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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75 4/1 147-150면
  • 심해가는 빈곤—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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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해가는 빈곤—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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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파75 4/1 147-150면

심해가는 빈곤—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심해가는 빈곤에 대한 말이 나오면 어떤 사람은 아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요한 12:8.

예수의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들의 처지는 해결책이 없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뜻인가?

세계의 빈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복하려고 노력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점차 심해가고,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반면에, 근년에 많은 나라는 국민 총생산(혹은 국민 소득)이 증가하였다. 1960년대에 남‘아메리카’의 어느 나라는 연간 국민 총생산이 일인당 평균 3.1‘퍼센트’ 증가하였다. 부자들은 더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 중 가난한 40‘퍼센트’는 수입이 감소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정부들의 여러 가지 계획과 사업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합의 ‘크루트 발트하임’ 사무총장의 말은 빈곤의 위협이 후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현대 세계 문명의 가장 강력한 한가지 취약점은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비참하고 깊숙하게 빈곤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빈곤의 양상

그러나 실제적인 빈곤의 양상은 매일 매일 그것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잘 나타나 있다. 한계를 긋기는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이 이 나라에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같은 재산으로도 다른 곳에서는 상당히 잘 사는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서구 각국의 옮겨다니는 노동자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어느 ‘멕시코’계 미국인 가족은 각 농작물의 성숙기에 따라 전국을 이주하면서 밭에서 추수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오랜 시간 노동을 하는데도, 전 가족이 통털어 배관공 초심자만큼도 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도 근근히 살아가기 때문에 하루만 일을 놓치면 먹지를 못하는 형편이다. 그들에게는 빈곤의 위협이 절실한 것이다.

‘유럽’의 부유한 나라에서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기타 ‘유럽’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윤택한 지방에서 일을 하기 위해 이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거리 청소를 하고 변소 청소를 해야 한다. 그들의 “가정”은 보르지와 낡은 자동차 부품으로 만들어진 오막살이이다. 전기도 수도물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 생활에 비하면 진보한 것이다. 도시의 빈민들은 사무실 책상만한 대나무 오두막에 산다. 사방에 파리가 들끓는다. 음식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파낸 찌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시 빈민들은 어떤 시골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한 보고서는 알려 준다. “농토가 없는 노동자들은 시골에서 제한된 노동 기회를 기다리느니보다는 도시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것이 더 잘 먹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식품보다는 도시 쓰레기에 영양가가 더 많이 들어 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심지어 그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어떤 사람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수많은 어떤 사람들은 몸을 의지할 허술한 빈민굴도 없다.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도로를 변소로, 보도를 침실과 부엌으로 사용한다.

왜 이렇게 빈곤한가?

심해가는 빈곤의 위협에 대한 책임은 무엇 혹은 누구에게 있는가? 해답은,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처지는 오로지 그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견해로부터 그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정 때문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이다. 아마 참다운 해답은 그 두 가지 사이에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유는? ‘인플레이션’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애써 번 돈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도 자기를 부하게 혹은 가난하게 만들려고 위협하는 요인이 자기 능력 범위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을 통해 인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열심히 일하였더라면 더 잘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한 나라에서 나온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느린 속도에 따라 일하며, 몇시간 일하고는 도구를 놓고 낮잠을 잔다”고 한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하고 성서 잠언 6:9에서는 질문한 다음, 11절에서는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지상의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하여, 혹은 간염, ‘말라리아’, 황열병 등의 질병으로 인하여 쇠약해 있다. 그들은 강한 사람들처럼 힘든 일을 못한다. 그리고 성서는 또한 휴식이 필요한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전도 4:6, 신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게으르거나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생활을 위하여 노동을 하는 사람들 약 2천 1백만명을 “가난”한 사람들로 분류하고 있다. “노동하는 가난한 자”라는 말이 최근에 생겼다. 옮겨 다니는 노동자들은 가난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려고 하지 않는가? 조사에 의하면, ‘캘커타’의 노상(路上) 생활자들의 75‘퍼센트’는 생활을 위하여 노동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입은 너무나 미미하여 그들과 가족이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보수가 적은 것은 반드시 교육, 경험, 기술이 없기 때문만도 아니다. 흔히는, 어디서 일하느냐가 그의 수입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 중 하나이다. ‘보스톤’ 대학 경제학자 ‘배리 블루스톤’은 이렇게 말하였다. “자동차 공장의 수위는 생활할 수 있는 보수를 받고 있다. 어떤 섬유 공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은 최하급 보수를 받을 뿐이다.” 그러나 자동차 공장의 수위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더나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흔히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자리를 차지하는 문제이다.—전도 9:11.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그것은 또 다른 면으로 큰 위협이 된다. 가난은 그 자체의 문화—흔히 그 자체의 식품, 언어, 의복, 습관—를 만들어 낸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흔히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미국 흑인 신문인 「콜럼버스 타임즈」지는 ‘월터 와싱턴’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였다. “빈민굴을 없애려면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에서 빈민굴을 없애도록 돕지 않으면 안된다. ··· 빈민굴에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고 그의 가치 체계를 변경시키지 않는다면, 그 집은 빈민굴이 될 것이다.” 빈민굴 생활에 젖은 가난한 사람은 달리 교육을 받지 않는 한 새 집을 흔히 빈민굴로 만들 것이다.

이 “가난한 사고 방식”에 강력한 자존심이 곁들이면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빈곤의 위협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서부 ‘유럽’의 어느 가난한 지방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빵과 양파만 먹는다. 그러면서도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존심을 갖기 위하여 산더미처럼 빚을 진다.” 부유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게 느낄지 모른다. 그렇지만, 실상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예가 많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의 결핍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은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위협에 대해 관심이 없다. 때로는 사람들이 고의로 불친절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들의 시간을 차지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빈곤을 간과해버리기가 일수다.

사회 및 종교적 가르침은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였다. “적자 생존”이라는 사상을 수반한 진화론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하는 자”로서 도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예정설에 관한 그릇된 종교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숙명론적 견해를 갖게 하였다. 교직자들은, 영적 특성들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 재물이 결핍되면 교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던 견해와는 실로 대조적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던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예수와 예수의 사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때가 되면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며, 빈곤의 위협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5; 6:10; 11:5; 24:20, 21; 요한 13:29.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분이 그들에 대해 동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의 말씀은 경건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알려 준다.

예수께서는 ‘베다니’라는 도시에 사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태 26:6-13; 마가 14:3-9; 요한 12:2-8.

‘마리아’는 자기의 방식으로 예수께 감사의 인식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생애에 이어서 자기의 자산을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부면이 많이 있다. 얼마 안가서 죽으실 메시야 예수께 감사함을 나타내는 일은 바로 그때 나타내는 것이 가장 좋았다.

또한,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빗대어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명 15:11) 그 법을 올바로 적용했다면 어느 ‘유대’인도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가난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 재산은 그들에게서 영구히 빼앗아갈 수가 없었다. (레위기 25장 참조.) 하나님의 법에 대한 충실한 순종은 많은 경우의 빈곤을 예방하였다. (신명 15:4, 5)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하였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신명 15:7, 8.

예수께서는 자기 추종자들 가운데서 빈곤이 즉시 일소되지는 않을 것을 아셨다. 그의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갖가지 환경에서 생활할 것이다. (고린도 전 7:17-24) 빈곤은 실제적인 문제였으며, 그들은 그것을 대처해야 하였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의 문헌을 보면 그들이 그 도전을 극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린도 전 16:1, 2; 요한 1서 3:17, 18.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하실 때의 “항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을 ‘끝없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항상”이라는 단어(희랍어 ‘판토테’)는 그 단어가 나오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제한된다. 예로서 누가 복음 15:31에서 탕자의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라고 말하였는데, 그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부패한 경제 제도가 이 땅을 다스리는 한 ‘빈곤은 항상’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적은 이러한 극단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곧 끝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들도 여러 가지 경제적 환경 가운데 처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형제 자매들로 보며, 서로 간에 사랑의 관심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편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성서 원칙들을 생활에 적용시키면, 그릇된 습관, 예를 들면, 도박, 담배, 마약 등의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습관에 빠진다면 더욱 가난해질 뿐이다. 그들은 부지런하다는 평판을 받으려고 하며, 따라서 직장을 구하기가 더 용이하게 되도록 한다. 장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분개한 정신을 품지 않는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은 당장 빈곤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간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마음이 완고해져서 그들에게 배려를 나타내라는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빈곤이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을 위협할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에서 어떤 변화를 해야 하는 반면, 또 다른 변화도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갖는 태도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다윗’의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적절하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당신은 모든 빈곤의 위협이 사라진 때에 살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현재 그 빈곤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건전한 충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 잡지를 정기적으로 읽도록 하라.

[147면 삽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한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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