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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77 11/1 497-501면
  • 여호와의 봉사에서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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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 봉사에서 즐거워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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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파77 11/1 497-501면

여호와의 봉사에서 즐거워하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시 100:2.

1, 2. 종종 어디에서 행복을 구하며, 행복을 가져오는 것에 대한 예수의 견해는 어떠하였읍니까?

당신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이죠,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전 생애에 걸쳐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지상 거민의 대부분은 참된 행복과 영속적인 행복의 특징인 깊은 내적 평안감, 만족감 및 즐거움을 결코 느끼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이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은 물질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행복을 찾는 길은 무엇입니까?

2 영속적인 행복이 주로 물질적인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 혹은 “행복” 가운데는 물질적인 소유가 언급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 신세]는 복이 있[고]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고]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으며]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마태 5:3-9.

3. 참다운 만족과 행복을 얻는 방법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까?

3 어떤 사람들은 행복과 참다운 만족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행복과 참다운 만족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순결한 숭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행복하신 하나님”으로 불리우며, 그분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 전 1:11, 신세; 창세 1:27) 그분은 우리에 대한 목적과, 우리가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셨읍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명의 ‘아덴’ 철학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으며 인간이 ‘자기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지적하였읍니다.—사도 17:26, 27.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의 견해

4. 왜 우리는 사람이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너무 염려하거나 걱정해서는 안된다는 예수의 충고를 의뢰할 수 있읍니까?

4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 필수품을 얻는 것이 일종의 투쟁임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읍니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염려하거나 그러한 것을 열렬히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셨읍니다. (마태 6:25) 예수께서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의 의미를 잘 알고 계셨읍니다. 그분은 태초에 인류를 창조할 때 자기 아버지의 대행자로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1:15, 16)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관심과 마련을 관찰해 왔기 때문에 ‘다윗’의 다음과 같은 선언에 동의할 수 있었읍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5. 예수의 말씀을 오늘날 적용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을 정도로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과 그 후의 경제적 상태가 오늘날보다 덜 심각한 것이었읍니까?

5 예수께서는 혼란한 시기에 ‘유대’ 나라에 오셨읍니다. 그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더 어려운 때가 이를 것을 알고 계셨읍니다.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대표자이신 그분은 다음과 같은 진지하고 진실된 충고를 하셨읍니다.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읍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1-33.

6. 자기의 필수품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을 바랄 수 있읍니까?

6 예수는 자기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 아버지는 자기를 섬기고 자기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의 생활을 위해서 탁월한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고 또 기꺼이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잘 알고 계셨읍니다. 이것은 그분의 종들 각자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분이 종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필수품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한 것을 전적으로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균형잡힌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분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 합니다. 그는 사실상 생활의 영적인 부면을 가장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도록 그에게 능력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몫을 행하실 것입니다.—빌립보 4:19.

진정으로 즐거워해야 할 주된 이유들

7.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첫째가는 행복일 것입니까?

7 이러한 약속이 참되다는 하나님의 이러한 보증과 증거는 행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더 큰 행복 혹은 즐거움은 첫째로 지구 및 지구상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러한 목적에 있어서 개개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의 목표 혹은 목적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행복하게 하는 데 단순한 소유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여를 합니다.

8. 디모데 전 4:8에 나와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8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살면 여러 가지 두려움과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기 가족들을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합당하게 돌보는 사람들은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더 행복한 가족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생의 목적을 가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족 성원들은 마약이나 부도덕한 교제를 통해서 쾌락을 추구하거나 영속적인 보상을 줄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허무함을 훨씬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가족은 오늘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탕하고, 낭비적이고, 비현실적인 생활 방식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인 여러 가지 질병을 피할 수 있읍니다. 이 점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 전 4:8.

9. 이미 언급한 즐거움 외에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고 계속 그것에 고착할 때 어떠한 즐거움을 더 가지게 됩니까?

9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형제로서의 진정한 사랑이 있읍니다. 그들은 친척들로부터 호의를 항상 받지는 못할지 모릅니다. 친구들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읍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 10:29, 30.

10.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한가지 큰 행복은 무엇입니까?

10 성서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오게 되는 가장 큰 행복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즐거움입니다. 받는 데 즐거움이 있다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도 20:35) 동료 인간들을 돕기 위해 의학계나 교육계 혹은 그와 같은 분야에 자기 생명을 바친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만족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도 동료 인간들을 도와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방법과 그분의 교훈에 관한 지식은 일시적으로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활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미래의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배우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과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성서가 제시하는 생활 방식을 배우도록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읍니다. 이 모든 것은 좋은 소식을 가르치는 사람의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그는 자신이 미칠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대한 지역에 좋은 소식이 확장되는 것으로부터 자기 활동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초기 ‘데살로니가’ 회중의 경우는 이에 대한 한 가지 예입니다.—데살로니가 전 1:8, 9.

11.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박해를 인내하면서 가질 수 있었던 즐거움을 묘사하십시오.

11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우리도 역시 만족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마게도니아’ ‘빌립보’ 시에서 그들이 갇혀 있던 감옥문이 여호와의 기적을 통해 열렸을 때 그들은 놀라는 한편 즐겁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존하신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식한 간수가 그들을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즐거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때 ‘바울’과 ‘실라’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는 이러하였읍니다.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 ···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사도 16:25-34.

반대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움을 상실하지 않는다

12.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반대하고 우리에게 욕을 돌릴지라도 왜 낙담해서는 안됩니까?

12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잃게 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심지어 좋은 소식의 선포를 막고 선포자와 그의 동기에 관하여 좋지 않게 이야기함으로써 좋은 소식의 선포를 어렵게 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이 사도 ‘바울’에게 일어났읍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빌립보’ 회중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읍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립보 1:15-18, 28.

13.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그곳에서 있었던 심한 박해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읍니까?

13 일찌기 기원 33년 오순절 직후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공개적 증거와 관련하여 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두었읍니다. 사도들은 천사에 의해 풀려났다가 후에 다시 체포되었읍니다. 그들의 변호를 듣고 종교 지도자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하였읍니다. 그러나 깊은 존경을 받던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경고했을 때 그들은 사도들에게 단지 매질만하고 선포하지 말도록 명령하였읍니다. 그러한 심한 박해 때문에 그들은 용기를 잃고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었읍니까?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사도 5:12-42.

14.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 회중이 기대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도움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읍니까?

14 이 경우와 다른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좋은 소식의 선포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기적을 사용하여 개입하셨읍니다. (사도 12:1-11) 그분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와 그의 천사들이 활동을 감독할 때 좋은 소식의 선포를 지원하십니다. 현대 여호와의 종들은 놀라운 구출을 경험해 왔읍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이 불가능했던 지역에 전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해 왔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으로 이 전에 심한 반대자였던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심으로써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의 개종을 상기시키고 있읍니다. (사도 9:1-16) 현대적인 예들은 초기 회중의 경우처럼 기적으로서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 즉 여호와의 “기적”을 볼 수 있읍니다.—갈라디아 3:5, 새번역.

15.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추구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박해를 직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그들 배후에 이러한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무력해지거나 그들로부터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잘 알고 있읍니다. 또한 그들은 사도 ‘바울’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경고한 점을 기억하고 있읍니다. (마태 10:22; 디모데 후 3:12)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추구하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한 인내가 그들의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박해가 있을 때는 그것을 직면합니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즉 상을 얻는다는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은] 부끄럽게 아니[하느니라.]”—로마 5:3, 4.

16, 17. (ㄱ) 이방 나라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는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무엇이 요구되었읍니까? (ㄴ) 우리가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도 동일한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16 고대 시편 필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읍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시 100:2) 그분은 온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순결한 숭배에 참여하기를 원하셨읍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여호와를 섬겼던 사람들의 상황과 믿음을 고려함으로써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읍니다. 그들은 율법에 계속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 율법은 가장 높은 도덕 표준을 유지하였고 위생 및 음식에 관한 법을 통해 충실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숭배자가 아닌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읍니다. 그들은 불결한 우상 숭배와 관련된 각종 부도덕을 행하는 그러한 이방 나라들로 둘러 싸여 있었읍니다. 때때로 ‘이스라엘’ 백성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는 이러한 민족들과 싸워야 하였읍니다.

17 이러한 나라들의 군대는 잘 훈련된 용사들인데 반하여 ‘이스라엘’인들은 대부분 평화스럽게 농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나라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는 많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나가서 이들 강한 적국의 용사들과 백병전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하였을 때는 그들이 이러한 나라들을 감당할 수 없었읍니다. 사무엘 하 23:8-22의 내용과 같은 기사를 읽는 것은 매우 격려적입니다. 또한 읽으면서 그곳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강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 기적적인 힘과 지속적인 능력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격려적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읍니다. (마태 28:20; 계시 14:6)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하는 데 지치거나 두려움으로 주춤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29-31.

18. 왜 그러한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이 경험한 즐거움보다 우리의 믿음의 결과로서 오는 즐거움이 더 클 수 있읍니까?

18 우리가 좋은 소식을 선포할 때는 예전의 그러한 투사들처럼 시시각각으로 즉각적인 죽음을 진면할 필요는 없읍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들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력이 있는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즐거움이 더 클 수 있읍니다. 우리는 파괴적인 육체의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 잘못된 교리나 사상을 제거하고 고침을 베푸는 의의 무기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것이 듣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져오는 즐거움은 우리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고 앞에 놓인 훌륭한 상을 얻는 데 대한 우리의 소망을 강화시켜 줍니다.—고린도 후 6:4, 7; 골로새 3:23, 24.

[499면 삽화]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직장 동료를 돕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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