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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에 탄생한 새로운 성도들이 당신을 도울 수 있는가?깨어라!—1976 |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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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임재시까지 일어나지 않고 ‘죽음에 잠자고’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늘에서 중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록이 불완전하고 단편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에 관한 성서 자체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는 그 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 승인 과정에서 소모된 모든 시간과 경비와 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가톨릭’계간지 「비평가」의 편집자 ‘죠엘 엘스’는 솔직히 “그것에 소비하는 돈으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라고 말하였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성도에게가 아니라 의지할 분으로서 하나님께 신뢰를 두도록 성실한 사람을 가르치는 데 그러한 철저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성서는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우리의 대제관은 연약한 우리를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히브리 4:14-16, 공동번역) 인간이 만든 어떤 성도에게 기도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라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진실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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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로 슬퍼해야 하는가?깨어라!—1976 |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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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견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로 슬퍼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죽음은 우리 인간들이 직면해야 하는 가장 당혹케 하는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에는 깊은 상실감이 수반되므로, 슬픔을 증가시킨다. 우는 것은 바로 그러한 큰 슬픔의 자연스러운 표현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서는 우는 것을 말리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특히 슬퍼하는 것을 막고 있지 않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관련된 한 경우가 있다. 이 사람들은, 필경은 ‘알코올’의 영향 하에 있는 동안, “다른 불”을 드림으로써 순결한 숭배에 대한 요구 조건을 범하였다. 이러한 불경한 행위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형벌을 당하였다. (레위 10:1, 2, 8-11) 이 경우에 ‘아론’과 그의 다른 아들들은 어떠한 형태의 외적 표현이든 슬퍼함을 나타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친척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에 전적으로 동의함을 나타내었다. (6, 7절) 따라서, ‘아론’과 그의 살아있는 아들들이 행한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 방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러 세기 후에 예언자 ‘에스겔’은 자기 아내의 죽음에 대하여 울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너는 슬퍼 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 종용히 탄식하[라].” (에스겔 24:15-17) ‘에스겔’이 슬픔의 외적 표현을 나타내지 않는 데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벨론’에 유형되어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의 예언적 징조의 역할을 하여, 여호와께서 당신의 성전을 버리실 것임을 그들에게 지적해 주었다. 마치 ‘에스겔’의 아내가 그에게 귀중한 존재였듯이 바로 그 성전은 그들에게는 귀중한 것이었다. 그들의 희망과는 상반되게도, ‘예루살렘’은 멸망될 것이며, 유형되어 있는 그들은 자기들의 슬픔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게 될 것이다.—에스겔 24:20-24.
과거의 또 한 가지 경우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는 죽은 자[‘요시야’]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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