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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한 목소리깨어라!—1995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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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한 목소리
한 괴물이 50년 전에 살해되었습니다. 마침내 세계가 장막을 제치고서 쓰러진 제삼 제국을 목격하였을 때, 그 끔찍한 광경은 너무나도 악몽 같아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군인이나 민간인 할 것 없이 괴물과도 같은 살인 기계의 소름 끼치는 잔해를 침묵의 공포 가운데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금년 초에 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 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황폐한 수용소 터를 말 없이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그들은 그 범죄가 얼마나 엄청났었는지를 어떻게든 헤아려 보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거의 1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수용소 단 한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까! 그 때는 침묵의 시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성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질문들이 식어 버린 소각로에서, 텅 빈 막사에서, 그대로 쌓여 있는 빼앗긴 구두더미에서 자꾸 메아리 쳤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율합니다. 또 분개합니다.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 기간 중 수백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사실은 나치즘이 얼마나 괴물처럼 사악한 존재였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어떠하였습니까? 누가 감히 입을 열었습니까? 누가 잠자코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그 대량 학살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오십 년 전—어둠 속의 봉기」(Fifty Years Ago—Revolt Amid the Darkness)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1944년과 1945년에 연합국측에 의해서 해방을 맞은 살인 센터와 죽음의 수용소들에 관한 사진과 보도 필름은 그 충격적인 사실을 세상에 널리, 특히 서방 세계에 공개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가 설치되기도 전에 한 목소리가 「깰 때이다」 즉 독자가 손에 쥐고 있는 잡지를 통하여 나치즘의 위험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이 잡지는 처음에 「황금 시대」로 알려졌다가 1937년에는 「위안」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이 잡지들은 1929년부터 나치즘의 위험을 담대하게 경고함으로써, “사실과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잡지”라는 그 표지에 표명된 선언과 일치한 노선을 따랐습니다.
1939년에 「위안」지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독일에서처럼, 4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체포되고, 그 중 70명이 한 감옥에서 단 하룻밤에 처형되며, ··· 노인과 빈민, 무의탁자를 위한 모든 집과 시설과 병원이, 그리고 아동을 위한 모든 고아원이 파괴되는 나라의 공포에 대하여 어떻게 잠잠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떻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일반 세상이 독일과 그 점령국들로부터 조금씩 새어 나오는 가공할 보도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회의적이었던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치 정권의 잔인성을 직접 알았고, 과감히 입을 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면 사진 자료 제공]
U.S. National Archives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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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입을 열었던 이유깨어라!—1995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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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입을 열었던 이유
뒤돌아보건대, 여호와의 증인과 나치즘 즉 국민 사회주의 간의 충돌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치스가 성서에 기초를 둔 여호와의 증인의 세 가지 기본 신조와 대치되는 요구를 집요하게 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조는 이러합니다. (1) 여호와 하느님은 최고 주권자이시다. (2) 참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다. (3) 하느님께서는 그분께 죽기까지 충실함을 증명한 사람들을 부활시키신다.
성서에 기초를 둔 이러한 신조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스의 불경한 요구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용감하게 입을 열어 나치스의 악행의 실상을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히틀러 만세를 부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증인들은 구원을 하느님께 돌리며 그들의 생명을 그분께만 바쳤기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성서는 여호와에 대하여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라고 말합니다.—시 83:18.
사실상, “하일 히틀러” 즉 히틀러 만세에는 구원이 히틀러로 말미암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증인들은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동시에 어느 인간에게든지 그러한 인사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충절 및 충성과 함께 하느님께 속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히틀러의 부당한 요구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일에는 분명한 선례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예수의 제1세기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의 선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서를 보면, 확고한 입장을 나타내는 그들을 당국자들은 “매질하고, 더는 예수의 이름을 근거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느님께 도전하는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가르치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사도 5:29, 40-42.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한 번의 숭배 행위를 함으로써 사실상 카이사르 만세를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로마의 투기장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을지언정 하느님께 충실성을 증명하는 일이 영예이자 승리였습니다. 그것은 용맹스러운 군인이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죽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오직 하나의 정부 즉 하느님의 왕국만을 옹호하기 때문에, 그들을 반체제 인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사도들을 본받아서 “그들도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요한 17:16) 그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 때문에, 그들은 각자가 속한 인간 정부의 법에 복종합니다. 참으로 그들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는 면에서 모범적입니다. (로마 13:1) 결코 그들은 어느 인간 정부에 대한 반란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갖는, 사람에 대한 의무와 하느님에 대한 의무 사이에 있는 선입니다. 그들은 카이사르 즉 정부 당국에게는 카이사르에게 속한 것을, 하느님께는 하느님께 속한 것을 바칩니다. (마태 22:21) 누구라도 그들에게서 하느님께 속한 것을 강탈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것입니다.
증인이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실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24:15) 그러므로 증인들은 젊은 세 히브리인들이 고대 바빌론(바벨론)에서 나타낸 바와 동일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타는 노(爐)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 능히 건져 내시겠고 ···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7, 18.
그리하여, 앞서 언급하였듯이 히틀러가 자칭 신으로 자기 권좌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이념전(戰)이 불가피하게 된 것입니다. 칼을 뽑은 제삼 제국은 참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여호와께 충성을 맹세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자그마한 집단과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승부는 이미 결정이 나 있었습니다.
[5면 네모]
죽기까지 충실하다
볼프강 쿠세로브는 하느님께 충실을 유지하고 나치즘 지지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 중 하나였다. 1942년 3월 28일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그는 부모와 동기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이제 셋째 아들이며 형이며 동생인 저는 내일 아침이면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시 함께 만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다시 연합하게 될 그 때 우리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 떨어져 있는 지금, 우리 각자는 시험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네스 하름스는 그가 처형되기 직전인 1941년 1월 8일,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밤낮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편지에) 흠집이 있는 것은 수갑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영으로 아버지를 불러 봅니다. 제가 충실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것처럼 충실을 유지하시면, 우리는 서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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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악행을 폭로하다깨어라!—1995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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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악행을 폭로하다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부터 회복하려고 분투하던 192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은 엄청난 양의 성서 서적을 바쁘게 배부하고 있었습니다. 이 활동은 독일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부상하고 있는 군국주의 세력에 대한 경각심도 불러일으켰습니다. 1919년에서 1933년 사이, 증인들은 약 1500만에 달하는 각 독일 가정에 평균 여덟 부의 서적이나 소책자 또는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황금 시대」와 「위안」지는 독일에서 군국주의의 태동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기 3년 남짓 전인 1929년에, 독일판 「황금 시대」는 이처럼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국민 사회주의는 ··· 인간의 적인 마귀를 직접적으로 섬기는 ··· 활동을 하는 운동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 「황금 시대」 1933년 1월 4일 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국민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위협적인 절벽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작이 그처럼 미미하던, 정책이 그처럼 이단적이던 한 정당이 몇 년도 안 되어 국가 정부 구조를 무색하게 하는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국민 사회당(나치스)은 이처럼 희한한 일을 이루었다.”
이해를 촉구하는 호소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에 독일의 수상이 되고서, 두어 달 후인 1933년 4월 4일에 여호와의 증인의 마그데부르크 지부가 점유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1933년 4월 28일에 철회되고, 재산은 되돌려졌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입니까?
히틀러 정권이 분명한 적의를 나타냈는데도, 여호와의 증인은 1933년 6월 25일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약 7000명이 모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조직은 어떤 의미로도 정치와 무관하다. 우리는 다만 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그 일을 방해받지 않고 할 것임을 주장할 뿐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입장을 천명하고자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공격 개시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증인들의 충성에 더하여 그들의 움직일 수 없는 중립적 입장은 히틀러 정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스는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거부하는 여하한 것도 허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대회가 끝난 직후, 1933년 6월 28일에 나치스는 다시 마그데부르크의 지부를 점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증인의 집회를 해산하고 증인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증인들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을 습격당하고, 구타당하고, 체포당하였습니다. 1934년 초까지, 나치스는 증인들로부터 65톤의 성서 서적을 압수하여 마그데부르크 교외에서 소각하였습니다.
증인들의 결연한 입장
이러한 초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압제와 불공정을 공개적으로 규탄하였습니다. 「파수대」 1933년 11월 1일 호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는 특히 독일 증인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증가하는 압력에 직면하여 그들이 용기를 내도록 권면하였습니다.
1934년 2월 9일, 워치 타워 협회장 J. F. 러더퍼드는 히틀러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어 이렇게 천명하였습니다. “귀하는 어느 누구이든 인간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느님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임명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인은 귀하가 귀하의 정부의 모든 관리와 공복에게 지시하여,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평화롭게 모이며 방해받지 않고 하느님을 숭배하도록 허락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러더퍼드는 1934년 3월 24일을 그 시한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독일 증인들에 대한 제한 조처를 풀지 않는다면 박해 사실을 독일을 비롯하여 세계 전역에 공표할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치스는 러더퍼드의 요구에 가일층의 학대로 응답하여, 많은 여호와의 증인을 세운 지 얼마 안 되는 강제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 수용소의 처음 수감자들 가운데 속하게 되었습니다.
증인들이 나치의 잔학 행위를 폭로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입장을 밝힌 대로 독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잔학 행위를 폭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 전역의 증인들이 반복해서 히틀러 정부에 항의서를 등기로 우송하였습니다.
1934년 10월 7일,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회중은 히틀러 정부의 관리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낭독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은 직접적으로 충돌합니다. ··· 그러므로 본 서한은, 우리가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할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하여 함께 모일 것이며,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그분을 숭배하며 섬길 것임을 여러분에게 통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날, 다른 49개 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특별 대회에 모여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습니다. “귀하가 자행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학대는 전세계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하느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귀하와 귀하의 국민당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나치스는 거의 즉시 응답하여 박해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히틀러 자신이 이렇게 소리 쳤습니다. “이 일당을 독일에서 전멸시켜 버리겠다!” 그러나 반대가 거세짐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의 결의도 그만큼 굳어졌습니다.
1935년에 「황금 시대」는 나치 정권의 종교 재판소 같은 고문 방법과 그 첩보망을 폭로하였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대한 독일 청소년의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의 목표라는 사실도 폭로하였습니다. 이듬해, 전국적인 게슈타포(비밀 경찰) 운동이 벌어진 결과 수천 명의 증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1936년 12월 12일, 증인들은 증인식 운동으로 응답하여,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는 결의문 수만 장으로 독일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1937년 6월 20일, 아직 자유로웠던 증인들은 박해의 진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또 하나의 소식을 배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관리 이름, 일자와 장소까지 명기되어 있었습니다. 게슈타포는 이러한 폭로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증인들의 능력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증인들은, 독일 국민이 제삼 제국의 영광스러운 천년 통치에 대한 거창한 환상에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리고 경고를 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전체주의 정부가 ··· 사탄이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대용품으로 만들어 낸 것임을 인식하였다”고 1938년에 발행된 「사실을 보라」(Face the Facts) 소책자에서는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들도 나치의 1차 학대 목표에 속하면서, 유대인·폴란드인·신체 장애인 등에 대한 잔학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1938년 대회에서 채택된 “경고!”라는 결의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파시스트와 나치스는 급진적 정치 단체로서 여러 유럽 국가들을 부당하게 장악하였다. ··· 그 모든 국민들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할 것이며, 모두가 전제 독재자의 지배에 굴복을 강요당한 다음, 그 옛날의 종교 재판이 본격적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러더퍼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기적으로, 나치즘의 사탄적인 정체에 관한 강력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강연들은 세계 전역에 재방송되었으며, 인쇄되어 수백만 부씩 배부되었습니다. 1938년 10월 2일, 그는 “파시즘 혹은 자유”라는 연설에서 노골적인 표현을 써 가며 히틀러를 공박하였습니다.
“독일의 일반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러더퍼드는 선포하였습니다. “마귀는 자기의 대표자로 히틀러를 수하에 두었는데, 이 사람은 정신 이상자에다, 잔인하고 악의에 차 있으며 무자비합니다. ··· 그가 유대인을 박해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때 여호와의 계약 백성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적이 있는데다가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나치의 격분이 가일층 고조되자, 증인들의 질책도 한층 더 통렬해졌습니다. 「위안」지 1940년 5월 15일 호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너무나도 완벽한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에, 마치 잘 만들어 놓은 하수구를 통해 물이 나오듯 이러한 연설과 결정들이 그를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수용소의 공포를 폭로하다
비록 일반 대중은 대체적으로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1945년까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1930년대의 워치 타워 출판물에는 자주 실렸습니다. 예를 들면 1937년에 「위안」지는 다하우에서 있었던 독가스 실험에 대해 알렸습니다. 1940년까지 증인의 출판물에서는 20개 수용소의 이름을 밝히고 그러한 곳들의 가공할 실태를 보도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호와의 증인은 강제 수용소에 대하여 그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까? 제2차 세계 대전이 1939년에 시작할 당시, 이미 6000명이나 되는 증인들이 수용소와 감옥들에 수감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 역사가 데틀레프 가르베는 증인들이 그 당시 수용소 전체 수감 인원의 5 내지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합니다.!
증인과 유대인 대학살에 관한 세미나에서 가르베는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제삼 제국이 출범할 무렵 여호와의 증인임을 인정한 2만 5000명 가운데, 약 1만 명이 기간은 각기 다르지만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 2000명이 넘는 증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여호와의 증인이 모든 종교 단체 중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친위대에게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40년 6월에 「위안」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독일이 그 전격적 집중 공격을 개시했을 때 폴란드에는 35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며 ··· 서방 세계에 들어오는 소식이 정확하다면 그들의 멸절은 상당히 진행 중인 것 같다.” 1943년에 「위안」지는 “그리스인·세르비아인·폴란드인 등의 민족들 전체가 조직적으로 전멸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1946년까지 「황금 시대」와 「위안」지는 감옥 및 강제 수용소를 60개소나 밝혀 냈습니다.
증인에게 좌절당한 나치스
나치스는 워치 타워 출판물이 유포되는 것을 근절시키고자 애썼지만, 베를린의 한 관리는 이렇게 시인하였습니다. “독일 내에 성경 연구생들의 서적이 아직까지 인쇄되고 있는 비밀 장소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어느 것에도 이름이나 주소가 나와 있지 않고, 아무도 다른 증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게슈타포는 독일에서 그 어느 시기에도 전체 증인 수의 절반 이상을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밀한 나치 첩보망이 겪은 좌절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 작은 군대를 모두 잡아들이거나 잠잠케 할 수도 없었고, 서적이 유포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서적은 거리를 누비고 다녔으며, 심지어 강제 수용소의 가시 철조망까지도 침투하였습니다.
만행에 대한 승리
나치스는 인간의 의지를 말살하는 데 있어서 대가로 알려진 자들로서, 여호와의 증인마저 그리스도인 중립을 범하게 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비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옥의 이론과 실제」(The Theory and Practice of Hell)라는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친위대는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받은 도전을 결코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증인들은 하느님의 영의 후원을 받아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영국, 스태퍼드셔 대학교 총장인 역사가 크리스틴 킹은 그 투쟁의 양편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한쪽[나치스]은 거대하고 강력하며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존재. 또 한쪽[증인]은 너무나도 미미하고 ··· 믿음밖에는 아무 무기도 없는 존재 ··· 여호와의 증인은 사실상 그 막강한 게슈타포의 권력으로 하여금 그들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 영역 내에 있던 평화로운 소수 집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증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싸움을 벌여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하느님을 숭배할 권리를 위한 싸움,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싸움, 진리를 알리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9면 네모]
증인들이 수용소의 존재를 폭로하다
다하우, 부헨발트, 아우슈비츠, 작센하우젠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이었지만, 「황금 시대」와 「위안」지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수용소에서 비밀리에 빼내어 워치 타워 서적에 실은 여호와의 증인의 보도 내용은 제삼 제국의 살육 의도를 폭로하였다.
1933년에, 「황금 시대」는 독일에 강제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여러 보도 중 그 첫째 번 기사를 실었다. 1938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교와 싸우는 십자군」(Crusade Against Christianity)이라는 책을 독일어·폴란드어·프랑스어로 발행하였다. 그 책은 증인에 대한 나치의 악의적인 공격을 면밀한 자료로써 입증하면서 작센하우젠 및 에스테르베겐 강제 수용소의 도면을 실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박사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여러분의 책과 그 끔찍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더없이 격한 감정으로 읽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인간 격하와 잔인 무도의 기록을 숙독하면서 가슴에 솟구치는 증오와 혐오가 뒤섞인 감정을 필설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도덕적 무관심만 키울 뿐입니다. ··· 여러분은 이 책을 발행하여 이러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할 일을 하였습니다.”—사체로는 본지에서.
[10면 네모]
처음 수감자 가운데 증인들도 있었다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 드골의 조카딸인 주느비에브 드골 부인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지하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다. 그는 체포된 다음 1944년에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드골 부인은 스위스 각지에서 강연하면서 증인의 충절과 용기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였다. 1994년 5월 20일의 회견에서 그는 증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수용소의 처음 수감자 가운데 그들도 있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 우리는 그들을 구별시켜 주는 휘장으로 그들을 알아보았습니다. ··· 그들이 자기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어떤 종교 서적이든지 소지하는 것은 절대 금지였습니다. 특히 성서는 첫째로 꼽는 불온 서적이었습니다. 나는 [한 여호와의 증인]이 성구 서너 페이지를 소지했다가 처형당한 경우를 알고 있는데, 그 외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내가 그들에게 대단히 경탄한 바는 그들은 자기 신앙을 포기한다는 서명만 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참으로 약하고 수척해 보이던 그 여자들이 권한과 모든 수단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친위대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의지력이었습니다.”
[11면 네모]
수용소에서의 증인들의 행실
이웃—감방 동료, 막사 동료, 수용소 동료—에 대한 사랑에서 증인들은 영적 양식뿐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육적 양식도 무엇이든 나누어 주었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한 유대인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거기서 나는 성경 연구생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실로 아무 것도 그들이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재소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집단 학살 계획에 따라, 1938년 11월 10일 유대인이 수용소에 많이 들어왔을 때, 간수들의 호칭으로 ‘여호와의 돼지들’은 배급받은 자기 빵을 가지고 늙고 굶주린 유대인들을 찾아다녔는데, 정작 자기들은 심지어 나흘이나 먹을 것이 없이 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리히텐부르크 수용소에 수감된 한 유대인 여자도 증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자기들의 운명을 참을성 있게 견디었습니다. 비유대인 수감자들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들 여자들은 결코 이 규칙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네 집안 사람이라도 되는 듯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면서 우리가 견디어 나가도록 간절히 권하였습니다.”
[12면 네모]
유대인 대학살을 부인하려 들 것을 예측하다
「위안」지는 1945년 9월 26일 호에서, 장차 역사를 개조하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나치즘은 멸망되었는가?”라는 기사에 이렇게 나와 있다.
“선전 운동가들은 사람들의 기억이 오래 못 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의도는 과거의 역사를 말소하여, 이제 와서는 자기들을 혜택을 베푼 자로 위장하고 유죄 입증 기록은 은폐하는 것이다.”
그 잡지는 이처럼 앞을 내다보는 경고를 발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에서 싸우실 때까지 나치즘은 그 추한 모습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11면 도해]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이러한 강제 수용소 도면들이 1937년에 증인 출판물에 실렸다
[7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의 마그데부르크 지부에서 일한 150명의 봉사자, 1931년
[8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은 나치즘에 대한 교회의 협력을 폭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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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이 침묵을 지킨 이유깨어라!—1995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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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이 침묵을 지킨 이유
베일러 대학교의 프랭클린 리텔 박사는 1993년 12월 8일 미국 유대인 대학살 기념 박물관에서 고통스러운 “엄연한 사실”에 관하여 연설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리텔이 말한 그 사실이란, “600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스도교국의 한복판에서 공격 목표가 되어 조직적으로 살육당하였는데, 그 일을 자행한 세례받은 가톨릭교인, 프로테스탄트교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은 파문은커녕 질책을 받은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목소리가, 교직자들이 히틀러 정권에 개입한 사실을 꾸준히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 목소리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의 목소리였습니다.
히틀러는 세례받은 로마 가톨릭교인이었으며, 그의 정부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들은 파문당하지 않았습니까? 왜 가톨릭 교회는 그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던 끔찍한 일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역시 침묵을 지켰습니까?
교회들은 정말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전쟁에 쏟는 히틀러의 노력을 후원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가톨릭 교회의 역할
가톨릭 역사가 E. I. 왓킨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정하기가 괴롭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짓된 교화(教化)나 부정직한 충성을 꾀하기 위하여 주교들이 자국의 정부가 벌인 모든 전쟁을 끊임없이 후원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호전적인 국가주의가 대두될 경우, 그들은 카이사르의 대변자로 입을 벌려 왔다.”
왓킨은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이 “자국의 정부가 벌인 모든 전쟁을 끊임없이 후원해 왔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가 벌인 침략 전쟁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빈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이자 가톨릭교인인 프리드리히 헤어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독일 역사의 엄연한 사실로, 십자가와 스바스티카 간의 밀월이 시작되더니, 마침내 스바스티카가 독일 대성당들의 탑에서 나부껴 승전보를 알렸고 스바스티카 기(旗)가 제단 주위에까지 등장하였으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자, 교역자, 교직자, 정치가 들은 히틀러와의 제휴를 환영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히틀러가 벌인 전쟁들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인인 고르던 찬 교수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전쟁에서 복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교직자에게서 영적 지침과 지도를 기대했던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나치 통치자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대답을 들었다.”
가톨릭교인들이 그들의 교회 지도자들의 지시에 순종적으로 따랐다는 사실이 헤어 교수에 의해 고증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3200만 명의 독일 가톨릭교인 중에서—그 중 1550만 명은 남자인데—단지 일곱 [사람]만이 공개적으로 군 복무를 거부하였다. 이들 중 여섯 명은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좀더 최근의 증거를 보면, 그 외에도 가톨릭교인 몇 사람과 프로테스탄트교인 몇 사람이 종교적 확신 때문에 나치 국가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숨으로 값을 치르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제삼 제국에 몸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잠자코 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헤어 교수는 “히틀러와의 제휴를 환영”한 자들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도 포함시켰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많은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히틀러의 침략 전쟁 기간에 침묵을 유지한 일에 대한 자책으로 괴로워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1945년 10월에 11명의 지도급 교직자들이 모여 소위 슈투트가르트 유죄 자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좀더 용감하게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지 못한 것을, 좀더 충실하게 기도를 올리지 못한 것을, 좀더 기쁘게 믿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좀더 열렬하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바이다.”
폴 존슨의 「그리스도교사」에는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복음주의 교회 교역자 1만 7000명 가운데 [나치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한] 장기 복역수가 50명을 넘은 적이 그 어느 시기에도 없었다.” 그러한 교역자들을 여호와의 증인과 대조하면서 존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그들은 시초부터 명명백백한 교리적 반대 입장을 천명하였고 그에 따른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들은 나치 국가에 대한 여하한 협력도 거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39년으로 돌아가서, 「위안」지는 프로테스탄트 교역자인 T. 브루파허의 이러한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시험에서 실패하고 있을 때, 알려지지 않은 이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인 순교자로서 양심을 억압하는 일과 이교적 우상 숭배에 맞서서 흔들림 없는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미래의 역사가는 언젠가, 큰 교회들이 아니라 비방과 조소를 당하던 이들이 마귀 같은 나치의 광란에 처음으로 대항한 사람들이었음을 틀림없이 인정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은 히틀러 숭배와 스바스티카 경배를 거부하였다.”
마찬가지로, 마르틴 니묄러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자로서,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진실로 회고하건대, 그리스도 교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전쟁과 무기와 군대를 축복하는 일에 동의하였으며, 적을 멸절시키게 해 달라고 매우 비그리스도인적인 방법으로 기도하였다.” 그는 이렇게 시인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잘못이며 우리 조상 잘못이지, 절대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다.”
니묄러는 그 다음에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소위 진지한 성서학자들이라는 분파[여호와의 증인]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인간에게 총을 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 수백 수천 명씩 수감되었던 것이다.”
유대학 교수인 수재너 헤셸은 루터교 교직자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려고 했다는, 아니 간절히 지지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교회 문서를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스바스티카를 그들의 교회에 게양하는 특권을 간청하였다고 이 여교수는 말하였습니다. 절대 다수의 교직자는 강압에 의해 협력한 자들이 아니라, 히틀러와 그의 아리아 인종에 대한 이상을 열광적으로 지지한 자들이었음이 그의 연구 결과 밝혀졌습니다.
강의 도중, 헤셸은 교회 성원들에게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답변입니다.
그들이 잠잠했던 이유
교회들이 잠잠했던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그들의 양 무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버리고 국가를 지지하는 쪽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1933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나치스와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추기경 파울하버는 히틀러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금번 교황권과의 악수는 ··· 무한한 축복의 성과입니다. ··· 제국의 총통[히틀러]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실로 가톨릭 교회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지만 사악한 히틀러 정부의 시녀로 전락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참 제자들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들과 그들의 교구민들은 히틀러의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요한 17:16) 그 결과 그들은 나치스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지른,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행위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등 여러 종교에 속한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나치 국가에 맞서서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자기 목숨으로 값을 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제삼 제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과감히 입을 연 한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보도 매체는 대체적으로, 교회들이 나치 드라마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눈감아 주었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교직자들의 배신과 위선을 그 막후 결탁의 소상한 내막과 함께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본지의 전신을 비롯한 출판물의 지면에서, 증인들은 나치스의 시녀로 전락한 종교 조직의 죄상을 지면을 통하여 강력히 고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추종자들을 식별함
여호와의 증인은 세상의 종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일부가 아닌 그들은 국가들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었습니다. (이사야 2:4)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서로를 사랑합니다. (요한 13:35) 이것은 그들이 결코 전쟁에 나가 고의적으로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참 숭배자들을 식별하는 문제에 관해서 성서는 명명백백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이 사실로 분명해집니다. 곧 의를 계속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에게서 나온 사람이 아니며,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인과 같이 되지 마십시오. 그는 악한 자에게서 나와 자기 형제를 죽였습니다.”—요한 첫째 3:10-12.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극심한 압력을 받을 때에도 언제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왔음을 역사는 밝혀 줍니다. 히틀러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증인들은 자신들을 살육의 난장판에 끌어들이려는 나치스의 잔인한 시도에 직면하여 결연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크리스틴 킹 교수는 그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과감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던져 줍니다.”
이 세상이 안전하게 여호와의 정부의 사랑에 찬 통치 아래 들어가 전쟁과 악이 없어질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해서 과감히 입을 열 것입니다. 지존하신 주 여호와의 뜻이 그러한 한, 본지는 이 사탄의 세상의 악을 폭로하며 인류의 유일한 참다운 희망인 하느님의 왕국을 예고할 것입니다.—마태 6:9, 10.
[13면 삽화]
미국 언론이 나치즘에 대한 교회의 지지를 입증하였다
「뉴욕 포스트」 1940년 8월 27일자 최종판 15면
「뉴욕 타임스」 1939년 9월 25일자 시내판 석간 6면
「뉴욕 타임스」 1941년 12월 7일자 시내판 석간 33면
[15면 삽화]
교회들과는 달리,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즘에 대하여 과감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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