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당신은 누구의 이름을 더 존중하는가?
“많은 재물보다 명예[이름, 신세]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택할 것이니라.”—잠언 22:1.
1. 우리는 이름에 관한 어떤 잠언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읍니까?
당신은 “많은 재물보다 이름을 택할 것”이라고 한 고대 ‘솔로몬’ 왕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 잠언의 댓귀에서 ‘솔로몬’이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영예로운 이름을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잠언 22:1) 은이나 금은 재물입니다.
2. (ㄱ) ‘솔로몬’ 왕은 어떻게 이름과 재물 두 가지를 다 갖게 되었읍니까? (ㄴ) 이름과 재물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많은 사람들은 재물이 자기의 이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관계없이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많은 재물을 얻되 자기의 이름은 보호하기 위하여 음흉한 방법이나 뒤틀어진 수단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 왕은 이름과 재물을 다 소유하였으며, 그것도 영예롭게 소유하였읍니다. ‘솔로몬’이 섬기던 하나님이 그에게 은과 금과 다른 재물을 풍부히 주셨읍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열왕 상 3:13) 영예로운 이름과 풍부한 재물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영예로운 이름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인간의 겸험에 의하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우리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중(自重)이라는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3, 4. (ㄱ) 우리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닮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솔로몬’의 백성은 어떻게 세째 계명의 내용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합니까?
3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름을 존중할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당신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당신을 만드신 분이 자중(自重)이라는 성품을 넣어주셨읍니다. 그분도 자중의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분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 분은 자기 이름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솔로몬’ 왕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사실을 인식할 만한 이유가 있읍니다. 그 십계명의 세째 계명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가치없는 방법으로, 신세]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 20:7.
4 ‘솔로몬’의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언자 ‘모세’가 살던 당시인 기원전 1513년이었읍니다. ‘솔로몬’의 백성들은 그 계명을 받은 후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의미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괴로운 경험을 통하여 배웠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치없는 방법으로 좋지 않게 즉 그릇된 방법으로 나쁘게 사용할 경우 아무런 좋은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5.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보다도 우리 개인의 이름을 더 존중함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으며, 이 존중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을 지금 고려하는 것이 왜 권고되고 있읍니까?
5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그것이 가치없는 것처럼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보다도 우리 개인의 이름을 더 존중하고 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까? 그렇게 한 데 대하여 벌을 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째 계명 가운데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오늘날 세상 사건들과도 관련이 있읍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은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보다 더 존중하는가?’라는 질문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긴요한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이제 세상은 얼마 안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소홀히 한 데 대한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그러한 형벌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6. (ㄱ) ‘솔로몬’은 사람과 좋은 이름을 어떻게 향기름에 비하였읍니까? (ㄴ)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학살 때문에 자기의 이름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읍니까?
6 당신이 없는 좌석에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들춘다고 합시다. 당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하여 어떠한 인상을 심으려고 합니까? 또는 듣는 사람들의 머리에 당신에 대한 어떠한 인상이 떠오릅니까? 당신은 그들 머리에 영예로운 인상이 남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이 무슨 범죄자나 되는 양 당신의 이름이 평판이 나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몸에 향 기름을 뿌려서 향내가 나게 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읍니다. 당신의 이름을 들추어내는 것이 그와 같은 결과를 낼 것입니까? ‘솔로몬’ 왕은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하였읍니다. (전도 7:1) ‘솔로몬’ 왕의 13대 조부인 ‘야곱’(‘이스라엘’)도 그와 같이 생각하였읍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이라는 부락에서 사람들을 학살하였을 때에 ‘야곱’은 그들을 꾸짖고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 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다고 말하였읍니다. (창세 34:25-30; 사무엘 하 10:6과 비교) 그 땅 사람들은 ‘야곱’을 그의 하나님 여호와와 연관시켜서 생각하였었으며, ‘야곱’은 자기의 이름이 그들에게 악취가 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읍니다.
7.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어떠한 냄새가 나게 하였으며, 그들은 이에 대하여 왜 시정하려고 하지 않았읍니까?
7 우리도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름이 악취가 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시는가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벗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가장 심한 모독을 돌렸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교직자들은 전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악취가 하늘에까지 치솟게 하였읍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또 신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들 교직자들은 이 성서의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을 영원히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왔읍니다. 즉 그 하나님이 “지옥”이라는 장소를 만들어서 유황불을 영원히 태우고 사후에 죄있는 인간 영혼을 거기에 집어 넣어 놓아 주지도 않고 끝없이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교직자들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서의 말씀을 의곡하며, 지금까지도 그 가르침을 자기네 교회 신조 가운데서 없애지 않고 있읍니다. 따라서 그것이 전적으로 거짓이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것이고, 악귀의 영감을 받은 것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8. 그들은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이러한 거짓말을 계속 고집하며, 그들은 누구의 이름들에게 모독을 가져왔읍니까?
8 교직자들은 자기네 이름을 옹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거짓말을 계속 고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모독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의 우두머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모독을 돌리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적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러한 거짓말을 가르쳤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9.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무슨 전쟁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9 교직자들은 또한 그들이 여러 잔악한 전쟁에서 피를 흘린 일과 이 성서의 하나님을 연관시킵니다. 어떻게 연관시킵니까? 바로 다른 나라를 쳐부수고 자기 나라에 승리를 달라고 기도함으로써, 그리고 심지어 병사들의 혁대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글귀를 달아 주기까지 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통치자들을 위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이 즉시 천당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고 주장하므로써 자기네 나라 병사들이 하늘에 가기를 기원해 왔읍니다. 그 병사들이 실패하는 편에, 그릇된 편에 서 있더라도 교직자들은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병사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교직자들의 축복을 받아 하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여호와가 지난 16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국이 행한 모든 전쟁과 유혈 사건을 뒷받침한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읍니다.
10. (ㄱ) 교직자들은 누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악취가 되게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무관심하십니까? (ㄴ) 예수께서는 그 이름에 관하여 어떻게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며, 이 기도의 내용을 어긴 것은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10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혹독하게 주장하는 자들의 코에, 그리고 비그리스도교의 나라에 사는 수억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교국에서 이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코에 하나님의 이름이 악취를 풍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으시며, 죽은 하나님과 같이 무관심하시며, 이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실로 불합리합니다! 교회에 가서 교직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에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는 소위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읍니까? (마태 6: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그 친척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 그 거룩한 이름을 세계적으로 악취를 풍기게 만들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그 기도 내용을 어기고 천적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무관심할 정도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자기 이름보다 더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관련을 가진 사람들이 자문해 보아야 할 점
11.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을지도 모르는 교파에 관하여 무엇을 자문해 보아야 하며, 공동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에 불경을 나타내고 싶은 생각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느 종교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고 모독하는 교파에 속하지 않았는가?’ 우리 중의 누구라도 그러한 교파에 속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길입니까? 자기 이름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성서의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교파의 공동 책임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관계를 끊는 길입니다.—에스겔 39:25.
12, 13. (ㄱ) 우리나 우리의 개인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시편 148:11-13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12 우리가 그 점을 좀 생각해본다면, 우리 개개인의 이름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생명을 몇십년 동안 살아가다가 죽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 안가서 우리를 잊어버립니다. 혹시 우리의 이름이 어떻게 하여 어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할지라도 중요성과 강력한 의미가 점차적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경우도 그러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감받은 시편 필자는 시편 148편 11-13절에서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하고 부른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위엄, 신세]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14. (ㄱ) 사람들은 어떻게 여호와보다 높은 이름을 가지려고 하였으며, 왜 실패하였읍니까? (ㄴ) 누구 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무슨 세계적 사건이 그것의 참다운 성격을 알려 줍니까?
14 성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위엄, 그의 가치, 그의 존엄성, 그의 중요성, 이 모든 것은 천지에 뛰어납니다.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그가 인간 역사상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름과 명예가 이 하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이 아니 하나님의 이름정도라도 높게 된 사람이 없읍니다. 천지간의 어느 피조물도 자기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과 같이 높일 수 없읍니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시 148:13) 사람들은 불경하게도 자기들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과 같이, 심지어는 더 높이 올리려고 발버둥쳤읍니다. 그러한 예로서 최초의 인간이 창조된지 약 235년 후에 그의 죄많은 후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아담’의 손자 가운데 ‘에노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살던 당시에 관한 창세기 4:26의 기록을 보면,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였읍니다. 이것은 위선적이요, 모독적인 방법이었읍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된지 1,656년 후 ‘노아’ 시대에 세계적인 홍수가 내려 그러한 모든 자들을 멸망시켰던 것입니다.
15, 16. (ㄱ) ‘니므롯’은 그의 찬양자들과 추종자들 가운데 그의 지위를 어떻게 높였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후에 ‘바벨론’의 보좌에 앉은 ‘니므롯’의 후계자 한 사람은 여호와에 대한 그의 야망을 어떻게 표현하였읍니까?
15 그리고 또한 ‘아담’으로부터 13대 손이 있었읍니다. 그는 ‘니므롯’이라는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스스로 아주 높은 자가 되어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을만큼 되었읍니다. 창세기 10:8-10에 보면 이 ‘노아’의 증손에 대하여 이러한 기록이 있읍니다.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과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바벨론] ··· 에서 시작되었[더라].” 그가 “특이한 사냥군”이었다는 것은 여호와의 견지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특이한 사냥군”이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까지도 사냥을 하였으며, 인간의 피를 흘리는 군사활동까지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세계역 성경」은 그 문제를 올바로 성경적 의미에 맞게 “여호와께 반대하는 능한 사냥군 ‘니므롯’과 같다”라고 번역하였읍니다. ‘니므롯’은 살아 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았읍니다. ‘니므롯’의 이름은 그의 찬양자, 그의 추종자들의 머리 가운데서 여호와의 이름을 흐리게 만들었읍니다. 15세기 후에 ‘바벨론’의 보좌에 앉은 ‘니므롯’의 후계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16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이사야 14:4, 13, 14.
17, 18. (ㄱ) 여호와의 이름은 어떻게 ‘니므롯’이나 그의 후계자들도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읍니까? (ㄴ) 시편 126:1-3은 이방들 사이에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유리한 인상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려 줍니까?
17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은 ‘바벨론’의 사냥군-왕인 ‘니므롯’이나 그의 후계자들도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읍니다. 기원전 539년에 ‘니므롯’을 계승해 오던 왕권은 ‘바벨론’ 왕도가 ‘메대’와 ‘바사’의 군대에 함락되었을 때에 무너지고 말았읍니다. 2년도 채 못되어 기원전 537년에 ‘바사’의 정복자 ‘고레스’ 대왕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여호와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유명한 조서를 내리게 되자 여호와의 이름은 높이 올려졌읍니다. (역대 하 36:19-23; 에스라 1:1-11) 이것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라 사로잡혀갔던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꿈만 같았읍니다. 그러나 이방들에게는 여호와께 유리한 인상을 주었읍니다. 시편 126:1-3에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말로 표현되어 있읍니다.
18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9. 교직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로써 어떻게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이름을 격하시키고 있읍니까?
19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구석으로 몰아넣어버렸읍니다.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신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가르치기 때문에, 여호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이신 그분과 동등하게 만들었으며, “성신”을 성령을 부어주시는 여호와와 등등하게 만들었읍니다. 교직자들은 자기네 종교적 목적에 두두려 맞추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앞자리에 내세웠읍니다. 영문 「흠정역 성서」를 펴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몇번이나 나오는지 보십시오. 1952년에 출판된 영문 「개역 표준역」 성서를 펴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번이라도 나오는지 보십시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970년에 발행한 「신 아메리칸 성서」나, 1610년에 발행한 ‘듀웨이’역 성서를 열어서 여호와(혹은 야훼라도)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지 보십시오. 교직자들은 신약 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 혹은 The Lord)라고 하였을 때에 이것은 그가 여호와 곧 야훼 자신이심을 의미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이러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20. 사도 ‘바울’은 빌립보 2:5-11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0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하게 되었다가 그 다음에 이 충실한 아들이 영화롭게 된 사실을 기술하였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정신적 태도, 신세]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정신적 태도]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등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 2:5-11.
21. (ㄱ) 이 기록은 여호와의 이름이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높으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로 여호와의 이름을 소중히 여김을 나타냅니까?
21 이 영감받은 기록으로 보아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다른 모든 아들들 곧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으로 보상을 주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따라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그 높아진 이름을 인정하고 그 이름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주 높아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높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불리우기는 하였지만 그가 하나님이라거나 아버지라고 불리우지는 않았읍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지위와 칭호는 언제나 여호와에게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천적 아들에게 자기보다 더 높은 이름을 주시거나 심지어 동등한 이름도 주시지 않았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장 높으며,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합니다. (마태 6:9) 우리는 그 이름을 그릇 사용하지 않고, 모든 존재자 중에 가장 높은 이름으로 존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모든 종파에서 떠납니다.
자기의 이름을 알게 하신 때
22, 23. (ㄱ)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일이 구식이 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바로’와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됩니까? (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어떻게 그 이름을 특히 강조하셨읍니까?
22 하나님의 본래 이름은 구식이 되지 않았으며, 그것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일도 구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고대 애굽의 통치자 ‘바로’와 같이 되어 그 이름을 대항하고 그에 대하여 완고하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 5:1, 2) 여호와를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바로’가 더 높아지지 않았읍니다. 홍해에서 멸망되었을 뿐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모세’를 ‘바로’ 앞에 보내어 속박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고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하라고 하셨을 때에 그 이름을 특별히 선포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아라비아’ 반도 ‘호렙’ 산(‘시내’ 산) 기슭에서 ‘이스라엘’ 사람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읍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을 누구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읍니다. 성경에서 그 대답을 들어봅시다.
23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다 하라].”—출애굽 3:13-16.
24. (ㄱ)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하나님의 이름을 변경시킬 권리가 없읍니까? (ㄴ) 1931년 총회에 모인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떠한 결정이 아주 적절한 것이었읍니까?
24 하나님께서 여호와가 자기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에 이르는 표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오늘날 우리 세대에 와서도 하나님의 이름이요 표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그것을 변경시킬 권리가 없읍니다. “여호와”는 기억해야 할 이름입니다. 「미국 표준역 성서」에는 “표호”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이것은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은 모든 세대에게 나의 기념물이다”고 하였읍니다. (출애굽 3:15, 미표) 그것은 인류의 첫 세대도 기억하였던 이름이었읍니다. 성서의 둘째 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세 2:4) 그것은 기념물이며, 영원히 대대로 기억할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수천명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 1931년 7월 26일 일요일에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시에서 총회를 가졌을 때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성경적인 이름을 채태한 것이 잘못이었읍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적절한 일이었읍니다.
25. (ㄱ) 1925년에 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 때가 이르렀음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읍니까? (ㄴ) 이와 일치하게 1926년 1월 1일호 「파수대」지는 그 주요 기사에서 무엇이라고 하였읍니까?
25 그 칭호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1925년에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내”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사무엘 하 7:23) 그러므로 1926년 1월 1일호 「파수대」에 “누가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주요 기사를 실은 것은 아주 적절하였읍니다. 그 잡지 7면에 나온 “자기에게 이름을”이라는 소제목하의 37항과 38항의 내용은 이러하였읍니다.
“충실한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들은 애굽에 거주하였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망각되었으며, 그 민족의 생각에도 없었고 세계의 다른 민족도 기억하지 않았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이름을 내시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사무엘 하 7:23) 현 상태는 그와 비슷하다. 이 악한 세상의 모든 조직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였는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이름을 내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로 하여금 지상에서 자기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 지위를 차지하는 특권을 가질 것인가? 확실히 하나님의 조직인 ‘시온’ 외에는 없다. 그 조직 성원들의 일부가 지상에 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3:10-12.”
26, 27. 예언자 ‘이사야’는 어떠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을 예견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 63:11-14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읍니까?
26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의 속박 가운데서 ‘이스라엘’ 선민을 구출하신 때에 자기를 위하여 이름을 내신 것에 대해 ‘예루살렘’의 ‘다윗’ 왕이 말한 것 외에도 그 후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선민을 곤경 가운데서 구출하심으로써 그 이름을 다시 내실 때가 올 것을 예견하였읍니다. 이 구출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는 (이사야 63:11-14에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7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28. ‘이스라엘’이 구출될 때, 애굽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하였으며, 그 결과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읍니까?
28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던 때에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중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행동을 취하였었읍니다. 어떤 행동을 취하였었읍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초의 유월절을 기념한 다음에 애굽에서 행진해 나올 때에 출애굽기 12:38에 기록된 바와 같이 “중다한 잡족”이 그들을 따라 나왔읍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물을 가르셨을 때에 이 중다한 잡족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 사이를 통과하였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뒤쫓아 오는 ‘바로’의 말들과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바닷물을 덮쳐 피에 굶주린 이들 추적자들을 수장시켜버렸을 때에 이들 중다한 잡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 반도의 해안에 안전하게 서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출애굽 14:31-15:18.
29. 여호와의 기적이 그 당시 나라들에게 가져다 준 충격은 이제 어떻게 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읍니까?
29 통용 기원 전 1513년에 있었던 그 어마어마한 기적은 당시의 나라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지만 그 후 그의 굉장하던 효과는 점차 사라져버렸읍니다. 오래 전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높이신 그 이름은 오늘날 세상 나라들에게는 매력이 없읍니다. 소위 그리스도교의 나라라고 하는 그리스도교국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고대 여호와의 백성을 압제하던 애굽의 상태와 같이 되어 버렸읍니다. (계시 11:8) 그 당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실제 목격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인식하게 되었었읍니다. (출애굽 6:2, 3) 그들은 환경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과 행위에 대하여 다음 세대에게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증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내신 이름을 존중해야 하였으며,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그를 증거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였읍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국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30.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은 왜 고대 육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어야 할 의무 하에 있읍니까?
30 과거 수 세기 전에도 그러하였지만 오늘날도 그리스도교국은 자기네가 영적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교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자기의 하나님은 고대 육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 육적 ‘이스라엘’이 그러하였던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국도 그 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의무하에 있읍니다. 그 하나님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 예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예수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고 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일차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8; 5:27-32.
31. 오늘날 그리스도교국과 그의 교회들이 행하고 말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가 왔으며, 이것은 현대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무엇을 역설해 줍니까?
31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과 그들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행위를 성서의 말씀과 대조 검토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교국의 이들 나라들과 교회들 가운데서 여호와의 증인다운 점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읍니까? 이상과 같은 뚜렷한 현실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지도, 존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교만하고 완고한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 앞에서 이름을 내실 때가 또 한번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당한 역사적 사건은 여호와께서 ‘할마게돈’에서 있게 될 다가오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내실 때에 현 시대의 나라들과 백성들이 재난을 당할 것을 역설해 주고 있읍니다.—계시 16:14-16; 19:11-21.
32. 오늘날의 모든 나라들은 이 모든 사실을 모를 만한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읍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교국에 있는 적대자들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 관하여 무슨 기록을 말살할 수 없읍니까?
32 1972년인 지금, 모든 나라들이 이 모든 사실을 모를 이유가 있읍니까? 9억명이나 되는 신도를 가진 그리스도교국이 실패하였음으로 여호와께서는 현 20세기 바로 우리 시대에 충실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증인들을 가지시는 데 실패하셨읍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 얽매인 사람들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참으로 지존하신 하나님의 증인들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한 이름을 가질 권리가 없고 거짓 예언자들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사람들을 반대하고 저항하고 박해하여 강제로 전세계적인 증거 사업을 중지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과 소위 이교국의 이들 적대자들은 현 20세기에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200여개 나라에서 160여개 언어로 수행한 기록을 결코 말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국의 모든 반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에 관하여 무엇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까?
33 그들은 성서의 원본에 수천번이나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인종과 국적의 족속과 사회 계층에 속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이신 여호와를 알고 두려워하고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예언자들로서는 도무지 달성할 수 없는 거대한 일입니다. (신명 18:15-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세계적인 전파와 가르치는 사업을 중지시키는데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왜 그렇게 되었읍니까? 이것은 그들이 제1세기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을 반대하던 자들에게 종교적 법률가 ‘가말리엘’이 말한 법적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사도 5:34-39.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
34. 기원 제 1세기에 사도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그 일은 왜 여호와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을 일으켰읍니까?
34 제1세기 사도들과 동료 신자들을 간섭한 이들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사도들의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기는커녕, 기원 70년 성벽이 높던 고대 ‘예루살렘’과 거기에 있던 성전이 파괴되어 다시는 ‘유대’인들의 손으로 재건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종교 제도도 무너져버렸읍니다. 그들의 제사직은 끊어졌으며, 그러한 신분을 유지하지 못하였읍니다. 이들 편협한 종교적 박해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는가의 여부는 역사적 사실이 잘 말해 줍니다. 기원 70년의 비극적 사건도 여호와께서 마치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인 것처럼 없어지시게 된 것을 의미하지 않았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의 민족이 존재할 때까지만 존재하는 민족적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신론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불멸하시는 여호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살아계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러나 70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그 후에는 하나님께 나라가 없었읍니까?
35. 고대 ‘이스라엘’ 나라는 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이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인지 여부의 문제가 왜 일어납니까?
35 기원전 1473년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예언자 ‘모세’가 ‘이스라엘’ 나라에게 고별사를 할 때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이 있읍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신명 28:9, 10)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었읍니다. (출애굽 19:3-5)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이었읍니다. (예레미야 14:9; 다니엘 9:1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도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입니까?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성전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있지 않는데도, 기원 1948년에 비신권적인 ‘이스라엘’ 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을 설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이 되었읍니까? 그 사실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36. 예수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할 백성’의 일원이었읍니까?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육적 ‘이스라엘’에게서 옮겨야 할 것인가의 그의 결정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36 이 문제를 알아보는 데 있어서는 기원 1세기가 결정적인 시기였읍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다윗’ 왕의 계통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날 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할 백성’의 일원이었읍니다. 예수라는 그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속한 그 백성은 그를 배척하였읍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소수 남은 자였던 예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에서 분리되어 영적 나라가 되었읍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육적 할례받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할 백성’으로 계속 존재하였겠읍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이름이 옮겨져서 예수의 제자들인 영적 나라 위에 머물렀읍니까?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친히 결정하셨읍니다. 기원 33년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는 요엘 2:28-32에 있는 예언의 성취로 성령을 부어 주셨읍니다. 누구에게 부어 주셨읍니까? 그때까지 서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부어주시지 않았읍니다. 예수의 열두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였읍니다.—사도 2:1-36.
37, 38. (ㄱ) 얼마나 되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할’ 새로운 백성의 일부가 되었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언제 비-‘유대’인이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에 가담할 수 있도록 문을 여셨읍니까?
37 십 구세기 전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둘 새로운 백성을 뽑아내기 시작하셨읍니다. 바로 그의 이름으로 불리울 백성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베드로 전 2:9)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 수천명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할 백성’에 속하게 되었읍니다. 약 3년 반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도 기회를 열어 주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이 가정에 들어가 ‘고넬료’와 그의 벗들에게 예수 메시야에 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하셨읍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읍니다. 그렇게 하여 이들 신자가 된 이방인들은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에 속하게 되었읍니다. 그 이후로는 모든 비‘이스라엘’ 민족 즉 이방인들도 ‘그의 이름을 위할’ 영적 백성 가운데 들어올 수 있게 되었읍니다. (사도 10:1부터 11:18) 이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부 동생이며, 영감을 받은 제자 ‘야고보’가 한 말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개종한지 약 13년 후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38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베드로’]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여호와]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여호와]의 말씀이라.”—사도 15:12-18; 아모스 9:12.
39. (ㄱ)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에도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계속 소유하고 계셨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19세기 전에 시작하신 무슨 일을 오늘날 끝마치고 계시며, 우리에게는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39 따라서 성벽으로 둘린 고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기원 70년에 파괴되고 할례받은 육적 ‘이스라엘’이 분산된 후에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계속 소유하고 계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제1세기에 거기서 시작하신 일을 현 20세기인 오늘날에 끝마쳐가고 계십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환난이 이 사물의 제도 위에 임하기 전인 지금,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인 이 영적 백성을 완성시켜가고 계십니다. 아직도 지상에 그 백성의 남은 자가 있읍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현재 모든 대륙들과 7대양의 모든 섬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읍니까? 무슨 일 말입니까? 기원 70년에 ‘예루살렘’과 그 유명한 성전이 파괴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엄청나게 모독을 당한 이래 여호와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있으며,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광범하게 높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오늘날 지상에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가지고 계시며, 그 백성은 남은 자인 소수에 불과하면서도 자기들이 그러한 백성임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읍니다.
[156면 삽화]
당신의 교회의 가르침과 의식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가? 지옥불, 삼위일체를 가르치는가? 나라의 전쟁을 축복하는 데 참여한 일이 있는가?
[158면 삽화]
1931년 7월 ‘오하이오’ 주(미국) ‘콜롬버스’ 시에서 열린 이 대회에 모인 수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갖기로 하였다
[159면 삽화]
여호와께서 홍해에서 자기의 위대하신 이름을 내게 하신 바와 같이 그는 또 다시 다가오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