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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오—왜 이토록 만연해 있는가?
    깨어라!—1997 | 9월 8일
    • 증오—왜 이토록 만연해 있는가?

      「깨어라!」 독일 통신원 기

      “왜”—이 말은 간단하기는 하지만 대답을 요하는 말입니다. 일례로, 1996년 3월에 스코틀랜드 던블레인에 있는 한 학교 밖에 놓여 있는 꽃다발들과 장난감 곰들에 “왜”라는 말이 적힌 종이 쪽지가 붙어 있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며칠 전에 한 남자가 교정으로 뛰어들어와 16명의 어린 학생과 그들의 담임 교사를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그 밖에도 여러 사람에게 총상을 입힌 뒤,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고 쏘았습니다. 그 사람은—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대해서—증오심으로 가득 찼던 것이 분명합니다. 비탄에 젖은 학부모나 학우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왜? 무고한 아이들이 왜 이런 식으로 죽어야 하는가?’

      세상에 맹목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당신도 아마 보아서 알 것입니다. 사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당신 자신도 증오의 희생자였을는지 모릅니다. 당신도 아마 ‘왜?’라는 질문을—어쩌면 한 번 이상—하였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증오와 부정적인 증오

      “증오”는 “강한 적대감이나 혐오”로 정의됩니다. 물론, 해로운 일이나 인간 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는 일에 “강한 적대감이나 혐오”를 나타내는 것은 이로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정말 살기에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불완전한 인간은 그릇된 일을 그릇된 이유로 증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파괴적인 증오는 편견이나 무지나 그릇된 지식에 근거해 있으며, 한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대개 “두려움, 분노, 모욕감”으로 인해 유발됩니다. 합당한 근거가 없는 이러한 증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며, 거듭거듭 ‘왜?’라는 의문이 생기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개성이나 습관이 이따금 우리를 짜증나게 하여 사귀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짜증나는 것과 남에게 신체적으로 해를 입히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특정 집단의 사람, 흔히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전체에 대해 어떻게 증오심을 품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에 속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민족에 속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을 증오할 만한 이유가 됩니까?

      하지만 바로 그러한 증오가 존재합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는 1994년에 후투족과 투치족이 증오심 때문에 서로 살육전을 벌였으며, 그로 인해 한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작은 나라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증오가 쌓이게 되었는가?” 중동 지방에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열성분자들이 증오심 때문에 테러 공격을 감행합니다. 유럽에서는 증오심으로 인해 구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신문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만도 “약 250개나 되는 증오 선동 집단”이 인종 차별적 사고 방식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증오가 만연해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증오는 워낙 뿌리 깊은 것이라서, 증오가 낳은 분쟁이 해결된 뒤에도 증오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분열되고 테러리스트들이 날뛰는 나라들에서 평화와 휴전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이유를 달리 어떤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1995년 말에 파리에서 조인된 평화 조약에서 사라예보 시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연방 체제 아래 재통합될 것임을 규정한 뒤 일어났던 일을 달리 어떤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라예보 시에 살던 대부분의 세르비아 사람들이 보복이 두려워 사라예보 시와 그 부근에서 도망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타임」지는 세르비아 사람들이 떠난 건물을 약탈 방화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사라예보는 재통합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아니다.”

      서로 증오하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기껏해야 위장 평화라서, 위조 지폐만큼이나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실질적인 버팀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압력을 받아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증오는 이토록 만연해 있는 반면 사랑은 몹시 결핍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4면 삽입]

      파괴적인 증오는 편견이나 무지나 그릇된 지식에 근거해 있다

  • 증오하도록 가르침 받는 세상
    깨어라!—1997 | 9월 8일
    • 증오하도록 가르침 받는 세상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이기심은 제어하지 않을 경우 증오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이기심으로는 부족한 듯, 인간 사회는 사실상 사람들이 이기적이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하는 말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태도들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어서 단순히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정치가들이 유권자들을 돕는 일보다는 당선에 더 관심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업가들도 해로운 제품이 시장에 나가지 않도록 막는 일보다는 필요하다면 양심을 어겨서라도 돈을 버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교직자들은 양 무리를 도덕과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일보다 인기를 얻거나 돈을 버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시작함

      자녀들이 방임적인 분위기에서 양육받는 것은 사실은 이기적이 되도록 가르침받는 것입니다. 사려 깊음이나 비이기심이 자녀들의 어린애 같은 욕망 앞에서 희생되기 때문입니다. 초·중·고등 학교나 대학교에서 학생들은 학업에서뿐만 아니라 스포츠 활동에서도 일등이 되도록 힘쓰라고 가르침받습니다. “이등은 꼴찌나 마찬가지다!”라는 것이 좌우명입니다.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들은 청소년들에게 이기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칩니다. 단지 적을 제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장려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의 공중 위생국장은 비디오 게임들이 청소년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게임이 적을 철저히 분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비디오 게임에는 건설적인 것은 전혀 없다.” 「뉴욕 타임스」지 앞으로 보낸 한 서한에서는, 많은 비디오 게임이 “인간의 가장 저속한 본능에 영합”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분별 없고 성미 나쁜 사춘기 세대를 길러내고 있다.” 독일 출신의 한 비디오 게임광은 이 나중에 한 말의 참됨을 솔직히 인정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는 ‘죽이느냐 아니면 죽느냐’ 하는 야만적인 행동 방침이 적용됩니다.”

      증오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함께 작용하면 훨씬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극우파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비디오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디오들은 외국 사람들 특히 터키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우려하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1994년 1월 1일 당시 독일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687만 8100명 중에 터키 사람들이 27.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은, 국가주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 즉 자기 나라의 적을 증오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사고 방식을 조장합니다. 「타임」지의 기고가인 조지 M. 테이버는 자기가 쓴 시론(時論)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정치적 이념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 국가주의일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종교를 제외한다면, 다른 어떤 명분보다도 국가주의의 이름으로 더 많은 피가 흘려졌다. 여러 세기 동안 민중 선동가들은 광신적인 군중을 선동할 때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이웃 민족 탓으로 돌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 이면에는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국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오래 지속되어 온 증오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외인 공포증 즉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일단의 독일 사회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에 의하면, 외인 공포증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외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 곳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외인 공포증은 개인이 직접 체험한 것보다는 편견에 의해 유발되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주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 의해 조장된 것”임을 그 사회학자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면담을 해본 사람들 가운데 77퍼센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외국인과 직접 접촉해 본 적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기적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이기심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증오가 대립하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종교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가 사랑을 장려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북아일랜드와 중동과 인도, 단지 세 곳의 예만 보더라도 긴장이 감도는 이유 저변에 종교적 불화가 깔려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평화가 교란당하는 원인은 종교적 불화가 아니라 정치적 불화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조직화된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정치적 편견이나 민족적 편견을 극복할 정도로 강한 사랑을 심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과 정교회의 많은 신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폭력을 낳는 편견을 용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나 관습들을 논박하려고 하는 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 종교나 그 종교를 믿는 신자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종교 백과 사전」(The Encyclopedia of Religion )에서는 이렇게 솔직히 시인합니다. “근동과 유럽의 역사를 보면 종교 지도자들은 거듭거듭 다른 종교를 폭력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 백과 사전에서는 폭력이 종교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임을 폭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대립을 사회적 심리적 발전 과정에 필요한 요소로 받아들인 것은 진화론자들만이 아니다. 종교는 대립과 폭력을 조장하여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끊임없이 해왔다.”

      발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보호하려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잘 알려진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뻗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칼을 제자리에 도로 꽂으십시오. 칼을 잡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입니다.’”—마태 26:51, 52; 요한 18:10, 11.

      개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좋은 의도로 한 것이든 나쁜 의도로 한 것이든—사랑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사랑 많으신 하느님을 본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작가인 에이머스 오즈는 최근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종교적 광신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명령’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한 가지 명령뿐이라는 것이다. 즉 죽이라는 것이다. 모든 광신자들의 신은 아마 틀림없이 마귀일 것이다.”

      성서도 그와 아주 흡사한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이 사실로 분명해집니다. 곧 의를 계속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에게서 나온 사람이 아니며,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는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누구든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본 일이 없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계명을 그분에게서 받았으니,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요한 첫째 3:10, 15; 4:20, 21.

      참 종교라면 사랑의 본을 따라야 하는데, 그러한 본 가운데는 심지어 적에게도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에 관해 우리는 이런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불의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리[십니다].” (마태 5:44, 45; 또한 요한 첫째 4:7-10 참조) 증오의 신 사탄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사탄은 사람들을 유인하고 꾀어 방탕과 범죄와 이기심으로 점철된 생활을 하게 하여 그들의 삶이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그처럼 비뚤어진 생활 방식을 따르게 되면 마침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 사탄은 계속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 신이 과연 섬길 가치가 있는 신입니까? 자기의 추종자들을 보호할 능력도 없고, 심지어 보호할 의사도 없는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두려움, 분노, 모욕감

      위와 같은 요인들이 증오를 유발한다는 사실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타임」지의 한 보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1930년대의 혼란기 이후 각양 각색의 집단이 모인 유럽의 극우 운동 단체들은 이용할 수 있을 것같이 보이는 매우 많은 기회들을 이용하지 못했다.·⁠·⁠·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중도 온건 정부의 무능력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그들 가운데 있는 외국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라이니셰르 메르쿠르/크리스트 운트 벨트」지에서 외르크 쉰들러는 지난 20년간 독일로 쏟아져 들어온 수만 명의 정치 난민들에 주의를 이끌었습니다. 「저먼 트리뷴」지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유럽 전역에서 인종 편견이 증가하고 있다.” 매우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오고 있는 현상이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돈을 축내고 있고,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고, 우리 딸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고 있다.’ 옥스퍼드, 성 앤터니 대학의 명예 교수인 시어도어 젤딘은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자기들이 위협을 받고 있고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노를 느끼는 원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인인 조운 베이크웰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적절한 말로 묘사하는데, 즉 시민들에게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정통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심오한 절대적 진리는 인정하고 있다. 즉 악은 사랑이 크게 결핍될 때 오게 된다는 것이다. ·⁠·⁠· 내가 알고 있기로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거의 믿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실, 이 사회는 몹시 교활해서 그러한 교훈을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이라고 배척하며, 개인의 이득이나 사리사욕보다 남에 대한 염려와 비이기심을 앞세우려는 생각을 비웃는다. 이 사회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거래를 매듭지을 때에도 ‘현실적이 됩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무를 속여 이행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밝혀 주는 증거를 무시한다. 그러한 사회는 낙오자나 외톨이를 만들어 내고,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성공과 자중심과 행복한 가정 등을 이루어 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 신 사탄은 인류에게 증오하도록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은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 줄 것입니다.

      [7면 삽화]

      비디오 게임이 당신의 자녀에게 증오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8면 삽화]

      전시에 자행되는 폭력은 무지와 증오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료 제공]

      Pascal Beaudenon/Sipa Press

  • 사랑하도록 가르침받는 사람들
    깨어라!—1997 | 9월 8일
    • 사랑하도록 가르침받는 사람들

      사랑이란 존경이나 호의나 공통 관심사에 근거하여 나타내는 애정입니다. 사랑이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착입니다. 사랑은 비이기적이고, 충성스럽고, 다른 사람의 이익에 친절한 배려를 나타냅니다. 사랑은 증오와 정반대입니다. 증오가 동기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격렬한 감정에만 몰두하지만,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합니다.

      사랑과 증오—이 중 어느 것이 당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탁상공론식 질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영원한 장래가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증오하도록 가르침받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새 인간성을 입음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단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이 목격한 사실로 인해 감명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국적에 상관없이 숭배에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지역에 있는 증인들의 회중이나 대회에 가 보아도 이러한 점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아마 다른 어떤 곳보다도 증인들이 벧엘 가족이라고 부르며 사는 곳에 가 보면 그 점을 더 잘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벧엘 가족은, 한 가족으로서 함께 살고 일하며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을 하는 일단의 자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각 나라에서 행해지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합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1997년 현재 233개 나라와 지역에 있는 8만 2000개가 넘는 회중이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만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서 벧엘 가족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세계 본부 및 103개 나라에 있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다양한 지부 시설이 포함됩니다.

      대부분의 벧엘 가족은 주로 지부 사무실이 있는 바로 그 나라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부 벧엘 가족은, 국적이나 민족이나 인종이 다양한 것은 물론 이전에 종교적 배경도 달랐던 증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젤터스에 있는 거의 120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벧엘 가족의 국적은 약 30가지나 됩니다. 그들이 증오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에서 평화와 연합 가운데 함께 살고 일하고 숭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서 골로새 3:14의 다음과 같은 교훈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랑을 입으십시오”

      옷을 완전히 입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단지 옷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옷이 입혀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옷을 입으려면, 분명히 결정을 한 다음 옷을 다 입을 때까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입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사랑에 대해 말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노력이 요구됩니다.

      옷은 여러 가지 목적에 기여합니다. 옷은 몸을 보호해 주며, 신체의 볼품 없는 부분이나 결함을 감추어 주고, 어느 정도는 개인의 인간성도 드러내 줍니다. 사랑도 그와 비슷합니다. 사랑은 보호를 해줍니다. 의로운 원칙이나 올바른 교제에 대한 사랑은 잠재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교제나 장소를 피하도록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소중한 인간 관계도 보호해 줍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받기가 더 쉬우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삼가는 사람은 그 자신도 해를 덜 입게 됩니다.

      사랑은 또한 우리 인간성 가운데 더 볼품 없는 부분을 감추어 줍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부분들이 동료 인간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잘난 체하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보다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사소한 결점을 눈감아 주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신체적인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반면, 영적인 아름다움은 그 사람 전체에 스며듭니다. 당신은 아마 신체적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정말 따뜻한 인간성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대부분은 아름다운 여자나 잘 생긴 남자가 그들의 진짜 인간성을 드러내자마자 처음에 그들에게 느꼈던 매력이 우리 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사랑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대치함

      증오가 사랑으로 대치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가 1994년에 독일의 14만 5958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나타났습니다.

      과음, 마약 남용, 범죄, 도박, 그리고 반사회적 혹은 폭력적인 행동은 모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이기심을 나타내는 행동이며, 쉽게 증오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면담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38.7퍼센트는 증인들이 옹호하는 성서의 높은 표준에 달하기 위해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한 가지나 그 이상을 극복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의로운 행동 표준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 그렇게 할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에 찬 도움을 베풀었으며, 흔히 일대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난 5년(1992년-1996년) 동안, 233개 나라와 지역에 있는 161만 6894명이 변화를 하도록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정복하는 사랑의 힘으로 증오를 압도하여 버렸습니다.

      결혼 생활에서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여호와의 증인들은 안정된 관계를 이룩합니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두세 건당 한 건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조사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현재 이혼한 상태에 있거나 배우자와 별거한 상태에 있는 증인들은 4.9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고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전에 이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위대한 스승이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분에게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할지 모르는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의 증인은 하느님을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둡니다. (디모데 둘째 3:4) 부도덕한 이 세상의 길과는 정반대로 증인들은 매주 종교 활동에 평균 17.5 시간을 바칩니다. 증인들은 확실히 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행복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3.

      시편 118편의 필자는 하느님의 참 종들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6절)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증오의 한 가지 원인이 제거되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생활에서 분노를 없애 버리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분노가 증오의 또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화와 자제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령의 열매를 발전시키면 분노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시 86:15; 갈라디아 5:22, 23.

      참 그리스도인은 겸손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이상으로 높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 12:3)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배양합니다. 증오와 달리, 사랑은 “성내지 않고,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고린도 첫째 13:5.

      그렇습니다. 두려움, 분노, 모욕감은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증오의 원인을 제거하여 증오에 대해 승리를 거둡니다. 참으로,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첫째 4:8.

      머지않아 영원히 사라질 증오

      이기심이나 증오는 여호와 하느님의 특성의 일부가 아니므로 영원히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제거되어, 영원히 존속할 사랑으로 대치되고야 말 것입니다. 증오가 없이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바로 당신이 동경하는 세상이라면, 살아서 그러한 세상을 보기 위해 필요한 요구 조건을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에서 설명해 줄 때 들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어떠한 특성이 나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가? 사랑인가, 증오인가?’ 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탁상공론식 질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증오의 신인 하느님의 적대자를 따르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신 여호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첫째 2:15-17.

      [10면 삽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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