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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하라파수대—1981 |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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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로서의 이 땅을 멸망시킬 힘을 가진 때는 과거에 결코 없었읍니다. 인간은 이제 그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일을 행하고자 지금 그 힘을 사용하고 있읍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인류의 축복을 위하여 산업가들에게 과학 기술을 제공하였지만, 그것으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땅에 치사적 질병을 만연케 함으로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하고 말았읍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오염되고 식량을 생산하는 토양은 독성을 띠게 되었고 우리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많은 강들과 호수들은 죽어가고 있으며 대양(大洋)은 시궁창이 되고 있읍니다.
13. 조롱자들이 “이전에도 있었는데” 하고 말해 버릴 수 없는 징조의 어떤 특징이 있읍니까?
13 우리의 마음은 생명체를 유지할 땅의 능력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이런 일이 전에 결코 없었으며, 조롱자들이 이것을 역사의 반복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읍니까? 사람들은 그렇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땅을 망하게 하는 이 일 역시 “마지막 날”의 징조의 일부로서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 「계시록」은 거의 19세기 전에 11장 18절에서 이 점을 밝혀 줍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14. 예수 당시와 우리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고에 청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우리의 눈이 실제로 보며, 우리의 귀가 실제로 들으며, 우리의 마음이 민감하다면,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에 살고 있으며, 이 악한 사물의 제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류는 마치 예수 당시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분의 경고의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그 당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신 점이 오늘날 인류에게도 적용됩니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태 13:13-15.
15. 오늘날 누가 즐거워할 수 있으며,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15 그 다음 귀절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추종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언하셨읍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음을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눈과 귀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읍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救贖)이 가까왔느니라.” (누가 21:28) 이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얼마는 결코 그들의 죽는 날을 당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을 ‘노아’의 날과 비교하셨읍니다. 마치 ‘노아’와 그의 가족이 그 악한 세상을 멸망시킨 대홍수를 살아남은 것처럼 오늘날도 현명하게 처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멸망시키실 때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결코 죽는 날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불가능한 일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희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16, 17.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며, 지금은 왜 매우 위험한 때입니까?
16 고대 ‘이스라엘’인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는 데 아직도 여생이 있다고 추리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있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자기는 여러 해 동안 더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추리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며 위험한 생각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러하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욱 더 위험한 잘못입니다. 우리는 지금 70세나 80세를 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정상적인 때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읍니다. 한 사물의 제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읍니다. 지금은 매우 위험한 때이고 에베소서 5:15-17의 말씀을 청종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 죽는 날이 이르기 전, 아직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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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하라파수대—1981 |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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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하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10.
1. 언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내 생전에 그 끝이 오지 않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여러 세기를 통해 사람들은 그 끝이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오지 않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기대한 바가 실현되지 않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때였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6:40; 11:24) 오늘날의 “마지막 날”이 오기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사람이 어느 시대에 살든지 간에, 세상의 끝이 가깝든지 멀든지 간에 그의 생애는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디모데 후 4:8; 히브리 11:4-38.
2. (ㄱ) 물질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우리가 죽을 때,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있읍니까? (ㄴ) 그러므로 어떤 교훈이 적절합니까?
2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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