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 ‘아메리카’ 여행깨어라!—1973 | 5월 22일
-
-
두말할 나위없이 방문자가 주인의 소유인 수건이나 모포 등으로 자기들의 신발을 닦는 것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이다. 만찬가지로 몸을 말끔히 씻지 않고 수건이나 ‘시이트’ 등을 사용하여 더럽히는 것도 합당하지 못하다. 또한 집주인의 취침 시간이 지나도록 외출하였다가, 집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를 깨우는 것도 존경심이 있는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부족하게도 그러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중앙 ‘아메리카’ 여행은 사실상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으며, 그 지방 주민의 가정에 머무르는 것이 그 여행에 즐거움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러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당신의 집주인도, 당신이 그들의 집에 머므르게 됨을 기뻐하는 만큼, 자기들의 집에 당신을 영접하게 됨을 기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
‘히브리’인들의 시깨어라!—1973 | 5월 22일
-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히브리’인들의 시
하나님의 말씀의 어느 부분이든지 그 부분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감받은 필자 각자의 문체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사실은 성서에 들어있는 ‘히브리’인들의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서의 일부분이 시체(詩體)로 기록된 것은 당연하다. 왜 그런가? 시는 지성에 호소할 뿐아니라 감정을 감동시켜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대칭 형태를 이루어 이해나 기억을 용이하게 만들어 준다. 시는 눈에나 귀에 더 호감을 준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성서에 들어 있는 어떤 표현들은 분명히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구가 문자 그대로 “주초” 위에 놓여 있지 않음과 강물이 실제로 “박수”(拍手)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욥 38:4-6; 시 98: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지구가 변치 않는 법칙에 의해 확정적으로 고정되었으며, 강들이 손과 같은 물결을 일으켜 강둑에 요란스럽게 부디친다는 대단히 명료한 진리를 나타냈다. 이처럼 일반적인 산문체와의 차이는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 점을 이해할 수 있으나, ‘히브리’ 시에 있어서의 다른 점들은 그렇게 용이하지도 않다.
예를 들면, 창세기 4:23에 나오는 ‘라멕’의 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사람’과 ‘소년’ 두 사람을 죽였는가? 약 2세기 전까지는 주석가들이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히브리’ 시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운(韻)이 중요한 요소로 되어 있는 어떤 고전 시나 현대 시와는 다르다. ‘히브리’ 시는 대귀법(對句法)이라고 하는 것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실예를 들어보면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귀법 중에서 가장 많은 형태는 동의적(同意的) 대귀법이라는 것으로 둘째 행이 첫째 행의 일부분을 다른 말로 반복하는 형태이다. 시편 24:1이 그 좋은 예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는 구는 두행에 다 걸린다. 그러나 “땅”과 “세계”, 그리고 “거기 충만한 것”과 “그 중에 거하는 자”는 시적 동의어이다.
동일한 시 형태가 ‘라멕’의 말에도 사용되었다. 그는 분명히 한 사람을 죽였으며, 둘째 행은 첫째 행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약간 확대한 것이다. 즉 다른 말을 사용하여 동일 사상을 확대한 것이다.
성서에는 또한 반의적(反意的) 대귀법 즉 각 행이 반대 사상을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시편 37:9은 그 점을 보여준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