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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학대의 무고한 피해자들깨어라!—1991 |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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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학대의 무고한 피해자들
“지금 마흔 살이 다되었습니다”하고 아일린이 말한다.a “그리고 제 문제가 30년 이상이나 지난 것인데도 여전히 저를 괴롭힙니다. 분노, 죄의식, 결혼 생활상의 문제가 일어나지요! 사람들이 이해해 주려고 하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아일린의 문제는?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했으며 그 여파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아일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러 조사에서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엄청난 수의 여자들—그리고 남자들—이 그런 학대를 당했다.b 그러므로 어린이에 대한 성적 학대는 드문 성도착 행위이기는커녕 널리 퍼져 있는 고통 거리로서 온갖 사회·경제·종교·인종 집단에 두루 퍼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린이를 그런 식으로 학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의 위험성 있는 사람들은 그런 병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어린이에 대한 성적 학대자들은 대개 놀이터 근처에서 군침을 삼키며 어슬렁거리는, 살기를 띤 미치광이가 아니다. 대다수는 정상적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여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진하고 신뢰심을 나타내는 무방비 상태의 어린이들—일반적으로 자신의 딸—을 목표로 삼아 변태 성욕을 충족시킨다.c 그런 사람들이 공개적으로는 어린이를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어린이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하며, 모욕적이고 타락된 형태의 성폭행을 자행한다.
사실, 품위 있어 보이는 가정들에서 그런 참상이 그토록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성서 시대에도 “욕정을 ··· 일시적으로 만족시키려고” 어린이를 사용하는 일이 있었다. (「국제 비평 주석」[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비교 요엘 3:3) 성서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오. 마지막 날에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 혈육간의 애정이 없고, ··· 자제력이 없고, 사납고,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린이에 대한 성적 학대가 대규모로 횡행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 된다.—디모데 후 3:1-3, 13, 「신세」.
어린이에 대한 외설 행위가 신체적 상처를 남기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런 학대를 당하고 자란 성인이 모두 눈에 띄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의 한 잠언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언명하였다. (잠언 14:13) 그렇다. 많은 피해자들에게는 깊은 감정적 상처—가슴에 사무치는 은밀한 상처가 있다. 그러면 어린이에 대한 외설 행위가 일부 사람들을 그토록 망쳐 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는 그 상처가 언제나 낫지는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고통스러운 문제의 규모를 생각할 때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물론 이어지는 기사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읽기 거북할지 모른다. 특히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회복될 희망이 있음을 확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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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학대의 은밀한 상처깨어라!—1991 |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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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학대의 은밀한 상처
“제 자신이 정말 미워요. 어떻게든지 저항했어야, 그것을 막기 위해 무슨 말인가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늘 떠나질 않아요. 아주 더럽혀진 느낌이에요.”—앤.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느낌이에요. 종종 자포자기와 절망감에 빠지지요. 죽고 싶을 때도 있어요.”—질.
“아동기 성적 학대는 ··· 어린이의 정신, 영혼, 신체에 가해진 감당하기 어려운, 손상케 하는, 모욕적인 폭행이다. ··· 성적 학대는 개인의 존재의 모든 부면을 침해한다.” 비벌리 엥걸의 저서 「순진 무구할 권리」(The Right to Innocence)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어린이가 학대에 그와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a 어린이에게는 제각기 개성이 있고 나름대로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이 있으며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데가 있다. 또한 어린이와 학대자의 관계, 학대의 정도, 학대가 지속된 기간, 어린이의 나이 및 그 밖의 여러 요소들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대 사실이 밝혀지고 어린이가 어른의 인자한 지원을 받을 때 손상이 줄어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감정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참혹한 상처를 남기는 이유
성서는 그런 손상이 있는 이유에 대해 통찰력을 제시한다. 전도서 7:7에서는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고 알려 준다. 성인에게도 그러할진대 어린이가 포학한 압제를 당했을 경우—특히 신뢰해 온 어버이가 학대자일 경우 그 영향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어찌되었든, 생애의 처음 몇 해는 어린이의 감정적·영적 발달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디모데 후 3:15) 바로 이 어린 시기에 어린이는 도덕의 경계와 개인의 가치 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어린이는 부모와 유대 관계를 가짐으로써 사랑과 신뢰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시 22:9.
“성적으로 학대받은 어린이는 신뢰를 키우는 이 경로에서 탈선한다”고 J. 패트릭 개넌 박사는 설명한다. 학대자는 어린이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이다. 학대자는 어린이에게서 안정감, 사생활의 자유 혹은 자존심을 모조리 앗아가며 어린이를 자기 만족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이용한다.b 어린이는 자기에게 강요된 부도덕한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의 보편적으로 어린이들은 그런 경험을 기분 나쁘고 무서우며 모욕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아동기 성적 학대는 “최악의 배신”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예수의 이런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 (마태 7:9) 그러나 학대자는 자녀에게 사랑과 애정이 아니라 가장 잔인한 “돌”—성폭행을 주는 것이다.
상처가 오래가는 이유
잠언 22:6은 이렇게 알려 준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의 영향은 평생토록 지속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자기에게는 성적 침해를 막아 낼 힘이 없다고 믿도록 훈련받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사랑”을 받는 대가로 변태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자신을 무가치하고 더럽혀진 존재로 보도록 훈련받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평생토록 파멸적인 행동을 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이 어른이 된 후의 부당한 행실을 정당화할 구실은 안 되지만, 그 피해자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성적 학대를 당한 많은 사람은 우울증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증세로 고통을 당한다. 일부 사람들은 가실 줄 모르는, 때로는 감당키 어려운 죄의식과 수치심, 격분에 시달린다. 어떤 피해자들은 감정 폐쇄 즉 감정을 표현하거나 느끼지조차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많은 피해자의 경우 열등 의식과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저씨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샐리는 이렇게 기억을 떠올린다. “아저씨가 내게 외설 행위를 할 때마다 나는 무력했고 얼어붙듯 멍하게 굳어 있는 채로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있단 말인가?’” 심리학자 신시아 타워는 이렇게 기술한다. “여러 연구 결과들은 어렸을 때 성적으로 학대받은 사람들이 흔히 평생토록 자기가 피해자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사람들은 학대하는 기질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거나, 공격당하기 쉽게 처신하거나, 위협을 당할 때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는 대략 12년 남짓 자라면서 사춘기중에 깨어날 감정에 대비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음란한 행동을 강요받을 경우, 유발된 감정에 압도될지 모른다. 이것은 후에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를 즐기는 능력을 저해할 것이라고 한 연구는 알려 주었다. 피해자인 린다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제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결혼 생활의 성적인 부면입니다. 아버지와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듯한 무시무시한 느낌을 갖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어떤 피해자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나타내어 충동적인 부도덕한 욕망을 발전시킬지 모른다. “저는 난잡한 성생활을 하였으며, 전혀 낯선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기도 하였지요”라고 질은 털어놓는다.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또한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가질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남자들 혹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 도저히 사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학대하거나 지배하는 입장이 되어 벗 관계와 결혼 관계를 망친다. 그런가 하면 친밀한 관계를 완전히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 대해 파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피해자들도 있다. “내 몸이 성적 학대의 자극에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에 내 몸이 미웠어요”라고 리바는 말한다. 비참하게도,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 사이에 식욕 이상,c 일 중독, 알코올과 마약 남용이 흔히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일부 사람들은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기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리바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칼로 몸을 베고 손톱으로 팔을 찔렀으며 몸에 화상을 입혔어요. 학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느끼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적으로 학대당한 사람이라고 속단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신체적 혹은 감정적 요소들이 관련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그와 비슷한 증세는 기능 장애 가정—부모가 자녀를 구타하거나 자녀를 하찮게 취급하고 모욕을 주거나, 자녀의 신체적 필요를 무시하거나, 부모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인 가정—에서 자란 성인들 가운데에도 흔히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영적 손상
아동기 성적 학대가 초래할 수 있는 가장 음흉한 영향은 영적 손상일 것이다. 외설 행위는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다. (고린도 후 7:1) 학대자는 어린이에게 변태 행위를 함으로써, 어린이의 신체적 도덕적 경계를 침범함으로써, 어린이의 신뢰를 배신함으로써 어린이의 영 즉 지배적인 정신적 경향을 더럽힌다. 이것은 후에 피해자의 도덕적, 영적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피아 멜로디의 저서 「상호 의존증에 대처함」(Facing Codependence)은 이렇게 더 지적한다. “심각한 성적 학대는 무엇이든 ··· 영적 학대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등한 능력자에 대한 어린이의 신뢰심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런이라는 그리스도인 여자는 이렇게 묻는다. “저는 땅에 있는 아버지를 잔인하고 거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호와를 아버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피해자인 테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결코 여호와를 아버지로 부르지 않았어요. 하나님, 주, 주권자, 창조주, 다 좋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영적으로 약하거나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성서 원칙을 따르려고 꾸준히 기울이는 노력은 영적 힘의 증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이 성서 시편 103:13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어떻게 느낄 것인지 생각해 보자. 일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지적으로는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 건전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구절에 감동 어린 반응을 나타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기가 즉 나약하고 겸손하며 신뢰하는 태도를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할 때 자신의 참다운 느낌을 하나님께 털어놓지 않을지 모른다. (마가 10:15) 그들은 시편 62:7, 8에서 다윗이 한 이런 말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주저할지 모른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죄의식과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그들의 믿음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한 피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여호와의 왕국을 확고히 믿습니다. 하지만 결코 제가 그곳에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피해자가 다 그런 식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자한 아버지에게 이끌리듯 여호와께 이끌리며 그분께 조금도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상황이 어떠하든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라면 그런 학대가 자신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크게 가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꽤 심한 손상을 받은 것 같다면 용기를 내는 것이 좋다. 그런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a 여기서 논하는 것은 성서에서 포르네이아 즉 음행이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고린도 전 6:9; 비교 레위 18:6-22) 여기에는 온갖 형태의 부도덕한 성관계가 포함된다. 그 밖에 노출증, 관음증(觀淫症) 및 외설물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학대 행위가 포르네이아는 아니지만 역시 어린이에게 감정적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b 어린이는 어른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신뢰한 가족 성원, 손윗동기, 가족의 벗 혹은 심지어 낯선 사람이 가하는 학대는 신뢰를 냉혹하게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c 참조 본지 1991년 1월 1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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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될 때’깨어라!—1991 |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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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될 때’
앤은 다른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언제나 동정적으로 귀기울여 주었다.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위로해 주었다. 침착하고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그는 은밀한 감정적 상처가 있다는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였다. 앤은 이렇게 회상한다. “직장에 있었는데, 고통과 강한 수치심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은 여러 날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의붓아버지가 내게 외설 행위를 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더군요. 사실 그것은 겁탈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치료시킬 때”가 있다. (전도 3:3) 그리고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한—앤과 같은—많은 사람의 경우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 치료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성적 폭행과 같이 충격적인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린이에게는 참으로 아버지나 다른 힘센 어른이 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저항할 만한 힘이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달아날 수도 없다. 감히 소리지를 수도 없다. 그리고 감히 누구에게든 이야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학대자와 매일 마주쳐야 할지 모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계속 그렇게 거짓 꾸미기가 어른에게도 어려울진대 어린이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어린이는 어린이 특유의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정신적으로 탈출한다! 그는 성적 학대가 없었던 것으로 가장하면서 그것을 지워버리거나 그것에 대해 자신의 감각을 잃게 한다.
사실상 이따금 우리 모두는 보고 싶지 않거나 듣고 싶지 않은 것을 지워버린다. (비교 예레미야 5:21) 그러나 성적 학대의 피해자들은 그런 능력을 생존 수단으로 사용한다. 일부 피해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었으며, 나는 그저 구경한 것처럼 가장했어요.” “꿈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가장했지요.” “정신을 온통 수학 문제에 쏟았습니다.”—「상한 곳을 강하게」(Strong at the Broken Places), 린다 T. 샌퍼드 저.
그러므로 「어린이 성적 학대를 견뎌냄」(Surviving Child Sexual Abuse) 책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어린이 성적 학대를 견뎌낸 사람들 중 50퍼센트 정도가 그런 경험을 의식하지 않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학대 자체는 기억하지만 그와 관련된 감정—고통, 격분, 수치심—은 지워버릴지 모른다.
억압—정신 속의 씨름
그렇다면 그런 일을 묻어 두는 것이—피해자가 그것을 깨끗이 잊는 것이 가장 낫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겠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욥기 9:27, 28의 이러한 말과 같다. “온갖 슬픔을 잊고 낯빛을 고쳐 웃음을 지어 보리라고 마음 먹어도 몰려 오는 괴로움에 오히려 움츠러 들기만 합니다.” (「공동번역」) 무서운 것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지치게 하는 것, 건강상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맹렬한 씨름이다.
피해자는 나이가 들면서 생활의 압력으로 인해 흔히 과거를 억압하는 힘이 약해진다. 약간의 화장품 냄새만 맡아도, 낯익은 얼굴만 스쳐도, 놀라게 하는 소리만 들려도, 심지어 의사나 치과 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도 소름끼치는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날 수 있다.a 그저 잊기 위해 더 세차게 노력해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많은 피해자는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질이라는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은 일단 떠올리면 힘을 잃어요. 그것을 잠재 의식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은 퇴치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위험합니다.’
인정하는 것의 가치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는, 기억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슬퍼할 기회를 준다. 슬픔은 충격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전도 3:4; 7:1-3) 하지만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은 슬픔을 나타낼 기회를 박탈당해 왔고,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통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억압은 의사들이 충격 후 긴장 장애—사실상 감정 없이 멍한 상태—라고 부르는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비교 시 143:3, 4.
피해자는 기억이 되살아남에 따라 성적 학대를 다시 체험하는 셈이다. 그런 피해자들은 심지어 잠시 어렸을 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질은 이렇게 회상한다. “지난 일이 떠오를 때면 종종 몸에 증세가 나타납니다. 때로는 기억에 짓눌린 나머지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어린 시절의 격분이 이제 갑자기 솟구칠 수 있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우울해지고 화가 나요”하고 실라는 말한다. 그러나 그런 특이한 상황에서 분노는 합당한 것이다. 슬퍼하면서 억눌린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런 피해자는 자신에게 가해진 악한 행동을 미워할 권리가 있다.—로마 12:9.
성적 학대를 당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상기해 보니까 상당히 후련해지더군요. ··· 적어도 이제는 내가 무엇에 대처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상기하기가 어려웠지만, 그것은 실제로, 아주 알려지지 않았고 은밀하기 때문에 흉터가 된 내 삶의 일부를 돌려주었습니다.”—「순진 무구할 권리」(The Right to Innocence).
기억하는 것은 또한 피해자가 자신의 특정 문제의 원인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까닭 모를 자기 혐오와 분노가 깊숙이 자리잡았습니다”라고 근친 상간의 한 피해자는 말한다. 많은 사람의 경우, 기억하는 것은 일어난 일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은 피해자임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학대를 극적으로 혹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담가들은 학대로 인한 영향을 치료하기 위해 반드시 학대의 세부점을 모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단순히 학대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하는 데 중요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수 있다.—9면의 네모 안 참조.
지원을 얻음
아동기 성적 학대의 피해자는 기억을 더듬는 곤경을 홀로 헤쳐 나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털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비교 욥 10:1; 32:20)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일부 사람들은 자격 있는 의사, 상담가 혹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어떤 경우이든, 신뢰할 만한 벗, 배우자, 가족, 혹은 감정 이입을 하며 존중심을 가지고 잘 들어주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들 역시 가치 있는 지원자들이 될 수 있다.b 재닛은 이렇게 말한다. “절친한 벗 줄리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것을 수시로 털어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감정을 내가 느끼게 합니다. 그는 이해심 있게 귀기울이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은 누군가를 신뢰하기가 꺼려질 것이며, 자신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너무 수치심이 든 나머지 자신이 당한 학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참다운 벗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것”이며 기회가 주어지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데 가치 있는 도움을 충분히 줄 수 있다. (잠언 17:17, 「공동번역」) 그렇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을 것인지 잘 선택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염려 거리를 점진적으로 밝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벗이 동정심 있고 분별 있는 사람일 경우 그렇다면 좀더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잘 돌보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절도 있게 운동하는 것도 좋다. 건강에 좋은 식사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생활을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다. 울음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가실 것이다. 무력한 어린 시절에 당한 성적 학대를 거쳐 이제까지 살아왔음을, 잘 견뎌 왔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성인이 된 지금, 어렸을 때 가지지 못했던 도움의 근원과 힘이 있다. (비교 고린도 전 13:11)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기억과 맞서서 거뜬히 물리치자.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자.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죄의식과 수치심을 떨쳐 버림
자책을 끝내는 것은 회복하는 데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다. 피해자인 리바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내가 무고했다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를 저지하지 못했을까?’하고 의아해 합니다.”
그렇지만 학대자들이 매우 사악한 강요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권위(‘나는 네 아빠다!’), 위협(‘누설하면 죽일거야!’), 포학한 완력 및 죄의식(‘네가 고자질하면 아빠는 유치장에 가게 돼.’)마저 이용한다. 그와는 달리 어떤 학대자는 부드럽게 설득하거나 선물 및 호의를 베푼다. 일부 학대자들은 성행위를 오락이나 어버이의 애정인 양 오도한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 하는 거라고 그가 말하더군요”하고 한 피해자는 회상한다. 그런 감정적 협박과 속임수를 어린이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비교 에베소 4:14) 그렇다. 학대자는 어린이가 무력하고 나약하며 “악에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냉혹하게 악용한다.—고린도 전 14:20.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신이 어렸을 때 참으로 나약하고 무력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몇몇 어린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어렸을 때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지원을 해주는 벗들 역시 그런 성적 학대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을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여자는 “아버지가 나를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일으킨 감정을 기억할 때면 구역질이 나요”하고 말한다. 일부 피해자들(한 조사에 의하면 58퍼센트)은 외설 행위중에 경험한 성적 흥분을 기억한다. 그런 것이 그들에게 많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음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어린이 성적 학대를 견뎌냄」 책은 “신체적 흥분은 단순히 몸이 특정한 방법으로 접촉되거나 자극될 때 일어나는 자동 [반응]”이며, 어린이에게는 “그런 흥분에 대한 제어력이 전혀” 없음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발생한 것에 대한 온전한 책임은 오로지 학대자가 져야 한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를 “흠잡힐 데 없는 순진한”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을 아는 데서 위안을 얻는 것이 좋다. (빌립보 2:15, 「새번역」) 시간이 지나면 자멸적 행동에 빠지려는 어떤 충동이든 줄어들 것이며,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비교 에베소 5:29.
부모를 용납함
이것은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가장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일부 피해자들은 계속 분노, 복수심에 불타 있거나 혹은 죄의식에 젖어 있을 수 있다. 성적 학대를 당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저를 학대한 사람을 용서해 줄 것을 여호와께서 기대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울합니다. 저는 그럴 수 없거든요.” 그런가 하면 학대자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혹은 어머니가 그 학대 행위를 모른 체하거나, 학대 행위가 밝혀졌을 때 부인하거나 화를 냈다면, 어머니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어요”하고 한 여자는 씁쓸하게 회상한다.
학대를 당한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유대가 강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부모와의 모든 유대 관계를 끊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기꺼이 화해할 생각까지 할지 모른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피해자들은 때로 부모를 무조건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성적 학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원한에 사로잡히거나 두려움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일부 피해자들은 감정적 충돌을 피하는 길을 택하여 “심중에 말하고” 문제를 잊는 것으로 만족한다.—시 4:4.
하지만 부모에게 성적 학대의 증거를—직접 대면하여, 전화로, 편지로—제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자가 있을지 모른다. (비교 마태 18:15) 그런 사람이라면 벌어질 수 있는 감정적 풍파를 견딜 만큼 자신이 충분히 회복되었음을—혹은 적어도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음을—확신해야 한다. 언쟁을 벌여서는 별로 성과가 없기 때문에 확고하면서도 침착해야 한다. (잠언 29:11)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즉 (1) 일어난 일, (2)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3) 이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사과, 의료비, 행실 변화 등)를 이야기함으로써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 아무튼 문제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가실 줄 모르는 느낌을 쫓아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부모와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길을 열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성적 학대를 인정하면서 깊은 후회를 표현할지 모른다. 아버지는 어쩌면 알코올 중독을 치유하거나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변화하고자 진실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어머니 역시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지 모른다. 때로 온전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부모에 대해 여전히 사랑과 증오의 이중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고 부모와 속히 친밀한 관계로 접어들고 싶은 느낌이 없다고 해서 놀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합리적인 가족 관계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학대자와 직접 따질 경우, 학대자와 그 외의 가족이 부인하는 말이나 욕설을 퍼부을지 모른다. 더 심한 것으로 학대자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임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런 경우라면 용서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 것이며,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비교 시 139:21.
어떻든, 상한 감정이 누그러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종적인 공의로운 처벌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거듭 상기해야 할 것이다. (로마 12:19) 귀기울이는 지원자들에게 털어놓거나 심지어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 역시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분노를 극복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해를 입히는 감정이 더는 자신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지 않게 된다.—비교 시 119:133.
영적 회복
관련된 감정적, 영적 문제와 행동 문제를 다 논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각 피해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으로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원만히 회복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길 뿐이다. (로마 12:2, 「신세」)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적인 생각과 활동으로 가득 채우자.—빌립보 3:13; 4:8, 9.
예를 들어 성적 학대를 당한 많은 사람은 단지 시편을 읽는 것으로 많은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성서 원칙을 부지런히 적용하면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이 가면 부부 관계의 긴장도 해소될 것이다. (에베소 5:21-33) 파멸적인 행동도 사라질 수 있다. (고린도 전 6:9-11) 불건전한 성적 감정이 치료될 수 있다. (잠언 5:15-20; 고린도 전 7:1-5) 또한 대인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확고한 도덕적 경계를 세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빌립보 2:4; 데살로니가 전 4:11.
회복에는 진정한 결의와 최선의 노력이 필요함을 명심하자! 그러나 시편 126:5은 이렇게 보증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또한 참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시 34:18) 성적 학대를 당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잘 아시고 그분이 돌보신다는 것을—실제로 돌보신다는 것을—마침내 깨닫게 되자 드디어 내적 평화를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자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정신의 평화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베푸신다. 그분은 의로운 신세계를 약속하신다. 그곳에서 그분은 어렸을 때 겪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모두 일소하실 것이다. (계시 21:3, 4; 또한 이사야 65:17 참조) 이러한 희망은 온전한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게 지탱할 힘이 될 수 있다.
[각주]
a 일부 기억들은 정신 신체상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기억은 악귀 활동으로 오인될 수 있는 환각 형태—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듯한 소리, 현관문이나 창문 곁을 지나는 그림자 같은 형상, 잠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기억을 온전히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이 가신다.
b 성적으로 학대당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지식은 본지의 자매지인 「파수대」(영문) 1983년 10월 1일 호 27-31면 참조. 우리는 모든 회중 장로들이 그 호를 살펴보고 관련된 어떤 경우이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하는 바임.
[9면 네모]
회복하는 방법
◻ 학대를 기억하고 인정한다
◻ 학대를 슬퍼한다
◻ 귀기울이는 지원자에게 감정을 털어놓는다
◻ 죄의식과 수치심을 극복한다
◻ 부모를 용납한다
◻ 파멸적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성서 원칙을 적용한다
◻ 불건전한 성적 감정을 치료한다
◻ 건전한 개인적, 도덕적 경계를 발전시킨다
◻ 하나님 및 동료 그리스도인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킨다
[10면 네모]
지난 일을 풀어버림
일반적으로 기억은 몇 주, 몇 달, 몇 년을 두고 떠오르는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일시적인 위기를 가져온다. 「순진 무구할 권리」는 이렇게 말한다. 때로 “자신이 나쁜 행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더 깊고 더 고통스러운 감정과 의식을 직면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어온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일로서, 회복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개인의 관심사 전부가 될 수 있다.—잠언 18:14.
일부 피해자들은 다른 피해자들이 표현한 바를 읽거나 듣는 것이 유익함을 알게 되었다. 가족 사진과 어린 시절의 추억 거리를 살펴보는 것, 어릴 때 자란 곳을 방문해 보는 것, 지원을 해주는 벗들과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기억을 일깨워 줄 수 있다. 특히 효과적인 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일부 피해자들은 자신의 충격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간행물에 기고한다. 어떤 피해자들은 학대자를 수신으로 한 편지—보내지는 않음—에 자신의 감정을 모두 적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종종 더 많은 것을 기억나게 한다. 기도 역시 회복하는 데 강력한 도구다. 시편 필자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나를 시험하사 내 뜻[“근심”, 「공동번역」]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
[8면 삽화]
과거에 있었던 일에 과감히 맞서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는 것은 치료를 향한 진일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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