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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깨어라!—1991 | 4월 1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 시대가 되기 여러 세기 전부터 내려오는 말씀이다. 돌 위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된, 산 위에서 가지고 내려온 말씀이다. 모세는 포로였던 이스라엘인들을 애굽(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홍해를 건너 험준한 시내(시나이) 산 기슭에 있는 진영으로 인도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밤낮 40일을 여호와와 함께 지낸 뒤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다.—출애굽 34:1, 27, 28.

      이 두 돌판 중 하나에 다섯째 계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그 계명은 성서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계명은 “약속 있는 첫계명”이며,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이 바로 그 약속인 것이다.—에베소 6:1-3.

      십계명이 전달되는 동안 불과 연기가 나타나 외경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내 산이 무섭게 진동한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포함하여 그 계명들이 중요함을 극적으로 공표한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단지 존경과 순종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 물질적으로 돌보고 지원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점은 여러 세기 후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구전(口傳)에 관해 그들과 상충된 의견을 표명하셨을 때 명확히 밝혀졌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궁핍한 부모를 물질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셨다. 그분은, 마태 복음 15:3-6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예수께서는 몸소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복종하셨다. (누가 2:51) 여러 해 후, 예수께서는 형주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어머니를 돌보고 지원할 사랑스런 마련을 하심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셨다.—요한 19:25-27.

      사도 바울은 궁핍한 부모를 돌보는 것이 자녀, 심지어 손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흥미롭게도 공경을 나타내는 것과 그러한 물질적 지원을 이렇게 연관지었다.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디모데 전 5:3, 4) 부모는 자녀가 무력한 아기 때부터 다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이제 부모가 노인이 되었을 때 곤경에 처한 노부모를 돕는 것은 자녀의 차례다.

  • 노인을 돌보는 일—점증하는 문제
    깨어라!—1991 | 4월 1일
    • 노인을 돌보는 일—점증하는 문제

      한 소녀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예쁜 접시에 담아 먹는데 왜 할머니만 나무 그릇에 담아 드시나요?” 어머니가 이렇게 설명하였다. “할머니는 손을 떠시기 때문에 좋은 접시를 떨어뜨려 깨뜨릴 우려가 있거든, 그래서 나무 그릇을 사용하는 거란다.” 소녀는 잠시 그 점에 대해 생각하더니 이렇게 부탁하였다. “그러면 내가 커서 어머니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무 그릇을 간직해 두실래요?” 이렇게 앞일을 내다보는 말에 어머니는 아마 놀랐을 것이며, 어느 정도 충격마저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어머니에게 안도감을 주었을지 모른다. 어린 딸이 어머니를 돌볼 생각을 하니 말이다!

      많은 노인들에게는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을지 모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는 인구 계층이 이제는 노인층이다. 「월드 프레스 리뷰」 1987년 8월 호는 당시 세계 인구의 12퍼센트에 달하는 약 6억 명이 60세 이상이라고 보도하였다.

      미국의 경우, 사상 처음으로 노인 인구가 십대 청소년 인구를 앞지르고 있다. 뉴욕 시, 한 신문사의 과학부 편집인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현재 미국인 3000만 명이 65세 이상—이전 어느 때보다 높은 비율로서 여덟 명 당 한 명꼴—이며, 노인 인구는 그 외의 인구보다 2배나 빨리 증가한다. ·⁠·⁠· 1786년에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35세였다. 1989년에 태어난 미국 어린이의 평균 수명은 75세다.”

      캐나다의 경우, 금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85세 이상의 고령자 수가 세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100년 전, 유럽에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노인의 수는 치솟아 17퍼센트나 차지한다.

      미국 통계국의 “제삼 세계의 노인”에 관한 한 보고서는 “노인 인구 증가의 5분의 4는 제삼 세계에서 발생한다”고 기술하였다.

      40년 전, 중국인의 평균 수명은 약 35세였다. 1982년에는 68세로 껑충 뛰어올랐다. 현재 중국인 중 9000만 명이 노인이라고 하며, 금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 수가 1억 3000만 명으로 늘어나 총인구의 11퍼센트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부모를 돌보려는 각별한 노력

      세계적으로 고령자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그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난제가 더욱더 심각해진다. 성서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자녀, 부모, 조부모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가 있었다. 자녀와 조부모는 서로 유익을 주었으며, 부모는 필요한 물질적 마련을 할 수 있었고, 집안의 노인에게 필요한 특별한 돌봄이 베풀어지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대가족이 노인을 돌보는 것을 여전히 규범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예로서, 8면의 네모안 참조) 그러나 가족 단위가 부모와 자녀로 한정되어 있는, 보다 부유한 나라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자녀는 자신이 자라서 결혼하여 자녀를 둘 경우, 연로하고 허약하며 대개 만성 질환이 있는 부모를 돌보는 문제에 흔히 직면한다.

      현 사물의 제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실로 막중한 문제일 수 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현 경제 여건 아래서 부부가 다 직장을 가질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식료품비는 비싸고, 집세는 오르고, 청구서는 날아온다. 두 사람이 버는데도 어느새 돈이 다 떨어질지 모른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가정 주부의 경우, 자녀 치다꺼리와 장보기, 청소—이것 자체가 전 시간 직업—로 바쁠 것이다. 이것은 노부모를 집에서 돌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하는 점은 그 일이 매우 어려운 임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몸이 쑤시고 아프기도 하며, 이해할 만하게도, 언제나 너그럽고 밝은 기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 불만이나 까다로운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은 결코 집에서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힘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종종 더 오래 사는 딸들의 어깨에도 책임이 지워진다. 여러 연구들이 밝혀 주는 바에 따르면, 경제적인 도움은 아들들이 베풀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직접 돌보는 일은 주로 딸들이 한다. 딸들은 노부모에게 식사를 마련하며—종종 숟가락으로 떠드리기도 함—목욕도 시켜 드리고 옷도 갈아 입혀 드리며 이부자리도 갈아 드리고, 의사나 병원에 모시고 가며, 약을 제때에 드시는지 살펴 드리기도 한다. 종종 딸들은 노부모의 눈, 귀, 정신 역할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만만찮은 것이며, 그 일에 따르는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하려는 태도는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대학교의 성인 발달·노화 센터의 책임자로서, 의학 박사이자 철학 박사인 칼 아이스도퍼에 따르면, 대부분의 성인 자녀가 노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고 요양원에서 노년을 보내게 한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인들의 가족이 대부분 노인을 돌본다”고 그는 말하였다.

      통계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여론 조사에 응한 사람들의 75퍼센트는 부모가 더는 따로 살 수 없을 경우 부모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 점은 가족들이 자기 가족을 참으로 보살피기를 원함을 확증한다”고 아이스도퍼 박사는 말하였다. 그리고 「미스」지에 실린 한 보고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노인과 노인을 모시는 가족들 대부분이 사회 기관의 돌봄보다 가정의 돌봄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65세가 넘은 사람들의 5퍼센트만이 요양원에 있다.”

      다음의 사례는 일부 사람들이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을 보여 준다. 이 보고는 미국 곳곳의 회중을 방문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대표자가 보낸 것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어떻게 83세 된 노모를 요양원에 의탁하지 않고 직접 모시기로 하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어머니가 열한 자녀를 돌볼 수는 있어도 열한 자녀가 한 어머니를 돌볼 수 없다는 속담이 생각나더군요. 아무튼 아내와 나는 홀로 된 노모를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초기 단계의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었지만, 우리와 함께 트레일러로 여행하였습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우리가 집집으로 왕국 소식을 전할 때 함께 걸어 다녔습니다. 후에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동반해야 하였습니다. 집주인들은 우리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같더군요. 이따금 어머니가 옳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는 결코 틀린 점을 시정하여 어머니를 난처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늘 유머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주의를 주면서 ‘어머니 발 밑을 조심하세요’[Watch your step, Mother]하고 말하면, 어머니는 ‘내겐 의붓어머니[stepmother]가 없단다’라고 말을 받곤 하였지요. 우리는 어머니가 90세에 사망할 때까지 돌보았습니다.”

      요양원에 의탁해야 할 때

      미국에는 200만 명에 달하는 노인이 실제로 요양원에서 산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노인을 요양원에 의탁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매정하게 노인을 창고 같은 곳에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보살피는 유일한 대안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노인의 자녀들이 노부모를 돌볼 만한 입장에 있지 않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들 노부모 중에는 알츠하이머병에 몹시 시달리고 있거나 그 외의 만성 질환으로 쇠약해져서 병상에 누워만 지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특별히 돌봐드릴 필요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에 요양원은 그런 특수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지 모른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의 한 선교인은,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을 때 자기 어머니가 가슴 아파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플로리다에 사는 어머니는 외할머니 헬렌을 요양원에 의탁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4년 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전 시간 간호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벗들과 가족, 여러 사회 봉사자들과 의사들은 모두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의탁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어렸을 때부터 보살폈으니까, 이제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보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은, 외할머니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살핌보다 요양원에서 더 나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디모데 전 5:4.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일하는 한 증인은 암에 걸린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는 30여 년 간 열심 있는 증인이었습니다. 사망하기 전 9년 간 암으로 고생하였지요. 아내와 나는 휴가 때면 아버지와 함께 지냈고, 장기 휴가를 내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친족들도 여러 면으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내내 주로 어머니와 옆집에 사는 결혼한 누이가 돌보았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참석하는 증인 회중의 성원들이 아버지를 방문하였습니다. 마지막 2년 간은 병원 출입이 잦았으며, 마지막 5개월은 아버지에게 필요한 전문화된 간호를 받을 수 있는 간호 전문 기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집에서 간호 전문 기관으로 옮기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가족 전체가 내린 것이었으며 아버지도 참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이 집에서 당신을 돌보는 일이 너무 힘겹고, 불가능하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이러다가는 가족 모두가 죽겠다! 이제는 간호 전문 기관으로 가야 할 때다. 이것이 너희들에게도 바람직하고 내게도 나은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9년 간 가족이 아버지를 돌보았고, 아버지는 오로지 최후 수단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전문화된 간호를 24시간 내내 받기 위해 간호 전문 기관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적절히 돌보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요양원이 필요하게 될 경우, 가족은 직원들이 친절하고 유능하게 돌봐주는, 깨끗한 요양원을 찾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매일—가족이나 회중 성원 중에서—누군가 방문하게 하고, 적어도 전화라도 하게 하여 노인이 버림받은 듯한, 잊혀진 듯한, 완전히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을 갖거나,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요양원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방문객이 많은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매우 낙심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찾아 뵙고자 노력해야 한다. 뵙고 이야기를 나누자. 그의 말에 귀기울이자. 함께 기도하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설령 혼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무튼 기도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그가 어느 정도로 들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부모와 관련하여 결정할 일이 있을 때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함께 결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부모가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가능한 한 최대한의 사랑과 참을성과 이해심을 가지고 필요한 도움을 제안하는 것이 좋다. 그때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 우리가 부모와 조부모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할 때인 것이다.

      “사람의 본분”

      바삐 돌아가는 혼잡한 현 세상에서 노인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특히, 그저 경쟁에 뛰어들어 서둘러 출세하려는 젊은층은 노인이 단지 방해가 될 뿐이며 너무 오래 살아서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두 멈추어서, ‘과연 무엇을 근거로 삶의 가치를 규정할 것인가?’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젊은층은 노인의 삶의 가치를 과소 평가하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기가 쉽다.

      하지만 중요하게 보이는 것에 거의 혹은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은 노약자만이 아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일반 사람들의 활동을 헛된 것으로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청년과 청년의 일시적 활력에 대해 말하였으며, 세월에 의해 수많은 사람의 몸이 이미 쇠약해졌듯이 청년의 몸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모든 사람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며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다고 솔로몬은 말하였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 12:8.

      그러나 솔로몬은 분명히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칭송하였으며, 인생을 관찰한 바를 이런 말로 요약하였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 12:13) 바로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의 척도지,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혹은 사라져가는 이 물질주의적인 낡은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성공을 하느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황금률이라고 알려진, 인간 관계를 지배하는 지침이 되는 원칙을 알려 주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 7:12) 그 원칙을 적용하려면,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떤 대접을 받고자 할 것인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늙고 쇠약하여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경우, 자녀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할 것인가? 우리는 무력했던 어린 시절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베푼 20년 간의 부모의 돌봄과 지원에 대해 이제 노년에 무력해진 부모를 돌봐드림으로써 부모에게 보답할 것인가?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는 노부모를 바라볼 때, 우리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린이였을 때 부모가 우리에게 베푼 일, 우리가 아플 때마다 부모가 간호해 준 일, 우리를 먹여 주고 입혀 준 일,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야외로 데리고 간 일 등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부모의 복지에 대한 사랑에 찬 관심을 가지고 부모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드리는 데 무엇이 최선책인지 생각해 보자.

      그 결과 가능한 한 부모를 집에서 모시기 위해 필요한 마련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결정할 수 있다. 반면에, 연로한 부모를 포함하여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위해 간호 전문 기관이나 요양원에 의탁하는 것이 최선의 마련이라고 결정할 수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다른 사람들은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받기 때문이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그리고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는 교훈도 받고 있다.—로마 14:10; 야고보 4:12.

      무슨 결정이든 결국 노부모를 위해 내려진다면, 자녀와 함께 살든 요양원에 있든, 정신력이 손상되지 않는 한, 노부모는 계속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노부모는 순종하는 모든 인류가 낙원이 된 땅에서 건강하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여호와의 목적에 관해 배워 알 수 있다. 노부모는 새로운 천직 즉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노부모의 인생에서 가장 목적 있고 행복한 시기가 된다. 여느 사람같으면 인생 자체를 포기했을 법한 고령인데도 끝없는 의로운 신세계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을 알게 되어 그 희망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데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그 점을 잘 예시하는 한 사람의 예를 드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자 한다. 캘리포니아[미국]의 한 여인은 100세 때 요양원의 한 간호사를 통해 처음으로 그러한 약속된 축복에 관해 듣게 되었으며, 고령인 102세 때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다. 여인은 ‘헛되고 헛되게’ 인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 즉 ‘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생애를 마쳤다.

      [6면 삽입]

      여러 해 전에는 한 어머니가 열한 자녀를 돌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열한 자녀가 한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8면 네모]

      노인을 돌봄으로 공경을 나타냄—세계 곳곳의 보고

      “아프리카의 경우, 노인을 위해 정부에서 베푸는 마련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요양원도 없고, 노인 의료 보험 제도나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한 혜택도 없고, 연금 마련도 없다. 노인은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개발 도상국 사람들이 자녀를 갖는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근본 이유는 노후에 자녀의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많이 둘수록 그중 일부 자녀가 오래 살면서 부모를 돌볼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난한 사람들도 자녀를 많이 낳는다.

      “아프리카에도 표준이 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노인을 보살필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녀가 없는 노인이 있다면, 다른 가족이 보살핀다. 경제적으로 빈약한 처지에서 돌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가진 것으로 보살핀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또 다른 방법은 자기 자녀를 얼마 동안 조부모와 함께 살게 하는 것이다. 흔히 손자녀가 조부모의 집 안팎일을 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의술의 진보로 인해 보다 오래 산다. 개발 도상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용할 수 있는 제한된 의료 도움조차 받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에 죽는다. 시에라리온에는 ‘가난한 사람은 아프지 않는다’는 금언이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은 치료받을 돈이 없으므로 건강하든가 죽든가 한다는 말이다.”—아프리카 선교인, 로버트 랜디스.

      “멕시코의 경우, 사람들은 노부모를 깊이 존경한다. 부모는 아들들이 결혼하면 다 내보내고 따로 산다. 그러나 부모가 나이들어 곤경에 처하게 될 경우 자녀가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돌본다. 자녀는 이것을 본분으로 생각한다.

      “아들, 손자와 한집에 사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손자녀는 조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가족의 유대는 매우 긴밀하다.

      “멕시코에는 노인을 위한 복지 시설이 드물다. 아들딸들이 노부모를 보살피기 때문이다. 아들이 여럿 있을 경우, 막내가 결혼하여 집에 살면서 부모를 모시는 경우가 있다.—이사 알레만, 멕시코.

      “한국의 경우, 자녀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노인을 공경하도록 가르침받는다. 가정에서 장남이 노부모를 돌볼 것으로 기대된다. 장남이 부모를 모실 수 없을 경우 다른 아들이나 딸이 모신다. 많은 부부들이 노부모와 한 지붕 아래 거하며 부모를 봉양한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 살 것을 기대하며, 손자녀를 교훈하고 보살피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부부가 노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었으며, 우리는 조부모와 한집에서 살았다. 우리는 외출할 때, 어디에 가며 언제 돌아올 것인지를 조부모에게 알렸다. 집에 돌아오면 우선 조부모의 방에 들러서,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림으로 돌아왔음을 알린다. 조부모가 가족 전체의 복지를 염려하기 때문이었다.

      “조부모에게 어떤 물건을 드릴 때는 두 손으로 드렸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 이를테면 부모와 조부모, 교사, 고위 관리들에게 한 손으로 물건을 건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별식을 먹을 때는 먼저 조부모에게 드렸다.

      “노인 공경은 가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노인에게 적용된다. 국민 학교부터 고등 학교까지 도덕 혹은 윤리 수업이 있다. 그 수업 시간에 우리는 우화나 강의를 통해 노인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웠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오면 젊은이는 일어설 것으로 기대된다. 젊은이가 버스의 좌석에 앉아 있는데, 노인이 서 있다면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관습이다. 매우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가는 노인을 만날 경우, 멈추어 서서 도움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필요하다고 하면 노인이 가는 곳까지 짐을 들어다 드린다.

      “성서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사물의 제도의 이 마지막 날에 도덕 표준은 날이 갈수록 저하될 것이다. 한국도 그런 영향을 받는 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에게는 노인에 대해 그와 같이 존경하는 마음가짐이 남아 있다.” (디모데 후 3:1-5)—케이 킴, 한국.

      [7면 삽화]

      노인을 찾아 뵙는 것은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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