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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 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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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 화목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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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파77 11/15 512-517면

“서로 화목하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 9:50.

1.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는 것은 왜 바람직합니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는 것 곧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바람직한 일입니다. 의견 충돌, 경쟁, 불화가 있으면 공동 임무를 수행하는 데 차질이 생길 수 있읍니다. 흉기를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 사이의 “냉전”은 관련된 모두의 패배를 의미할 수 있읍니다. 서로 화목하다면 모두가 승리를 거두고 성공하는 자가 되며, 올바로 수행된 활동으로부터 만족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어떠한 선생이셨읍니까?

2 한 ‘티임’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구성원 혹은 결혼한 부부나 육적인 가족이 “서로 화목하라”는 말에 유의한다면 분명히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고대의 한 선생으로서 궁극에 가서는 세계 평화가 올 것을 내다 보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활동을 어떤 학교나 대학 강의실에만 제한시키지 않았읍니다. 그분은 옥외에서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셨고,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인 모임에서 가르치셨읍니다. 그분은 수집된 거룩한 기록 즉 자신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된 영감받은 성경을 교과서로 사용하셨읍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19세기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 보존되었으며 1천여개 언어로 번역되었읍니다. 증거들에 의하면 이 유명한 선생은 ‘불타’나 공자가 아니라 바로 ‘다윗’ 왕과 족장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것은 왜 놀라운 일입니까?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읍니까? 자기와 함께 2년 이상을 다니면서 가르치는 일에 참여한 일단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분은 열 둘로 이루어진 이 집단을 사도(使徒)들이라고 부르셨읍니다. 이 명칭은 그들을 택하신 목적을 잘 지적합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과 같은 선생이 되어야 하였으며, 그분은 그들을 국경을 넘어서까지 보내서 모든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 자기의 제자를 삼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전세계적인 회중을 조직하려고 하셨읍니다. 그 사도들은 그 회중의 기초석이 될 사람들이었읍니다.

4. 그 사도들은 평화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았읍니까? 그렇다면 화목 즉 평화에 관하여 새삼스럽게 이런 교훈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도들은 화목 곧 평화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 전해에 그들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산에서 그분의 유명한 산상 수훈을 들은 일이 있었읍니다. 그 연설에서 그분은 몇 가지 행복을 지적하셨는데 그 중 한 가지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마태 5:9) 그런데, 예수께서 해변 도시인 ‘가버나움’에서 이 선택된 제자들에게 다시 “서로 화목하라”고 교훈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 9:50) 왜 그러한 말씀을 자기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였읍니까? 이러한 교훈을 하도록 자극하는 일이 있었음에 틀림 없읍니다. 서로간의 좋은 관계를 해쳐 그들의 공동 목표의 유익을 반하는 어떤 일이 있었음에 틀림 없읍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를 이해하려면 뒤로 돌아가 마가복음 9장에 있는 그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읍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그 교훈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익한지를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5.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의 높은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 후에 악귀들린 어떤 경우가 다루어졌읍니까?

5 한 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요단’ 강 상류에 가까운 북쪽 지방인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를 여행한 일이 있었읍니다. ‘요단’ 강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흘러 ‘갈릴리’ 바다로 들어 갑니다. 그곳 즉 ‘레바논’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헤르몬’ 산으로 믿어지는 높은 산에서 정한 때에 하나님의 왕국에서 얻게 될 영광을 예시하는 예수의 기적의 변형이 있었읍니다.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이 주님의 이러한 변형을 목격하였읍니다. 그 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 예수께서는 자기가 없는 동안 나머지 9명의 사도들이 고치지 못한 악귀들린 환자를 다루시게 되었읍니다. 괴로움을 당하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미칠 듯이 간청하는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예수께서는 특별히 고집센 악귀를 내쫓으셨읍니다. 그리하여 예수께 대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크게 보상을 받았으며 강화되었읍니다.—마가 9:14-29; 베드로 후 1:16-18.

6. ‘가버나움’에 도착한 후 사도들은 예수의 물음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읍니까?

6 그 근방에서 남쪽으로 ‘갈릴리’ 지방을 지나 ‘가버나움’이라는 도시까지는 약 40‘킬로미터’의 거리였읍니다. 예수와 그의 열 두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조용히 도보로 그 도시를 향해 여행하였읍니다. 그 도시는 이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본부로 삼으셨기 때문에 “본 동네”로 불리우게 되었읍니다. (마태 9:1) 그 해변 도시로 오는 도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음과 같은 「마가복음」의 기록으로 추측할 수 있읍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마가 9:33, 34.

7. 왜 그들의 논쟁은 자연히 왕국 문제와 관련되었읍니까?

7 아마도 도중에서 사도들은 지도자인 예수의 뒤에 처져서 따라갔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해서인가 그분은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으며 그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음을 아셨읍니다. 그분은 마땅히 추종자들 사이의 논쟁이 해결되도록 하셔야 하였읍니다. 그 문제에 대한 그분의 접근 방식을 보면 그들의 토론점을 그분이 알고 계셨음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마가 9:30-3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바로 전에 말씀하신 내용으로 볼 때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일이 절정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분이 메시야 즉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으로 믿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분이 왕국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높은 산에서 변형이 있기 직전에 그분이 그들 열 둘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 9:1.

8. 그와 관련하여 사도들은 왜 서로를 비교하게 되었읍니까?

8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조속히 설립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 왕국에서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각자가 받을 공적인 지위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읍니다. 그러한 문제가 관련되면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자기의 적대자나 경쟁적인 후보자가 아닌 바로 자신을 과장하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자신들을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 지위나 저 지위에 누가 적합하냐 하는 점만이 아니라 메시야의 바로 다음 지위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도 토론되었읍니다.

9. 사도들 중 아무도 예수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9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인식이 깊어서 왕국에서 그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자 하는 경우가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그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경우였읍니다.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한 토론이 있을 때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기심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 후 야심만만한 그 사도들이 “잠잠”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 토론이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이기심, 자기 유익을 구하는 성품,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태도 등을 나타내었음을 깨달았읍니다.

10. 예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 어떠한 점을 나타내셨으며, 어떠한 지도적인 법칙을 말씀하셨읍니까?

1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로부터 고백을 들을 필요가 없으셨읍니다. 의미있는 그들의 침묵은 그들이 당황하였음을 드러내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분별하실 수 있는 예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토론하였는지 논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셨읍니다. 그분이 다음으로 취하신 점으로 보아 그 점을 알고 계심을 나타내셨읍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가 9:35)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기의 왕국에서 지위와 관련하여 어떠한 법칙이 적용될 것인지 밝히셨읍니다.

11. 그러므로 예수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연합하는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이 세상 나라의 정치가들과 달라야 하였읍니까?

11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 나라들과는 달라야 하였읍니다. 세상 나라들에서는 정치가들이 다른 사람을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이기적인 야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거만함 즉 겸손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정신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셨읍니다.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할 제자들은 그분과 같은 정신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은 천적 왕국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찬탈할 것을 생각지 아니 하시고, 신세]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형주]에 죽으심이라.”—빌립보 2:5-8, 신세 참조.

12.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지도적인 법칙을 어떻게 실례를 통해 나타내셨읍니까?

12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참으로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까? 어떠한 피조물도 그보다 더 훌륭한 겸손의 본을 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러한 낮은 지위를 받아들이고 자기의 지적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섬기심으로써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첫째 가는 지위를 받으셨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높여짐으로써 창조주 바로 다음 가는 지위에 있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사실은 가장 높으신 천적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 위하여 찬탈할 것을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일치하였읍니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예수께서는 분별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계셨읍니다.—시 148:13.

13. 예수의 지도적인 법칙에 의하면 자신을 조직에서 가장 가치있는 성원으로 만드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그러합니까?

1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법칙의 예외로 만들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천적 왕국에서 함께 연합할 자들 모두가 따라야 할 완전한 본으로 자신을 제공하셨읍니다. 사실상 그분의 왕국의 지적 신민이 될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겸손과 봉사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가치와 중요성과 관련하여 누가 조직에서 제일가는 위치에 있읍니까? 그는 모든 형태의 봉사를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이기적인 동기로 첫째가 되기를 구한다면 그는 조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각종 봉사를 하려고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아주 천하게 보이는 봉사를 기꺼이 수행하려면 자신이 조직에서 “뭇 사람의 끝”이라고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본질적인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봉사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신을 가장 가치있는 성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14. 그처럼 섬기는 사람은 사실상 어떻게 모든 사람 중에서 “첫째”가 될 것입니까?

14 그러므로 이처럼 겸손하고 남에게 봉사하려는 사람이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 사람들은 아주 섭섭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의 봉사의 아쉬움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가 지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섬기는 면에서 생각할 때 그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진정으로 “첫째”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처럼 평가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이 평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영접함

15. 어린 아이를 예로 들어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15 사람들이 외견상 아무리 열등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에 관계 없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것은 화목을 위해 중요합니다.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실례를 통해 이러한 점을 강조하셨읍니다. 마가 9:36, 37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16. 예수께서는 ‘나사렛’에 있는 그의 가정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16 기록은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음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지적 가족으로 보면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이부 동생(‘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둘 혹은 그 이상의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하였을 것입니다. (마태 13:53-56) 그분은 불완전과 약점이 있다고 하여 그들을 멸시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고 솜씨있는 목수로서 부지런히 일하였읍니다. (마가 6:3) 그분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특성과 온전히 성장한 사람들의 어린 아이와 같은 특성을 높이 평가하시게 되었읍니다. 실례를 드는 데 그분은 아이들을 좋은 면으로 사용하셨읍니다.

17. 접근하기 쉬운 사람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7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귀찮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만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책임있는 지위와 관련하여 무게와 위엄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한 어린이나 어린 아이와 같은 성인에게 주의를 기울일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이지적인 사람이라면 어떠합니까?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들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까?

18. 왜 그처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18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 주기를 거부한다면 커다란 특권과 축복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그를 실례로 사용하셨읍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도들과 같은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상징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읍니까? 예수께서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로 영접받으시는 것처럼 생각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상도 역시 참됩니다.

19. 그처럼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누구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우리가 초라하게 보이는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기 때문에 수행한다면 그 일을 하기가 더 쉽고 더 즐거울 것입니다. 그 행동에는 고상한 자극제가 있읍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천적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신 말로 알 수 있읍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함으로써]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가 9:37) 메시야가 되도록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그분의 천적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천적 아버지는 분리될 수 없읍니다. 그분들은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행하는 것을 자기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영접하는 자를 축복하심으로써 그러한 영접이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받아들임을 나타내십니다.

20. 이러한 원칙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우리가 대할 때 어떻게 적용되며 그 왕국에 참여하려면 어떠한 특성이 반드시 필요합니까?

20 이러한 원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특히 성서 이해에 있어서 혹은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으로서 소위 “어린 아이”인 사람들을 다룰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영감받은 첫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말씀에 속한, 신세]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 전 2:2, 3) 우리는 “말씀”을 “갓난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이 자라서 구원에 이르고 장성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그것에 고착하게 할 수 있읍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기꺼이 영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왕국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입니다.—마태 18:2-4; 누가 18:16.

21. 겸손한 정신과 태도 그리고 경쟁과 다툼이 없는 것이 회중에 어떤 유익을 줍니까?

21 혈연적인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중 성원들이 겸손하게 어린 아이와 같은 정신과 태도를 나타낸다면 서로간의 관계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기적인 경쟁이나 맹렬한 다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평온한 분위기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아주 비천하게 보이는 일에 있어서까지도 기꺼이 자진적으로 섬긴다면, 참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안녕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전체 회중을 세워 주고, 강화시키며,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도록 움직입니다.

22. “서로 화목”하게 하는 강력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22 그러므로 아주 어린 사람이나 아주 수줍은 사람, 성서 진리와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 아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회중은 그러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따뜻하게 포용해야 합니다. 그러한 회중 환경에서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풍성할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화목”하도록 회중 성원들을 돕는 강력한 요소입니다. 그로 인해 형제들이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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