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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롤러드’, 용감한 성서 전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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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롤러드’, 용감한 성서 전파자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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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81 01월호 10-13면

‘롤러드’, 용감한 성서 전파자들

‘존 위클리프’의 죽음a으로 말미암아 그의 적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이 불러 일으킨 문제들로 인하여 더 이상 괴로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들의 실권을 재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위클리프’의 저서들과 그의 영어 성서 번역판은 흑막 속에 가리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겠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롤러드’라 하는 그의 추종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클리프의 활동을 살려 나가야겠다는 결의로 차 있었다.

‘롤러드’라는 별명은 그보다 여러 해 전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기원은 14세기의 ‘네델란드’로 소급한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죽고 나서야 그 이름은 실제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말은 중세 ‘네델란드’어 ‘럴렌’(lullen)(이 단어에서 고어로 노래하다, 콧 노래하다, 혹은 찬송하다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럴’(lull)이 나온다.)에서 유래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찬양자’라는 의미이다. 찬양의 개념이 혼합되어 있는 중세 영어 ‘롤러’(loller)(‘라틴’식 표기로는 lollardus)는 게으른 부랑자 즉 게을러 빠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롤러드’들이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국 전역에 부지런히 전파한 데서 볼 수 있다.

제 2 ‘위클리프’ 성서

‘위클리프’의 성서 번역은 성서에 대한 충족되어야 할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전파 활동에서 이 번역판을 사용하다 보니까 종종 이 성서의 표현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성서의 소식을 평민들의 말로 옮기는 개역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일에 있어서 다수의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 도움을 주었으며, 그의 가장 친밀한 동료였던 ‘존 퍼베이’가 주도하였던 것 같다.

제 2 ‘위클리프’ 번역판의 서두 즉 머리말은 그 번역에 사용된 얼마의 원칙들을 설명한다. 그들은 ‘라틴’어 교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왜냐 하면, 번역가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오류와 불순한 내용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구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해서 “가장 순수한 ‘라틴’어 성서를 하나 만들려고” 서로 대조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즉, 교본과 주해를 새로 연구”하였다. 이것은 당시에는 거의 전례를 볼 수 없는 방법이었다. 보다 순수한 ‘라틴’어 교본에 이르기까지 번역자들은 단어들과 표현들의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의미를 알아내려고, 그리고 사용된 문법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번역가는 “문장에 가능한 한 명확하”게 고착하고자 하였다. 그 다음에 그 작품을 검토하여 교정하고자 하였다.—「영어 성서 6개어 대조판」 29면.

그 결과, ‘라틴’어의 의미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한편 영어의 관용구를 사용한 영어 번역판이 나오게 되었다. 그 개정판이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는가 하는 것은 나중 번역판이 그 이전 것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이 오늘날 남아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많은 단어들과 표현들이 ‘틴들’의 번역판으로 옮겨졌으며 그리하여 「흠정역」으로 옮겨졌다.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두가지 ‘위클리프’ 번역판 사이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한 현대 번역의 히브리서 1:1, 2ㄱ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우리 조상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읍니다.” ‘위클리프’ 성서 초판은 이러하다.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때때로 예언자들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제2판 ‘위클리프’ 번역에서는 영어의 관용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개선된 의미에 유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우리의 성서와 고대 사본들」

다수의 초기 영어 성서들은 크고 화려하였는데 이것은 성서를 부유한 지식층들만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상당수의 후기 ‘위클리프’ 번역판들은 소형으로 비밀리에 저술하여 평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주머니나 외투에 숨길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 평이한 소형의 책은 비용을 절감시켰으며, 자국어 성서를 소유하는 사람은 권세있는 종교 당국에 의해 위험시되던 시대에 실용적이었다.

지방 전파자들

‘롤러드’ 전파자들은 주로 도보로 여행하면서, 걸어 다니는 동안의 보호와 의지 수단으로 무거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보다 안전을 위하여 시골 지역을 다녔으며 그들이 마을이나 작은 읍내에 닿으면 그 곳의 귀족이나 지방 유지는 사람들을 옥외 장소, 농가나 광, 혹은 큰 집의 ‘홀’에 함께 모이게 하여 듣게 하곤 하였다. 작은 해설집과 성서를 돌렸으며, 때때로 성서 중 한두권만을 돌렸다. 순회 전파자들이 다음 마을을 향해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이러한 서적들을 서로 돌려 가며 열심히 읽고 토론하였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성서를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읽을 것을 교훈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에 개인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가르치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서로 관심을 돌렸다. 전파자들을 훈련시킬 때 ‘위클리프’ 자신은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내 보내실 때 간단히 교훈하신 사항들을 따라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누가 10:1-11) ‘롤러드’들은 벗들이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며 복장은 간단하고, 종종 황갈색 소매없는 외투로 자기들을 구별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롤러드’파는 ‘옥스퍼드’와 ‘레스터’로부터 중부 지방, ‘웨일즈’ 경계 지방 그리고 ‘잉글랜드’ 서부 지방 전역에 퍼졌다. 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과 연구할 수 있었다.

다음은 한 가지 예다. “‘니콜라스 벨와드’는 같은 교파 사람으로서 신약을 한권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런던’에서 4‘마르크’ 40‘페니’를 주고 샀다. 그리고 그는 ‘윌리암 라이트’와 그의 아내 ‘마저리’를 가르쳤으며 그들과 함께 일년 동안 일하면서 전술한 신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다.”—「‘포크스’의 활동과 기념물들」.

14세기의 잔여 기간 동안 ‘롤러드’ 운동은 계속 번창하였지만 대부분 ‘로마 가톨릭’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독자적인 단체의 형성이란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위클리프’는 항상 교회 내부에서 개종하려고 일했었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한동안은 그의 뜻에 고착하였다. 그러나 나라 안에서 ‘롤러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보다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롤러드’ 전파자들은 ‘위클리프’ 저서들에서 볼 수 있는 논법의 섬세함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례 여행, 미신적 관습들, 속죄, 성인들, 사원들, 형상 사용등을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점차, 어떤 탁월한 ‘롤러드’들은 자기들이 더 이상 교회 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교회의 세력이란 워낙 큰 것이어서 붙들렸을 때 많은 전파자들은 파문을 두려워하여 자기들의 새로운 신념을 부인하였다. 당국의 박해가 그 운동을 지하로 몰아넣었다.

보다 항구적이고 법적인 개혁을 이룩하기 위한 시도로 1395년에는 ‘롤러드’ 신앙의 주요 사항들을 설명하는 성명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것은 또한 성 ‘바오로’ 성당과 다른 유명한 교회들 문 앞에 못박아 붙여졌다. 격분한 주교들은 ‘리처드’ 왕 2세에게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주동자들을 협박으로 굴복시켰으며 의회는 그 진정을 부결시켰다. 그 때부터 주교들은 ‘롤러드’들을 탄압하기 위한 보다 명확한 법령을 제정할 길을 모색하였다.

증가된 박해가 실패하다

15세기 초까지도 ‘롤러드’들은 여전히 강력한 벗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에 대한 여러 가지 공격을 이겨 내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 ‘헨리’ 4세가 집권한 것은 ‘로마’ 교회 덕분이었다. 그의 부친 ‘고온트’의 ‘존’은 ‘위클리프’의 가장 충실한 벗 중 한 사람이었지만 ‘랭카스터’의 ‘헨리’는 정 반대였다. 1401년, 의회는 이단자들을 화형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뒷받침을 주교들에게 제공해 준 법령을 통과시켰다.

1401년에 시련에 못이겨 ‘존 퍼베이’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뛰어난 지도자 ‘윌리암 스우트리’는, 사제의 성별식 후에도 빵은 여전히 물질적 빵이지 성체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의 신념을 바꾸기를 거부하였다. 이틀간의 논쟁 후, 그는 ‘런던’의 ‘스미드필드’ 가축 시장의 형주에서 화형당하였다. 그 승리에도 불구하고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아룬델’은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어떤 주들에서는 ‘롤러드’를 지지하는 세력이 여전히 많았으므로 이러한 지역의 주교들은 감히 박해에 앞장 서려 하지 않았다. ‘우스터셔’ ‘에베샴’의 양복 재단사인 ‘존 바드비’가 1410년에 처형당하였을 때 어린 왕자 ‘헨리’는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서 그의 마음을 번복하라고 권하였다. 한 지점으로 장작단은 치워졌지만 온갖 권유는 실패하였다. 결국 불은 붙고 말았다. 그 왕자가 ‘헨리’ 5세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유명한 ‘롤러드’ ‘존 올드캐슬’ 경을 체포하고는 그러한 예가 이단자들을 탄압하는 데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올드캐슬’이 ‘런던’ 탑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을 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옹호하기 위하여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그들의 가장 큰 잘못들 중의 하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쟁을 그리스도교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반대했었기 때문이다. ‘런던’ 근처 ‘엘담’에서 왕을 유괴하려던 노력이 실패하자 그들은 ‘런던’에 있는 ‘세인트 자일즈 필드’로 행진하여 다른 무리들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체포당하거나 패하였다. ‘올드캐슬’이 도망하여 3년 동안 체포를 면하였지만 그는 결국 체포되어 1417년에 화형당하고 말았다. ‘롤러드’들은 다시는 무력 충돌을 일으키거나 정치적 투쟁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다. 박해는 증가하고 보다 많은 ‘롤러드’들이 화형을 당하였지만, 이 일이 그들의 소식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노르포오크’에서까지도 한때 탄압하던 주교 ‘스펜서’가 죽자 그들의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며 비공인 집회 장소들이 여기 저기 생겨 났다.

성서의 사용이 박해의 초점이 되었다. 1229년에 ‘툴루즈’ 회의에서 통과된 초기 법령은 평신도는 어떠한 자국어 성서도 소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지만 영국에서는 별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착수할 수 있기 전에 성공회의 면허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408년에 ‘켄터베리’ 회의는 성서의 어떠한 부분도 번역해서는 안되며 누구도 “‘존 위클리프’ 시대나 그 이후로 최근에 지은 그러한 서적, ‘팜플렛’ 혹은 해설집을 ·⁠·⁠·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대파문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읽지 말아야 한다고 명하였다. 이것은 1414년에 영어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형을 과하는 법에 의해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토지, 가축, 재물을 몰수당하게 되어 있었으며 생명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일부 지방 주교들은, 특히 ‘소머세트’와 ‘링컨셔’에서 다른 교령들을 발하였다. ‘링컨셔’에서 “‘제임스 브루스터’는 어떤 작은 영어 성서를 가졌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다.” ‘애그네스 아쉬포드’는 어떤 남자에게 “산상 수훈의 일부”를 가르쳤었다. 여섯 명의 주교들 앞에 불려간 ‘애그네스’는 이러한 것들을, 심지어 자기 자녀들에게까지도 가르치지 말라는 특별한 경고를 받았다.

대륙에서의 ‘위클리프’의 가르침들

일반 대중은 공개적으로 성서를 읽을 수 없었지만 고위층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여왕이며 ‘리차드’ 2세의 아내인 ‘앤’은 ‘라틴’어 성서와 모국어인 ‘보헤미아’어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1382년에 그의 결혼을 그의 오빠 ‘웬시슬러스’ 왕이 승낙한 것은 교황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교황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했지만 결과는 예측하지 못한 셈이 되었다. ‘앤’은 곧 ‘위클리프’의 저서들에 대해 듣게 되었으며 영어로 된 사복음서와 함께 그 중 일부를 구하였다. 그 저서들이 자기 마음에 들게 되자 여왕은 그를 지원하였다. 여왕을 방문하고 있던 ‘프라하’ 왕실 성원들은 ‘위클리프’ 저서 일부를 가지고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프라하’ 대학교 역시 아직 ‘위클리프’를 상당히 좋아하였던 ‘옥스퍼드’ 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이러한 관계의 결과로 ‘존 허스’는 ‘존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읽게 되었다. ‘프라하’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그곳 총장 직위를 얻게 되었다. 1403년에 ‘위클리프’ 저서들에 관한 일련의 토론이 개최되었다. 그 저서들은 당국에 의해 정죄되어 있었지만 ‘허스’는 그 저서들에 관한 강의를 계속하였다. 결국 1409년에 교황 ‘알렉산더’ 5세는 조사를 명하는 교황 칙서를 발하였다. ‘허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문되었으며 ‘위클리프’의 저서 200권이 불태워졌다. 그러나 ‘허스’와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이 끝부터 저 끝까지를 밝혔으며 왕은 교황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 교황이 1410년에 죽고 그에 뒤이어 다음 해에 ‘프라하’의 대주교가 죽자 ‘허스’는 숨돌릴 틈을 활용하여 전파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파괴적인 교황 분열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으로 ‘시기스먼드’ 황제는 1414년에 ‘콘스탄스’ 회의를 소집하였다. 다시 한번 ‘위클리프’의 저서들의 불안케 하는 영향이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권은 이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나라 즉, 영국과 ‘보헤미아’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었다. 1415년에 ‘허스’는 황제가 그에게 안전 통행증을 발급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화형을 당하였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이단의 주모자로 선언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불태워지고 그의 유해는 그의 무덤에서 꺼내져서 ‘신성한 땅’에서 추방당하게 되어 있었다. ‘링컨’의 2대에 이르는 주교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행동은 너무나 불유쾌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1428년까지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위클리프’의 시체는 파내어져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근처에 있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비열한 행동에서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즉 강물이 그 재를 넓은 바다로 날라감같이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전세계에 퍼진다는 것이었다.

1572년의 증거물은 ‘위클리프’는 불똥을 튀겼고 ‘허스’는 숯불을 붙였으며 ‘루터’는 횃불을 높이 쳐든 것으로 묘사하였다. 중세의 암흑 시대 동안 자라난 전통 및 거짓 교리 일부를 종교 개혁이 제거했을 때 16세기에 표면화된 ‘위클리프’의 많은 사상과 원칙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롤러드’는 그 기간을 살아 남았다. ‘루터’의 저서들이 영국에 소개되었을 때, 그 교리가 매우 비슷하였기 때문에 ‘롤러드’ 회중은 이 새로운 운동에 합세하였다.

성서를 일반에게는 금지시키고 일부 특혜를 받는 부유한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게 만들었던 굴레로부터 성서는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나타낸 용기를 존중하는가? 그들은 성서를 읽고 공부할 가치가 있는—참으로 자기들의 토지, 자유, 생명을 바칠 만한 책으로 귀중하게 여겼다. 그처럼 힘겹게 획득한, 성서를 연구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에게도 가치있는 것인가?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성서 연구를 시작하고 열정적인 믿음을 나타내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경우에만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각주]

a 「파수대」 1980년 11월호의 “‘존 위클리프’—성서의 옹호자”라는 기사를 참조하라.

[13면 삽화]

‘스위프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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