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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메리카 원주민—한 시대의 마감
    깨어라!—1996 | 9월 8일
    • 아메리카 원주민—한 시대의 마감

      카우보이와 인디언이 등장해 서로 싸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세계 사람들은 와이어트 어프, 버펄로 빌, 론 레인저, 그리고 인디언으로서 제로니모, 시팅 불, 크레이지 호스, 추장 조지프와 같은 사람, 그 밖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묘사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인디언에 대한 그들의 묘사는 얼마나 공정하였습니까?

      유럽 사람들이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정복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a 역사 서적들은 인디언을 공평하게 취급해 왔습니까? 탐욕, 압제, 인종 차별, 잔학 행위 등에 대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까? 소위 카우보이와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의 진상은 무엇입니까?

      커스터의 최후의 저항과 운디드니에서의 대학살

      1876년, 라코타족(수족[族]의 세 주요 파벌 중의 하나)의 주술사 시팅 불은 몬태나 주에서 벌어진 그 유명한 리틀빅혼 강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650명의 군인을 이끌고 온 “장발”의 커스터 중령은 1000명의 수족 및 샤이엔족 전사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착오였습니다. 커스터는 아마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소집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사 집단—약 3000명—과 대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커스터는 그가 지휘하는 제7기병 연대를 3개 대대로 나누었습니다. 커스터가 지휘하는 대대는 다른 2개 대대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인디언 진영 가운데 취약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공격하였습니다. 크레이지 호스, 골, 시팅 불과 같은 추장의 지휘를 받은 인디언들은 커스터와 그의 대대에 속한 약 225명의 군인을 전멸시켰습니다. 이것은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일시적인 승리였지만, 미 육군에게는 쓰디쓴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14년 후에는 끔찍한 복수전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시팅 불은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동안 다코타 지방의 랜덜 요새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노년에는 버펄로 빌의 순회하던 서부 쇼에 등장해 대중 앞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때 이름을 날렸던 지도자에게서 과거의 영향력 있는 주술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90년, 시팅 불(라코타족 이름은 타탕카 이요타케)은 그를 체포하도록 파견된 인디언 경찰관들에 의해 총살당하였습니다. 그의 살해자들은 수족의 “메틀 브레스트”(경찰 배지를 단 자)인 불 헤드 경위와 레드 토마호크 경사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백인의 지배에 대한 인디언의 저항은 마침내 미국의 대초원 지대에 있는 운디드니 지류에서의 대학살로 완전히 분쇄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도피 중이던 약 320명의 수족 남녀와 아이들이 연방 정부군과 그들의 호치키스 속사포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동료 커스터와 그의 부대원들이 리틀빅혼 강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에서 학살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침범해 들어오는 미 대륙 이주자들과 포위되어 가는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200여 년간 산발적으로 벌어져 온 전쟁과 사소한 전투들이 종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카 원주민은 처음에 어떻게 북미 대륙에 정착하게 되었습니까? 백인이 북미 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 전에 그들은 어떤 생활 방식을 영위하고 있었습니까?b 그들이 마침내 패배하고 굴복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초기의 유럽 출신 이주자의 후손들이 지금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인디언의 현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포함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지는 기사들에서 논의될 것입니다.

      [각주]

      a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많은 자료에서는 “인디언”이라는 말도 여전히 흔하게 사용된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번갈아 가며 사용할 것이다. “인디언”은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에게 잘못 붙인 이름이다. 그는 지금 서인도 제도로 알려진 곳에 상륙하였을 때 자기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였다.

      b 이번 기사들에서는 단지 북미 대륙의 인디언에 대해서만 다룬다.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아스텍족, 마야족, 잉카족, 올멕족 등—에 대해서는 본지의 앞으로 나올 호들에서 고려할 것이다.

      [3면 삽화]

      운디드니에서 사망자를 매장하다

      [자료 제공]

      Montana Historical Society

  •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깨어라!—1996 | 9월 8일
    •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콜럼버스가 오기 전에 우리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하였는가? ·⁠·⁠· 각 부족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제각기 우리 자신을 일컫던 말—그 말을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도—을 번역해 보면, 언제나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우리 언어[나라간세트어]로는 니누그 즉 사람들이요, [나바호어로는 디네] 즉 인간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컫던 말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청교도들이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아우오나게수크 즉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고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들이었다.”—톨 오크, 나라간세트족.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설이 있습니다.a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펜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은 인디언이 히브리인이며 소위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의 후손이라고 믿었는데, 모르몬교의 창설자인 조지프 스미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설명은, 아시아의 부족들이 두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를 통해서 혹은 배를 타고 현재의 알래스카와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입니다. DNA 검사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그 기원과 신앙

      아메리카 원주민 편집자들인 톰 힐(세네카족)과 그의 연장자인 리처드 힐(투스카로라족)은 그들의 공저 「창조물의 내력—아메리카 원주민의 근원과 신앙」(Creation’s Journey—Native American Identity and Belief)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대부분의 원주민 부족들은 자기들이 바로 이 땅의 흙이나 물로부터 또는 별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고고학자들은 베링 해협을 연결하는 거대한 육로가 있어서 아시아인들이 그 육로를 통해 아메리카의 두 대륙으로 이주해 왔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 이론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 아시아인들이 서반구 원주민 부족들의 조상이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은 백인의 베링 해협 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설과 설화를 더 믿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탐험자가 아니라 원거주자라고 생각합니다.

      러셀 프리드먼은 자기의 저서 「인디언의 겨울」(An Indian Winter)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만단족[미주리 강 상류 근처에 살던 부족]의 신앙에 의하면, 첫 인간은 강력한 영, 즉 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먼 옛날에 생명의 주, 즉 만물의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어, 보통 인간들과 우주에 거하는 수없이 많은 신들 즉 영들 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만단족의 신앙에는 심지어 이러한 홍수 전설도 들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대홍수가 전세계를 휩쓸었을 때, 첫 인간은 사람들에게 홍수의 물 위로 높이 솟을 만한 보호탑 즉 ‘방주’를 짓도록 가르쳐 그들을 구하였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만단족의 모든 마을에는 그 신화적인 탑의 축소된 모사품—판자 울타리에 둘러싸인 약 1.5미터 높이의 삼나무 기둥—이 있었다.”

      또한 만단족의 종교적 상징물로 “높은 기둥”이 있었습니다. 이 기둥은 “깃털과 모피로 둘러싸였으며 꼭대기에는 소름끼치는 검게 칠한 나무로 만든 머리가 얹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상징하였습니까? “이 형상은 오흐키-하다, 즉 인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생명의 주나 첫 인간만큼 강력하지는 못한 악한 영을 상징”하였습니다. 대초원 지대의 평원 인디언에게 있어서, “영계에 대한 신앙은 분명히 일상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 인간사를 지배하는 신성한 존재들의 도움과 승인을 먼저 구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고, 어떠한 계획을 착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존 비어호스트는 「북아메리카 신화」(The Mythology of North America)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씨족들이 있기 전에 오세이지족은 가니타(무법 혹은 무질서)라고 알려진 상태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 초기 시절에 작은 노인들이라고 불리는 특정 사상가들이 ·⁠·⁠· 조용하고 창조적인 힘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서 별과 달과 해가 완벽한 질서 가운데 운행되도록 해준다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 사상가들은 그 힘을 와콘다(신비스러운 힘) 혹은 에아와우오나카(우리를 존재하게 해준 것)라고 불렀다.” 서부에 살고 있는 주니족, 수족, 라코타족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네바고족에게도 “땅을 만든 자”와 관련된 창조 신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빛이 있기를 바라자 빛이 있게 되었다. ·⁠·⁠· 그리고 그가 다시 생각하고 땅이 있기를 바라자 이 땅이 존재하게 되었다.”

      성서 연구생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앙과 성서에 표현되어 있는 가르침 사이에 얼마의 유사점이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대단히 흥미를 느낍니다. 특히 “그는 되게 하시다”라는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의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위대한 영, 즉 “우리를 존재하게 해준 것”과 관련하여 그렇습니다. 다른 유사점들 가운데에는 홍수 그리고 성서에서 사탄으로 알려져 있는 악한 영이 있습니다.—창세 1:1-5; 6:17; 계시 12:9.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을 이해함

      아메리카 원주민 저술가 톰 힐과 리처드 힐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다섯 가지 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 번째 선물은 ·⁠·⁠· 땅에 대한 우리의 깊은 애착이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과 후의 그들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누가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들이 종종 신성시하던 그 땅을 힘과 책략에 의해 또는 조약 위반에 의해 계획적으로 빼앗겼습니다.

      “두 번째 선물은 동물들이 우리 부족과 공유하고 있는 힘과 영이다.” 동물들에 대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중심은 여러 가지 면에서 증명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단지 의식주를 위해서만 사냥을 하였습니다. 들소를 거의 전멸시킨 자들은 원주민 부족들이 아니라 피에 굶주림과 근시안적 탐욕을 나타낸 백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살아 있는 친족이자, 우리가 만든 형상을 통해 우리와 교통하는 정령들이다.” 이것은 전세계 수많은 종교의 공통 주제 즉 어떤 영이나 영혼이 사후에 생존한다는 것입니다.b

      “네 번째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식인데, 이것은 우리의 부족 전통을 통해 표현되고 유지된다.” 오늘날 이 점은, 사람들이 모여 부족의 일을 논의할 기회가 되는 부족 의식에서 또는 부족적으로 춤과 음악을 즐기는 사교 모임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인디언 의상, 장단이 잘 맞는 북 소리, 춤, 가족과 씨족의 재회—이 모든 것이 부족의 전통을 잘 보여 줍니다.

      “마지막 선물은 창의력이다—자연 물질을 신앙과 자부심이 깃들인 물건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신앙은 현실적인 것이 된다.” 바구니 만들기, 옷감 짜기, 도기 만들고 칠하기, 보석이나 장신구 만들기 기타 어떤 창의적인 활동이든 그것은 그들의 오랜 전통과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부족이 하도 많아 그 모든 부족의 전통 신앙과 관습을 설명하려면 수많은 책을 펴 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은, ‘필시 많은 수가 그리스도인이었을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쇄도함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각주]

      a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표현에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부족들도 포함됨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온 초기 이주자들이 캐나다 북서쪽을 경유해 더 따뜻한 기후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믿고 있다.

      b 성서는 불멸의 영혼이나 영이 사후에 생존한다는 신앙을 지지하지 않는다. (참조 창세 2:7; 에스겔 18:4, 20) 이 제목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책 52-7, 75면 및 이 책의 제목 색인 “영혼불멸 신앙” 제하의 내용 참조. 이 책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것임.

  • 그들의 세계가 사라진 경위
    깨어라!—1996 | 9월 8일
    • 그들의 세계가 사라진 경위

      여러 해 동안 미국에 관한 이야기는 “서부를 획득한 경위”라는 표현으로 압축되었습니다.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미국의 초원과 산들을 가로질러 이주하는 백인 개척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사납고 야만적이며 도끼를 휘두르는 인디언들과 싸우는 존 웨인과 같은 군인들, 카우보이들, 개척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백인이 땅과 금을 찾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교국의 일부 사제들과 전파자들은 영혼을 구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원거주자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역사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유럽인이 도착하면서 인디언은 “그들이 일찍이 마주쳤던 그 어느 포식 동물보다도 더 탐욕스러운 자들, 즉 유럽의 침입자들이 자기들의 환경 속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아메리카 원주민—도해 역사」(The Native Americans—An Illustrated History) 책에서는 기술합니다.

      화합이 분쟁으로 끝남

      아메리카 북동쪽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 중 다수는 처음에는 원주민으로부터 친절하고 협조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한 기록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파우하탄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세계 최초의 영국인 영구 식민지인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의 영국인 부락은 1607년과 1608년 사이에 처음으로 맞이한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의 청교도 식민지도 왐파노아그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지 모른다.” 일부 원주민은 이주민에게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1804-1806년의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루이지애나 준주(準州)와 당시 오리건 지방이라고 불렸던 곳 사이를 연결하는 실질적인 수송로를 발견하기 위한 원정—도 쇼쇼니족 여인 사카가웨아의 도움과 중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성공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그들이 인디언들과 마주쳤을 때 “평화를 바란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인이 그들의 토지 사용 방식과 제한된 식량 자원 때문에, 북아메리카로 대거 이주하면서 침입자와 원주민 사이에 긴장이 초래되었습니다. 캐나다의 역사가 이언 K. 스틸은 17세기에 매사추세츠 주에 나라간세트족이 3만 명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추장 미안토노모는 “위험을 감지하고서, ·⁠·⁠· 모호크족과 맺은 동맹 관계를 확장시켜 범아메리카 원주민 저항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1642년에 몬토크에게 이와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영국인]처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조상에게는 사슴도 가죽도 많이 있었고, 우리의 초원에는 우리의 숲처럼 사슴이 가득 있었고, [칠면조]도 가득 있었고, 우리의 작은 만에는 물고기와 새가 가득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국인들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서 낫으로 풀을 베고, 도끼로 나무를 쓰러뜨립니다. 그들의 소와 말은 풀을 먹어치우고 그들의 돼지는 우리의 조개가 자라는 물가를 망쳐 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출정길—북아메리카의 침입」(Warpaths—Invasions of North America).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 전선을 결성하려는 미안토노모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1643년, 부족간의 전쟁에서 그는 모히간족의 추장 운카스에게 사로잡혔고, 운카스는 그를 영국인들에게 반역자로 넘겨 주었습니다. 영국인들은 합법적으로 유죄를 선언하여 미안토노모를 처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편리한 해결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스틸은 계속 이렇게 언급합니다. “모든 식민지의 관할 구역 밖에 있던 [미안토노모]를 처형할 수가 없자, 행정관들은 운카스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게 하고, 영국인 증인들이 형 집행을 확인하게 하였다.”

      이러한 예를 보면, 침범해 들어오는 식민지 개척자와 원주민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백인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부터도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상호 파괴적인 적대 관계와 책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인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를 놓고 프랑스인과 싸울 때 어떤 부족들은 영국인 편을 든 반면, 어떤 부족들은 프랑스인을 지원하였습니다. 어느 편이 졌느냐에 상관없이 그 전쟁에 개입한 모든 부족은 패배자가 치러야 할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해의 깊은 골”

      유럽인의 침입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은 이와 같습니다. “인디언 부족들의 지도자들이 종종 너무 늦게서야 깨닫게 된 사실은 유럽인이 인디언을 보는 방식이었다. 인디언은 백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인디언은 야만인 즉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들로서, 위험하고 감정도 없는 노예 시장의 상품이었다.” 우월감에 찬 이러한 태도는 인디언 부족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유럽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바호족 출신 변호사 필머 블루하우스가 최근 본지와의 회견에서, 지칭한 바와 같이, “오해의 깊은 골”이 있었습니다. 원주민은 자기들의 문명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것이라고, 즉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땅을 판다는 것은 인디언에게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공기나 바람이나 물을 소유하고 팔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땅을 소유하고 판단 말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사용하라고 거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디언은 땅에다 울타리를 치지 않았습니다.

      영국인, 스페인인, 프랑스인이 도착하면서 “대격변을 일으킨 이질적인 두 문화의 만남”이라고 묘사된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주민은 수백년 동안 땅 및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환경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생존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인은 곧 원주민을 열등하고 사나운 피조물로 간주하게 되어—그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나타낸 야만적인 행동은 편리하게 잊어버렸습니다! 1831년에 프랑스 역사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문명인이 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가장 지독한 살인자

      새로운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를 가로질러 서부로 몰려들자 폭력은 폭력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먼저 공격한 쪽이 인디언이든 유럽의 침입자이든 간에, 양편에 의해 잔학 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인디언은 머릿가죽을 벗긴다는 평판이 나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관행이 머릿가죽을 가져오면 상금을 제공하는 유럽인에게서 인디언이 배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디언은 월등한 적을 상대로—숫자로 보나 무기로 보나—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인디언 부족들이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종말은 자기들의 조상이 물려 준 땅을 떠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 일을 다 겪는 경우가 흔하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살던 땅을 떠난 다음 살해되거나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 부족들의 수를 가장 많이 감소시킨 요인은 전투로 인한 사망이 아니었습니다. 이언 K. 스틸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북아메리카의 침입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이나 말이나 성서나 유럽의 ‘문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병이었다.” 구세계의 질병이 아메리카 대륙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 역사학 교수인 퍼트리샤 넬슨 림릭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면역을 기르는 데 여러 세기나 걸린] 이 동일한 질병들—수두, 홍역, 유행성 감기, 말라리아, 황열병, 발진티푸스, 결핵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연두—이 신세계로 옮겨 오자 거침없이 퍼져 나갔다. 마을마다 사망률이 80 내지 90퍼센트에 달하였다.”

      러셀 프리드먼은 1837년에 밀어닥친 전염병 천연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만단족이 맨 먼저 걸리더니, 뒤이어 연속해서 히다차족, 아시니보인족, 아리카라족, 수족, 블랙푸트족으로 신속히 퍼졌다.” 만단족은 완전히 멸절되다시피 하였는데, 1834년에 약 1600명이던 인구가 1837년에 13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조약은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날까지도 인디언 부족의 노인들은 미국 정부가 19세기에 자기들의 조상과 조약을 맺은 날짜들을 술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약들은 실제로 무엇을 제공하였습니까? 대개는 좋은 땅을, 불모의 보호 구역과 정부에서 제공하는 최저 생계 수단으로 불리하게 맞바꾼 경우였습니다.

      원주민 부족들이 경멸적인 취급을 당한 한 가지 예로, 영국인이 미국의 식민지 거주자에게 1783년에 끝난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로쿼이 부족들(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세네카족)이 당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앨빈 조제피 2세에 의하면, 이로쿼이 부족들이 영국인 편을 든 대가로 받은 것은 유기(遺棄)와 모욕뿐이었습니다. 영국인은 “[이로쿼이 부족들을] 무시한 채 그 부족들의 땅에 대한 주권을 미국에 양도해 버렸”습니다. 식민지 거주자 편을 들어 영국인을 대항했던 이로쿼이 부족들까지도 “탐욕스러운 토지 회사들과 투기꾼들로부터 그리고 미국 정부 자체에 의해 억압을 받았다”고 그는 부언합니다.

      1784년에 조약을 맺기 위한 모임이 소집되었을 때, 대륙 회의 인디언 문제 위원회의 이전 대표였던 제임스 드웨인은 정부 요원들에게 “이로쿼이 부족들을 의도적으로 열등한 인간 취급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신감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서서히 약화시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의 오만한 제안은 실행되었습니다. 일부 이로쿼이 부족들은 인질로 붙잡혔고, 권총을 들이댄 가운데 “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쿼이 부족들은 자기들이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서쪽에 있는 그들의 모든 땅을 포기하고 뉴욕 주의 면적이 줄어든 보호 구역을 받아들여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원주민 부족들에게 비슷한 술책이 사용되었습니다. 조제피는 또한 미국 정부 요원들이 “델라웨어족, 와이언도트족, 오타와족, 치페와족[또는 오지브웨이족], 쇼니족 및 기타 오하이오 부족들로부터 땅을 빼앗기 위해 뇌물, 협박, 알코올, 권한이 없는 대표자들의 조작 등의 수단”을 사용하였다고 기술합니다. 인디언이 곧 백인과 그들의 허황된 약속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머나먼 길”과 눈물의 오솔길

      미국 남북 전쟁(1861-65년)이 발발하자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지역에 있던 군인들이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나바호족은 이 임시 소강 상태를 이용해 뉴멕시코 준주의 리오그란데 계곡에 있는 미국과 멕시코의 부락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킷 카슨 대령 지휘 아래 뉴멕시코 의용군 부대를 파견하여 나바호족을 진압하고 그들을 보스케레돈도라고 하는 불모지에 있는 보호 구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카슨은 초토화 정책을 실시하여 나바호족을 굶주리게 만들어 애리조나 주 북동부의 외경감을 불러일으키는 캐니언드셰이에서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카슨은 심지어 복숭아나무를 5000그루 넘게 없애기까지 하였습니다.

      카슨은 약 8000명의 나바호족을 한데 모아 뉴멕시코 주의 섬너 요새에 있는 보스케레돈도 수용소까지 강제로 450킬로미터가 넘는 “머나먼 길”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한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날씨가 몹시 추웠으며 옷도 변변치 않고 영양도 부실한 많은 유배자들은 가는 도중에 죽었다.” 보호 구역의 상황도 끔찍하였습니다. 나바호족은 은신처를 마련하기 위해 땅에 굴을 파야 하였습니다. 1868년, 정부에서는 자기들의 어리석은 잘못을 깨달은 뒤 나바호족에게 애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에 있는 그들의 조상의 고향에 140만 헥타르의 땅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갔지만, 참으로 큰 희생을 강제로 치른 것입니다!

      1820년과 1845년 사이에 수만 명의 촉토족, 체로키족, 치카소족, 크리크족, 세미놀족이 미국 남동부에 있는 자기들의 땅에서 쫓겨나 서쪽을 향하여 미시시피 강을 건너 지금의 오클라호마로 약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끌려갔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서쪽으로 끌려간 그 길은 그러한 사연이 담긴 눈물의 오솔길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저질러진 불공정 행위들은 미국 북부 지역에 있는 수족과 샤이엔족을 추적하고 다닌 미국 장군 조지 크룩의 말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송에서 인디언측의 말은 거의 들어 주는 법이 없다. ·⁠·⁠· 그러다가 [인디언]이 폭동을 일으키면 그제서야 일반 대중이 인디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들의 범죄와 잔학 행위만 유죄 판결을 받고, 불공정 행위를 저질러 인디언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든 사람들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 ·⁠·⁠·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인디언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인디언만 처벌하고 백인은 멋대로 인디언을 약탈하게 내버려 두는 정부에게서 인디언이 공정을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나무랄 수가 없다.”—「운디드니에 묻은 내 마음」(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아메리카 원주민은 100년이 넘도록 유럽인의 지배를 받은 후인 오늘날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동화(同化)시킨 결과로 그들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까? 그들은 미래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다음 기사에서 이러한 질문을 포함한 몇 가지 질문들이 고려될 것입니다.

      [9면 네모]

      여자들에게는 힘든 생활

      대부분의 부족의 경우,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전사로서 일하는 반면, 여자들은 자녀를 기르고 곡물을 심고 수확해서 가루로 빻는 등 일이 끝없이 있었다. 콜린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원 지대에 사는 인디언 여자들의 주된 역할은 ·⁠·⁠·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고 자녀를 기르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원예 사회에서 여자들은 또한 밭도 돌보았다. ·⁠·⁠· 반면에 들소 사냥을 하며 사는 서부의 유목 부족들의 경우에는 여자들이 그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돕고, 천막 안으로 고기를 가져오고, 그리고 나서 장차 사용할 수 있도록 고기와 가죽을 준비해 놓았다.”—「평원 인디언」(The Plains Indians).

      또 다른 자료에서는 아파치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농장 일은 여자들의 일이었는데, 전혀 품위가 손상되거나 비천해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도와 주었지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농장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 여자들은 언제나 농업 의식을 거행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대부분의 여자들은 땅에 물을 댈 때 기도를 올렸다.”—「아메리카 원주민—도해 역사」.

      여자들은 또한 임시 거처인 티피라고 하는 천막집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보통 2년 정도 사용하였다. 여자들은 이 천막을 세우고, 부족이 이주해야 할 때는 그것을 해체하였다. 의문의 여지 없이, 여자들은 힘든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족의 보호자로서 그들의 남편들도 힘든 생활을 하였다. 여자들은 존경을 받았고 많은 권리를 부여받았다. 호피족과 같은 일부 부족에서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자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10면 네모와 삽화]

      그들의 세계를 변화시킨 동물

      유럽인은 많은 부족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킨 한 동물—말—을 북아메리카에 들여왔다. 17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맨 처음으로 말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안장 없이 말을 타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침입해 들어온 유럽인은 곧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 덕분에 원주민은 들소 사냥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목 부족들은 정착촌을 이루고 사는 이웃 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을 하고 여자와 노예들을 훔쳐 오는 일을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7면 지도와 삽화]

      북아메리카의 일부 부족들의 위치, 17세기

      쿠테나이

      스포캔

      네즈퍼스

      쇼쇼니

      클래머스

      노던파이우트

      미와크

      요커츠

      세라노

      모하비

      파파고

      블랙푸트

      플랫헤드

      크로

      유트

      호피

      나바호

      히커리어

      아파치

      메스칼레로

      리판

      플레인스크리

      아시니보인

      히다차

      만단

      아리카라

      테톤

      샤이엔

      수

      양크톤

      포니

      아라파호

      오토

      칸사

      카이오와

      코만치

      위치토

      통카와

      아타카파

      양크토나이

      샌티

      아이오와

      미주리

      오세이지

      콰포

      카도

      촉토

      오지브웨이

      소크

      폭스

      키커푸

      마이애미

      일리노이

      치카소

      앨라배마

      오타와

      포타와토미

      이리

      쇼니

      체로키

      카토바

      크리크

      티무쿠아

      알곤키안

      휴런

      이로쿼이

      서스퀘해나

      델라웨어

      파우하탄

      터스커로라

      미크맥

      말레시트

      아브나키

      소코키

      매사추세츠

      왐파노아그

      나라간세트

      모히간

      몬토크

      [자료 제공]

      인디언: Artwork based on photograph by Edward S. Curtis; 북아메리카: Mountain High Maps® Copyright © 1995 Digital Wisdom, Inc.

      [8면 삽화]

      나바호족의 예술적인 직물과 장신구

      [11면 삽화]

      캐니언드셰이 “머나먼 길”이 시작된 곳

  • 그들의 미래는 어떠한가?
    깨어라!—1996 | 9월 8일
    • 그들의 미래는 어떠한가?

      본지와의 회견에서 샤이엔족의 평화 추장인 로렌스 하트는 인디언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문화 변용(變容)과 동화(同化)의 힘에 직면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한때 이것이 정부의 의도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우리를 ‘문명화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기숙 학교에 보내졌고 우리의 모국어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샌드라 킨러치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기숙 학교에서 내가 나바호어를 사용하면 교사는 비누로 내 입을 씻겼습니다!”

      하트 추장은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최근의 한 가지 격려적인 요인은 여러 부족들에게서 자각이 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언어가 사라져 버릴 것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부족의 언어인 카루크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10명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96년 1월, 카토바어를 할 줄 아는 마지막 인디언인 레드 선더 클라우드(카를로스 웨스테스)가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여러 해 동안 그 언어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애리조나 주의 나바호족과 호피족 보호 구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여러 왕국회관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나바호어나 호피어를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압니다. 심지어 인디언이 아닌 증인들도 나바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증인들은 성서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 나바호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나바호족 사람들이 자기네 언어만 능숙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호피어와 나바호어는 아직도 매우 많이 사용되므로 청소년들에게 학교에서 그 언어를 사용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교육

      미국에는 인디언 대학이 29개 있고, 학생 수는 1만 6000명입니다. 최초의 대학이 개교한 것은 1968년 애리조나 주에서였습니다. “이것 즉 우리 자신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교육을 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은 인디언 사회에 벌어진 가장 놀라운 변혁 중 하나”라고 아메리칸 인디언 고등 교육 위원회의 데이비드 깁 박사는 말하였습니다. 신테 글레스카 대학교에서는 라코타어가 필수 과목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대학 기금 총재인 론 맥닐(훙크파파 라코타족)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실업률 수치는 50퍼센트에서 85퍼센트에 이르며, 인디언은 미국 내의 어떤 집단보다도 평균 여명이 낮고, 당뇨병, 결핵, 알코올 중독에 걸린 비율은 높습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조처는 더 나은 교육일 것입니다.

      신성한 땅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그들의 조상의 땅은 신성한 곳입니다. 화이트 선더가 한 상원 의원에게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 곳에 있는 우리 땅은 우리에게는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인디언은 조약이나 협정을 맺을 때 종종, 그것은 백인이 인디언의 땅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지 그 땅을 전적으로 소유하여 소유권을 갖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디언 수족(族)들은 1870년대에 광산업자들이 금을 찾아 밀려들어왔을 때 다코타 주의 블랙힐스에 있는 귀중한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1980년에 미국 대법원은 미국 정부에 수족의 여덟 부족에게 약 1억 5백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수족들은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해 왔습니다. 바로 수족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신성한 땅,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스를 돌려받는 것입니다.

      수족의 많은 인디언들은 블랙힐스의 러시모어 산에 새겨져 있는 백인 대통령들의 얼굴을 보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처의 한 산에다 조각가들이 훨씬 더 큰 조각품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오글라라 수족의 전쟁 지도자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을 조각하는 것입니다. 그 얼굴은 1998년 6월까지는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도전

      아메리카 원주민은 현대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 여러 가지 면으로 적응해야 하였습니다. 많은 수의 원주민은 현재 좋은 교육을 받고 있고, 부족 사회에서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대학에서 훈련받고 있습니다. 한 예로, 미시간 출신의 치페와족인, 말씨가 상냥한 버튼 매커치가 있습니다. 그는 공영 방송 사업을 위해 기록 영화를 제작해 왔으며, 지금은 애리조나 주의 호피족 보호 구역에 있는 한 고등 학교에서 일하면서 주 전역에 비디오로 방영되는 대학 수업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하버드 대학에서 교육받은 오네이다 부족의 지도자 레이 할브리터가 있습니다.

      「나바호 타임스」에 기고하고 있는 알린 영 해트필드는, 나바호족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성장할 때 했던 경험이나 희생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의] 이기[利器] 덕분에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장작을 모으거나 패고, 물을 긷고, 양을 돌보는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은 옛날 아이들처럼 가족의 생계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수많은 사회 문제를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가족 혹은 보호 구역을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킬 수도 없거니와 우리 조상이 영위했던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직면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즉 신속히 변해 가는 바깥 세상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독특한 부족 전통과 가치관을 어떻게 고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약 및 알코올과의 투쟁

      오늘날까지도 알코올 중독이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12년간 호피족과 나바호족을 위해 소아과 의사 및 일반 진료의로 일해 온 로레인 로치 박사는 본지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튼튼하던 몸이 간경변, 사고사, 자살, 살인 등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되어 자녀, 배우자, 심지어 하느님이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웃음은 눈물로, 온순함은 폭력으로 바뀝니다.”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나바호족과 호피족이 한때 신성시했던 일부 의식들까지도 지금은 이따금 술취함과 저속한 행위로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알코올은 이 아름다운 사람들에게서 건강과 지성과 창의력과 참된 인간성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애리조나 주, 윈도록에 있는 나바호족의 법무성 중재자인 필머 블루하우스는 마약과 알코올의 남용을 “자가 약물 치료”라고 완곡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남용은 슬픔을 잊고, 일이 없는 인생 그리고 흔히 목적이 없는 인생의 가혹한 현실을 도피하도록 도와 주는 데 기여합니다.

      하지만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은 백인이 들여온 알코올 “악귀”와 싸우는 데 성공하였고 마약 중독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두 가지 실례는 워싱턴 주의 스포캔 인디언 보호 구역 출신인 클라이드 에이브러햄슨과 헨리에터 에이브러햄슨의 경우입니다. 클라이드는 땅딸막한 체격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생애의 대부분을 보호 구역에서 성장하면서 보낸 다음, 대학에 다니기 위해 스포캔 시로 이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알코올과 마약이 관련된 우리의 생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활이라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영향이 가족에게 일으킨 문제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혐오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 오기 전에는 그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발전은 더뎠는데,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백인을 진정으로 신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 3년간 불규칙한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끊기 힘들었던 습관은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14세 때부터 마리화나를 피워 왔으며, 25세가 되어서야 끊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대부분 마약에 취해 살았습니다. 1986년에 나는 「깨어라!」 1월 22일 호(영문)에서 ‘다들 마리화나를 피운다—나는 왜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나는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잠언 1:22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고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는 그 습관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봄에 헨리에터와 결혼하였습니다. 우리는 1986년 11월에 침례받았습니다. 1993년에 나는 회중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두 딸아이도 1994년에 침례받아 증인이 되었습니다.”

      카지노와 도박이 해결책인가?

      1984년에는 미국에 인디언이 운영하는 도박장이 없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의하면, 금년에는 24개 주에서 200개의 부족이 220군데의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하게도 나바호족과 호피족은 예외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그 유혹에 저항해 왔습니다. 그러나 카지노와 빙고 오락장이 보호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번영과 고용 증대를 가져다 주는 수단이 됩니까? 필머 블루하우스는 본지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박은 양날 선 칼과도 같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해보다는 이득을 더 많이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보도에서는 인디언 카지노 때문에 전국적으로 14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고 말하면서, 그 중 인디언이 차지하고 있는 일자리는 15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샤이엔족 추장 하트는 카지노와 도박이 보호 구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본지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일이 있다면, 그로 인해 부족들에게 직업과 수입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한편, 내가 관찰한 바로는 상당수의 손님들이 우리 부족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는 몇몇 사람은 빙고에 중독되어 그 곳에 가기 위해 심지어 자녀들이 학교에서 귀가하기 전에 일찍 집을 나섭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부모들이 빙고 놀이를 하고서 돌아올 때까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혼자 집을 보게 됩니다.

      주된 문제는, 가족들이 자기들이 이겨서 따면 수입이 증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져서 잃습니다. 나는 그들이 식료품이나 자녀들의 옷을 사기 위해 따로 떼어 둔 돈을 낭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래는 어떠한가?

      톰 바티는 미국 남서부 부족들의 미래에 대해 논할 때 두 가지 인기 있는 접근 방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원주민 문화가 미국 생활의 주류에 합류되어 사라질 때가 임박했다고 명백히 예고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소 모호한 방법이다. ·⁠·⁠· 그 방법은 문화 변용 과정에 대해 유연하게 말하면서 ‘옛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과 새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의 신중한 혼합을 제안하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눈부신 문화적 황혼기에 접어드는 것으로서, 인디언이 여전히 그들의 공예에서 예스러운 멋을 풍기고, 그들의 종교에서 다채로움을 띠고, 그들의 철학에서 현명함을 나타내되—한편으론 우리(월등한 [백인의] 문화)와의 관계에서 여전히 합리적이 되어 사물을 우리 식으로 볼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바티는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누가 변화될 것이며 어떤 목적으로 변화될 것인가? ·⁠·⁠· 우리[백인]는 다른 모든 민족을 그저 덜 성숙한 미국인으로 간주하는 곤란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자기들의 생활 방식에 불만을 느껴 우리처럼 살고 생각하기를 갈망함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즉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혹은 과연 끝날 것인지의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인디언 사회를 단지 곤란한 사회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귀중한 문화 자원으로 여기기 시작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른다.”

      조화롭고 공의로운 신세계 생활

      성서의 관점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부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의 미래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사야 65:17; 베드로 둘째 3:13; 계시 21:1, 3, 4.

      이 약속은 새로운 행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지구는 적절하게 존중하고 돌본다면 보석과 같은 곳입니다. 성서 예언은 새로운 행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착취를 일삼는 인간 정부 대신 들어설 하늘의 새로운 통치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땅은 삼림과 초원과 강과 야생 생물이 회복된 낙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땅을 관리하는 데 비이기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착취와 탐욕이 더는 만연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음식과 건전한 활동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부활되고 과거의 모든 불공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애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푸에블로 인디언의 조상인 아나사지(나바호어로 “고대 사람들”)족까지 돌아와 이 곳 회복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인디언 역사상 그 유명했던 지도자들—제로니모, 시팅 불, 크레이지 호스, 테쿰세, 마누엘리토, 추장 조지프 및 시애틀—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된 부활로 인해 돌아올지 모릅니다. (요한 5:28, 29; 사도 24:15) 하느님의 약속은 그들에게 그리고 지금 그분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놀라운 전망을 제시합니다!

      [15면 삽화]

      목재로 만들어 흙을 덮은 나바호족의 전형적인 집

      [15면 삽화]

      배경의 산에 조각하는 데 기초가 되는, 크레이지 호스의 모형

      [자료 제공]

      Photo by Robb DeWall, courtesy Crazy Horse Memorial Foundation (nonprofit)

      [15면 삽화]

      이전에 교역소였던 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는, 애리조나 주 킴스캐이넌에 사는 호피족과 나바호족 증인들

      [16면 삽화]

      1000여 년 전부터 아나사지족이 살던 곳 (콜로라도 주의 메사베르데)

      [16면 삽화]

      아파치족의 유명한 추장 제로니모(1829-1909년)

      [자료 제공]

      Courtesy Mercaldo Archives/Dictionary of American Portraits/D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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