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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96 2/22 19-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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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구리의 자식
  • 깨어라!—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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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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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6 2/22 19-24면

개구리의 자식

“개구리의 자식은 개구리.”

이 일본 속담은 자식이 크면 부모와 똑같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게이샤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게이샤—일본의 기생—집에서 자랐습니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부터 가장 비싼 기모노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들에 둘러싸여 지냈습니다. 좀더 자라자, 나도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1928년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여섯째 달 제 육 일에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666이라는 숫자는 성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일본의 전통 예술—춤, 노래, 악기 연주, 다도 등—을 배웠습니다.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 입고 교습을 받으러 갔습니다. 거기서 학교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는 모두 게이샤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바쁘게 보낸 시절이었고, 즐겁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인 그 당시에는 의무 교육이 12세에 끝났기 때문에, 나는 바로 그 때부터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애송이 게이샤로서 나는 소매가 거의 발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기모노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일하러 나갔을 때는 우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게이샤로서의 나의 일

내가 하는 일에는 여흥을 제공하고 시중을 드는 것이 기본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부유한 남자들은 고급 음식점에서 만찬 연회를 계획할 때 게이샤 집에 전화를 걸어 접대를 해줄 게이샤를 몇 명 보내 달라고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게이샤에게 기대되는 것은, 그 날 저녁 흥을 돋우어 모든 손님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며 만족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각 손님이 원하는 것을 예상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하였습니다. 심지어 손님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기도 전에 그렇게 해야 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려운 일은, 즉흥적인 요청에 응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춤이 보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춤을 추었습니다. 음악을 듣고 싶어하면 악기를 가지고 나와서 요청하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어떤 종류의 노래든 요청하는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흔히들, 모든 게이샤를 돈을 많이 주어야 하는 고급 매춘부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계 유지를 위해 몸을 파는 게이샤가 있기는 하지만, 게이샤가 그런 일까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압니다. 게이샤는 예능인으로서, 재능이 뛰어날 경우 그 기예 때문에 일과 값비싼 선물과 손님이 주는 푸짐한 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일류 게이샤가 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게이샤는 일본의 전통 예술 중 단 한 가지 분야에만 전문가가 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예술 중 일곱 가지 분야의 자격증을 땄는데, 그 중에는 일본 춤, 꽃꽂이, 다도, 다이코로 알려진 일본식 북, 현이 세 개인 샤미센으로 연주하는 세 가지 형태의 음악과 관련된 자격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격증이 없었다면 아마 나도 생계 유지를 위해 손님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 주어야 한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는 여자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게이샤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자들은 돈을 빌려서 교습 비용과 기모노 비용을 댔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족들에 의해 게이샤 집에 팔려간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액수의 돈을 지불한 주인은 이 여자들에게 갚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게이샤들은 대단히 불리하였는데, 훈련도 늦게 시작한 데다가 많은 빚을 지고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게이샤들 중에는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부도덕에 의존하거나 어쩔 수 없이 부도덕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스포츠, 연예, 사업, 정치계의 유명 인사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내 고객 가운데는 각료와 수상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를 존중해 주었고, 내가 한 수고에 대해 감사를 나타냈습니다. 나는 요청받지 않는 한 일반적인 대화에는 끼어 들지 않았는데, 이따금 내 의견을 물어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최신 뉴스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내가 접대를 한 연회들은 흔히 협상을 위해 열렸으므로, 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였고 들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

1941년 어느 날, 내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 음식점에 불려가 보니 두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의 친어머니라고 밝히며 나를 집에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여자는 게이샤를 고용해서 쓰는 사람이었는데, 내게 일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내가 양어머니보다는 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를 길러 준 어머니가 나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진 나는 집으로 달려가, 있었던 일에 대해 양어머니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양어머니는 언제나 감정을 잘 제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때만큼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양어머니는, 내가 한 살 때 게이샤 집에 넘겨졌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알려 주고 싶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을 듣고 나니 사람들에 대한 나의 신뢰가 모두 무너져 내렸으며, 나는 내성적이 되었고 말수도 적어졌습니다.

나는 친어머니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친어머니는 내가 성공한 것을 알고 자기를 부양하기 위해 일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친어머니 친구의 사업 장소로 볼 때 거기서 일하게 되면 부도덕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놓고 싶은 것은, 나의 예술적 재능이지 나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양어머니에 대해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양어머니는 내가 항상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양어머니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어머니가 신중하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내가 일할 곳을 택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순전히 부도덕한 목적으로 게이샤의 접대를 요구하는 남자들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오늘날까지도 양어머니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양어머니는 나에게 행동 원칙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양어머니가 강조한 한 가지 원칙은, 내가 예라고 하는 말은 예를 의미해야 하고 아니오라고 하는 말은 아니오를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어머니는 또한 책임을 받아들일 줄 알고 자신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양어머니가 가르쳐 준 원칙을 따른 덕분에 나는 내 일에서 성공하였습니다. 내가 과연 친어머니에게서도 그러한 도움을 받았을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매우 험난한 삶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은 아마 입양된 덕분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 매우 잘된 일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전시에 태어난 아들

나는 1943년에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전통 문화에 따라 나는 그릇되거나 부끄러운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내 삶과 일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945년에 도쿄에 폭격이 무척 심해서 나는 아들을 데리고 그 도시에서 피난해 나와야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아들은 몹시 아팠습니다. 사람들이 기차역으로 몰려들어 대단히 혼란스러웠지만, 우리는 어쨌든 북쪽 후쿠시마로 가는 기차를 용케 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날 밤 그 곳에 있는 여인숙에 묵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병원에 가보지도 못한 채 영양 실조와 탈수로 죽었습니다.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나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여인숙에서 난방을 관리하는 사람이 목욕물을 데울 때 쓰는 불로 아들의 시체를 화장하였습니다.

그 후 곧 전쟁이 끝나자 나는 도쿄로 돌아왔습니다. 그 도시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내 집과 모든 소유물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나는 한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의 기모노를 빌려 주어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 외곽으로 피신했던 양어머니가 나에게 돈을 보내 달라고 그리고 도쿄에 자기 집을 지어 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한 요구를 들으니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외롭게 느껴졌습니다. 아들에 대한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양어머니는 내 아이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양어머니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의무

전통을 통해 배운 바에 따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부모와 조상들 덕택이며, 따라서 두말 없이 부모에게 복종하고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를 돌보아 드림으로써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입니다. 그래서 내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어머니의 요구는 지나쳤습니다. 양어머니는 자기가 입양한, 자기 오라버니의 두 자녀까지 내가 부양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열아홉 살 때까지 그들을 나의 친형제요 친자매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게이샤는 결코 결혼을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식을 갖는 일을 피하였습니다. 그들은 흔히 가난한 집안의 딸들을 아기 때 입양해서, 순전히 노년에 재정적 지원을 받아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을 게이샤로 훈련시켰습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그 모든 돌봄과 훈련을 받은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돌봄과 훈련은 단지 미래에 재정적 안전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양어머니뿐 아니라 건강하고 일할 능력이 있는 내 “형제”와 “자매”까지 부양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모든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세 사람을 부양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습니다. 마침내 1954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날 침상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나에게 정식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도리를 다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한 번의 인정과 고마움의 표시로 수년간에 걸친 나의 노고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내 책임을 완수하였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느껴지면 눈물을 짓곤 합니다.

내 딸을 양육함

1947년, 딸아이의 어머니가 된 나는 그 아이를 위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밤 일하러 나갔습니다. 나는 또한 긴자에 있는 가부키자와 같은 일본의 주요 극장의 무대에서 공연하는 일도 시작하였습니다. 이 일 역시 수입이 좋았습니다.

춤을 추든 샤미센을 연주하든, 나는 언제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게이샤들이 단지 꿈속에서나 이루었을 만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결혼을 했더라면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겠지만, 게이샤 생활과 결혼은 병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어린 딸 아이코였으며, 나의 삶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게이샤는, 사생아든 입양아든, 자기 딸도 같은 일을 하도록 훈련시킵니다. 나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지만, 후에 내가 내 딸에게 어떠한 삶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된다면, 대대로 진정한 가정을 갖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연쇄 고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아이코는 물론이고 아이코에게서 태어날 아이들도 결혼 생활과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이 개구리의 자식이 개구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이코가 십대에 접어들자 다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집안에서 아이코의 동무들이라고는 내가 고용한 아가씨들이 전부였습니다. 아이코는 나의 시간과 주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30대 중반으로서 경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지만, 나는 게이샤의 세계를 떠나 춤추는 일과 샤미센을 연주하는 일만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이코를 위해 그만둔 것입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이코는 이내 명랑해졌습니다. 아이코에게 시간을 바쳤더니 놀라운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조용한 주거 지역으로 이사했고, 나는 거기서 찻집을 열었습니다. 아이코가 자라서 기미히로라는 좋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사위는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이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종교가 문제가 되다

1968년, 아이코가 첫 손자를 낳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이코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로 인해 놀랐습니다. 어머니—양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우리 집에 커다란 불교 제단을 설치해 놓고, 정기적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숭배하였습니다. 또한, 매달 가족 묘지를 찾아가 어머니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조상 숭배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조상을 돌보고 조상에게 감사를 나타내는 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아이코도 같은 일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코가 더 이상 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또한 내가 죽은 후에도 나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아이를 낳았을까 그리고 저 애가 어쩌다가 조상에 대해 그렇게 배은망덕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에 빠지게 되었을까?’ 하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 후 3년 동안은 먹구름이 나를 덮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코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 침례를 받았을 때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딸이 침례받는 장소에 어머니인 내가 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란 아이코의 증인 친구가 아이코에게 나를 방문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화가 났지만, 단지 올바른 예절이 내 몸에 단단히 배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코의 증인 친구가 왔을 때 반갑게 맞아들였습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그가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을 때에도 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문이 여러 주일 계속되자 감정이 몹시 격해져서, 처음에는 그의 말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오가면서 나는 점차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곧잘 했던 말을 상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사후에도 숭배받기를 원하였지만 사후 생명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모가 가장 원하는 것은 부모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자녀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하곤 하였습니다. 전도서 9:5, 10이나 에베소 6:1, 2과 같은 성구들을 읽고 성서에서도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권유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들이 성서에 들어 있었는데, 이를테면 내가 예라고 하는 말은 예를 의미해야 하고 아니오라고 하는 말은 아니오를 의미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마태 5:37) 성서가 그 외에도 어떠한 것들을 가르치는지 궁금하였으므로 나는 정기적인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습니다.

성서 지식이 증가해 감에 따라, 내가 살아오면서 거의 언제나 느끼던 슬픔과 좌절감이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곳은 다른 세계였습니다. 사람들이 진실하고 친절하고 우호적이었으며, 내 마음도 이끌렸습니다. 특히 나는 여호와의 자비에 대해 배우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사랑에 찬 마음으로, 회개하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시고 내가 새로운 삶을 즐기도록 도와 주려고 하십니다!

내 인생의 변화

나는 여호와를 섬기고 싶었지만, 연예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당시 50대였지만, 여전히 무대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치카와 단주로가 가부키자에서 수케로쿠 공연을 할 때, 나는 수석 연주자로서 샤미센 연주자들을 조직하는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케로쿠 공연에 필요한 가토우부시식 반주를 할 수 있는 샤미센 연주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내가 그만두면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연로한 증인이, 그 자신도 일본의 전통적인 형태의 연예 활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나에게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비성경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를 섬기면서 공연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음을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나는 얼마 동안 일본 최고의 극장인 가부키자에서 계속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있는 날 밤에 공연이 열리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런 날 밤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 써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집회 시간이 변경되었고, 나는 일과 집회 참석을 둘 다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회에 제시간에 가기 위해, 공연이 끝난 후 관례적으로 다른 연주자들과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즉시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황급히 잡아 타야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만두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일본의 주요 도시들에서 6개월간 연속 공연을 하기 위해 이미 꽤 오랫동안 연습을 해 왔습니다.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말썽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중은 밝히지 않은 채 내 후계자가 될 사람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연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관련된 각 사람에게 내 책임을 다하였으므로 그만두겠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내가 자만에 빠져 고의로 자기들을 골탕먹이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쉽지 않은 시기였지만, 내 결정에 고착하여 40년간의 공연 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샤미센을 지도해 왔으며, 이것으로 약간의 수입을 얻고 있습니다.

헌신에 따라 생활함

이러한 일이 있기 몇 년 전, 나는 여호와 하느님께 헌신하였고 1980년 8월 16일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성서 요한 4:7-42에 언급되어 있는 사마리아 여자와 다소 비슷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회개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께서 친절하게도 나에게 길을 보여 주셨고, 나는 그분의 자비 덕택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사무엘 상 16:7.

1990년 3월, 내 나이 예순여덟 살이 다 되었을 때 나는 파이오니아가 되었는데, 파이오니아란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아이코도 파이오니아이며, 아이코의 세 자녀도 그러합니다. 손자녀들은 “개구리의 자식은 개구리”라는 일본 속담과 일치하게, 자라서 자기 어머니처럼 되었습니다. 아이코의 남편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이 모두 진리 안에서 걷고 있고, 또 회중에 가면 사랑에 찬 영적 형제 자매들이 있으니 나는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조상들에게도 감사하지만, 나를 위해 어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신 여호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영원무궁토록 그분을 찬양하고 싶도록 나에게 감동을 주는 그분의 풍성한 자비와 위로에 대해 감사합니다.—다카하시 사와코의 체험담.

[19면 삽화]

여덟 살 때 연습하던 모습

[20면 삽화]

양어머니와 함께

[21면 삽화]

딸은 내 생애의 자랑이었다

[23면 삽화]

나는 이 가족 제단 앞에서 어머니를 숭배하였다

[24면 삽화]

딸과 사위, 손자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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