:12의,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이 참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이 구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음을 설명해 준다. 우리의 첫 부모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였을 때 결함 있고 불완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후손에게 이러한 결함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결함 있게 태어났으며 병과 죽음으로 향하게 되었다.

      세월은 또한 죄에 찌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저질렀는지를 밝혀 주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잔혹한 전쟁, 민족적·종교적 증오, 종교 재판, 온갖 종류의 무시무시한 범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행동들이 자행되어 왔다. 그에 더하여 가난과 굶주림으로 시달린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지난 수천 년 간 인류는 생각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정부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결같이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에, 공산주의 정부들은 여러 나라에서 배척당하였다. 민주 국가들에는 만연된 범죄, 빈곤, 경제적 불안정, 타락이 있다. 실상, 모든 형태의 인간 정부에 결함이 있음이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과학적, 물질적 업적을 극대화할 시간을 허용해 오셨다. 그러나 활과 화살을 핵 미사일로 대체한 것이 진정한 발전인가? 사람들이 우주 여행을 할 수 있지만 땅에서는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없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 때문에 밤에 외출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한 발전인가?

      세월의 시험은, 인간이 음식물과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걸음을 지도’하는 데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음식물과 공기에 의존하도록 창조된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우리를 지으신 분의 지침에 의존하도록 설계되었다.—마태 4:4.

      하나님께서는 악과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자유 의지 오용의 슬픈 결과를 단적으로 증명해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가 매우 귀중한 선물이므로 그것을 인간에게서 빼앗지 않으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것을 오용할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게 허용하셨다.

      「“보수 유대교 원론”」(“Statement of Principles of Conservative Judaism”)이라는 출판물은 자유 의지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선과 악에 직면하여 그릇된 선택을 할 실제 가능성이 없다면 선택에 대한 개념 전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 세계의 고통은 다분히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를 오용한 것의 직접적인 결과다.”

      예레미야가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다고 한 말은 옳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한다고 한 솔로몬의 말 역시 옳다.—전도 8:9.

      사람에게 고통을 제거할 능력이 없음을 강력하게 예시하는 말이다. 대단한 지혜, 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솔로몬조차 인간의 다스림에서 비롯된 불행한 일을 시정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고통을 끝내실 것인가? 그분은 언젠가 인간들이 과거에 당한 고통에 대해 보상해 주실 것인가?

      [각주]

      a 관련된 모든 쟁점에 대한 더 충분한 논의는 사단 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 11, 12장 참조.

      [9면 삽화]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완전한 출발을 하게 하셨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자신의 걸음을 지도’하는 데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 고통 없는 신세계
    깨어라!—1990 | 10월 15일
    • 고통 없는 신세계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찌니라.”—이사야 65:17, 18.

      이 예언의 말씀은 2700여 년 전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예언은 장차 땅에서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부분적으로 묘사한다.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현 사물의 제도를 끝내신 후다. 성서의 여러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 안 있어 현 사물의 제도를 제거하시고 고통이 없는 신세계를 들어서게 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알려 준다.

      이전의 인간 역사 전체에 걸친 삶과 비교할 때 신세계에서의 삶은 참으로 다를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신세계에서는 전쟁, 범죄, 가난, 불공정이 전혀 없을 것임을 알려 준다. 병과 죽음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매우 부적합함이 증명된, 분열을 일으키는 정부, 종교, 경제 제도가 더는 없을 것이다. 슬픔의 눈물은 즐거움의 눈물로 대체될 것이다. 악과 고통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 예언들에 예시된 상태

      그러한 상태가 표본이 되는 이러한 성서 예언에 어떻게 예시되었는지 유의하자.

      더는 전쟁이 없음: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라.]” (시 46:9)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

      누구에게나 공의가 시행됨: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리라.]”—이사야 28:17.

      두려움에서 벗어남: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미가 4:4)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찌라.”—에스겔 34:27.

      굶주림이 제거됨: “산 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리라.]” (시 72:16)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라.]”—에스겔 34:27.

      늙는 일이나 병이 더는 없음: “그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라.]” (욥 33:25)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33:24.

      죽음, 애통, 고통이 영원히 사라짐: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 21:4.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음

      하나님께서 만드실 다가오는 신세계는 매우 만족을 주는 것이므로 땅의 거주자들이 누릴 삶의 즐거움은 이전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불유쾌한 기억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그 새 시대에서 사람들은 매일 건설적인 많은 생각들과 활동으로 생활함으로 점차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지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땅 전체에 베푸실 것으로 인해 “영원히 기뻐”할 것이다.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이사야 65:17, 18; 14:7.

      성서에서 언명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는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신세계에서 역전될 것이다. 그때에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일 것이다. (잠언 13:12) 더는 고통이나 실현되지 않은 희망으로 인해 마음이 울적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 가족을 위해 베푸실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로 인해 마음은 만족과 즐거움으로 충만할 것이다.

      다른 통치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인간 통치와는 달리 신세계에는 완전히 다른 통치권이 들어설 것이다. 인간은 지배하는 권위를 박탈당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다스리는 일은 두번 다시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성서 예언은 이렇게 언명한다. “이 열왕[현재 집권해 있는 통치자들]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에] 한 나라[왕국, 신세]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더는 인간이 다스리는 일이 없도록]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현존하는]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다니엘 2:44.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땅의 새로운 통치권을 위해 기도하도록 이렇게 가르치셨다. “나라[왕국, 신세]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

      그것은 인류의 새로운 정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통해 다스리시는 하늘 통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인간 종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일들을 관리할 것이다. (이사야 32:1) 사도 베드로는 이 새로운 마련을 ‘그의 약속대로 우리가 바라보는,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였다. (베드로 후 3:13) 그 왕국 통치는 성서의 중심 가르침이다.

      ‘피조물이 해방됨’

      이 새로운 통치권은 또한 땅의 자연력을 온전히 통제할 것이다. 더는 고난을 야기하는 지진, 태풍, 홍수, 한발과 같은 ‘자연재해’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이러한 자연력을 제압할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일례로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가 폭풍에 휩싸여 뒤집힐 지경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놀란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하고 탄성을 발했다.—마태 8:23-27.

      그러한 상태에서 땅과 더불어 인간 피조물은 비길 데 없는 자유를 누릴 것이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 8:21, 22.

      우리는 인간 통치가 곧 끝나고 하나님의 새 정부가 지상사를 모두 관장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우주 주권자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이사야 46:10, 11.

      “정한 때”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고 언명한다. (전도 3:1, 공동번역)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시어 악과 고통을 끝내실 정한 때도 포함된다. 다니엘은 “정한 때 끝”을 언급하였다. (다니엘 8:19) 예수 역시 “지정된 때”에 대해 말씀하셨다.—마가 13:32, 33, 신세.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어 그분으로부터 독립한 인간 통치의 비참한 실험을 일소하실 때를 분명히 정해 놓으셨다.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이] ·⁠·⁠· 이룰 때가 있음이라.” (전도 3:17) 그리고 성서 예언의 성취에 따른 증거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기로 배정하신 때는 곧 끝날 것임을 지적한다. 그때가 한계점에 달하면, 그분은 수천 년 간 인간 가족에게 크나큰 고통을 가져다 준 불만족스러운 인간 통치 제도를 궤멸시키실 것이다.—마태 24:3-14; 디모데 후 3:1-5, 13; 계시 19:11-21.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때 그분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 무슨 대조적인 일이 있을 것인지 유의해 보자.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그러나, 공동번역]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라.]”—시 37:10, 11, 28, 29, 37, 38; 또한 잠언 2:21, 22; 마태 5:5 참조.

      그러면 이미 죽은 수십 억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어떻게 신세계의 혜택을 받을 것인가? 부활 즉 바로 이 땅에 생명으로 회복되는 일을 통해서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기회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한다”고 보증한다. (사도 24:15, 새번역) 그리고 예수께서는 나사로와 나인의 과부 아들의 경우처럼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요한 11:38-44; 누가 7:11-16.

      “보상”

      하나님께서 고통을 끝내시고 의로운 신세계를 가져오실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아는 것은 실로 가슴 뭉클한 일이다! 악과 고통이 영원히 옛일이 될, 낙원 같은 환경에서 완전한 건강과 행복을 누리며 수백만 년을—아니 영원히—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영원토록—베푸실 이 “보상”은 하나님께서 비교적 짧은 몇 천 년 동안 허용하신 고통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생애중에 개인적으로 견뎠을 70 내지 80년 간—혹은 그보다 적은 기간—의 고통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장기적인 안목

      창조주께서는 사물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시므로 우주 주권자로서 다스릴 권리와 그 다스림의 정당성이라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먼저 해결되는 것이 극히 중요함을 아신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합당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사용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였다. 또한 그분의 의로운 법에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인간들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박해와 시험을 받으면서도 그분에게 충절을 고수할 수 있다는 점—그분의 친아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이 점에서 뛰어난 본을 세우셨음—에서 그분의 창조물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꼭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쟁점을 모두 해결하시면 악과 고통이 또다시 나타나 평화로운 우주를 손상시키는 일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나훔 1:9.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영원토록 지난 몇 천 년 간 있었던 일을 마치 대법원에서 결정된 판례처럼 사용하실 수 있다. 이 선례는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 혹은 자유 의지의 합당한 사용과 관련하여 또다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우주에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양자 택일을 하는 데 자유 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목적을 무시하고 불완전한 인간 통치로 만족하여 그 운명에 동참하기로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의 왕국의 헌신한 신민으로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워 알기로 선택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그러므로 신세계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의 요구 조건에 관한 진리를 배우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성서에서 그 점을 어떻게 말하는지 유의해 보자.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역대 하 15:2.

      이 낡은 세계는 그 끝이 다 되어 가고 있으며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 1서 2:17)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없어질 구세계인가, 아니면 다가오는 신세계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언명한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라.]”—신명 30:19, 20.

      독자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는 사람들을 위해 그분이 마련하신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본지 발행소 혹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여호와의 증인은 기꺼이 독자가 이 점에 관해 더 알도록 무료로 돕고자 한다.

      [12면 삽입]

      죽은 사람은 무덤에서 부활됨으로 하나님의 신세계에서 살 기회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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