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을 위한 견고한 기초
1. 이 세상에 관한한 여호와의 백성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헌신하고 침례받은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읍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 현재와 미래의 그들 자신도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 있읍니다. 그들의 현재와 미래, 그들의 전체 생명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새 사물의 제도에서의 생명에 대한 희망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배수진(背水陣)을 친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현재나 장래에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하였읍니다.
2.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또 “형제”라고 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였으나 어떻게 느꼈읍니까?
2 이에 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사도는, 당시 그가 감옥에 갇혀 있었고 조롱과 반대 때문에 소위 그리스도인 “형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를 등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 후 1:12.
3. 여호와의 “날”이 다가옴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읍니까?
3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부 바라는 날로서 하나님께서 땅을 깨끗케 하시고 자신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실 날입니다. (마태 6:10) 우리는 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 때는 분명코 인류에게 해방과 안식의 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읍니까?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읍니다.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알려 주고 있으며,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 2:2; 히브리 4:1, 4, 9) 우리는 그 약속을 참으로 믿습니까?
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들 앞에 어떠한 전망이 있었으며, 그러나 그들은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았읍니까?
4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석방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것이며, 그들의 생전에 약속의 땅에서 노예 생활과 압제를 벗어난 아름다운 안식을 누리리라는 약속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낙원과 같은 동산으로 보존해 두신 지역에서 인생을 즐기게 되어 있었읍니다. (신명 11:11, 12; 창세 13:10)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이 심히 부족하였읍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정도로 믿음이 없었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이 살아 있지 않으며, 죽어 있는 약속이고,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미약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
5, 6. (ㄱ)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약하지 않았음을 어떤 사실이 증명합니까? (ㄴ)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온전히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4:12에 기록된 유명한 말을 한 것은 그 일과 관련해서였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
6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그 말씀 곧 약속은 죽었거나 약하지 않았읍니다. 사실, 믿음을 나타내었던 소수는 약속의 땅의 “안식”에 들어갔었읍니다. (민수 14:5-9, 30; 여호수아 14:6-10)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의로운 새 제도에서의 생명에 관해 하나님의 귀중한 약속을 받았읍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살아있는 세대가 “큰 환난”을 겪을 세대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읍니다. (마태 24:34)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종의 큰 무리가 그 환난을 통과하여 잇따르는 새질서에 들어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읍니다. (계시 7:9-14) 그 “말씀”은 살아있으며 여호와께서 목적하신 모든 것을 성취할 능력이 있읍니다. 그것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5:10, 11)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세세한 일들을 꾸준히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과 달라 그 “말씀”의 세부점들을 잊으시거나 잠들지 않으십니다. (민수 23:19) 어떻게 하여 확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7, 8. (ㄱ)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에 대한 부가적인 증거를 몇가지 말씀하십시오. (ㄴ) ‘베드로’는 그 당시 그것의 확실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7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읍니다. 성경과 역사책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례들이 가득 차 있읍니다.a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할 때에, 하나님의 마련에 희망을 두고 그분의 약속을 믿을 때에, 우리 생활에 좋은 영향이 오고 우리가 행복하게 되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떠나서 세상과 동조한다면 우리 앞에 어떤 전망이 있겠읍니까?—마태 16:25, 26.
8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점 곧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의 증거에 있어서,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상실할 것을 예수와 ‘바울’ 및 ‘베드로’는 예언하였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제도에서 이 배도 현상을 뚜렷이 보고 있읍니다. (마태 13:38, 39; 사도 20:29, 30; 데살로니가 후 2:3; 베드로 후 2:1-3) ‘베드로’는 또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꾸며댄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격한 사실들을 따르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예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읍니다. 실제 성취를 목격함으로써 예언이 그들 목전에서 더욱 확실해졌읍니다.—베드로 후 1:16-19.
9. 하나님의 예언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사도들에게 중요하였던 바와 같이 왜 우리에게도 중요합니까?
9 19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지었읍니다.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예언]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베드로 후 1:19)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에 면밀하고 집중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 가운데 선언하신 그대로 지금 우리는 세상이 당하고 있는 난관을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온 땅에 좋은 소식이 확장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환난”을 생존할 “큰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균형잡힌 견해를 갖도록 조심함
10. (ㄱ)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 관해 무엇을 드러냅니까? (ㄴ) 이 점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자문해야 합니까?
10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면 “큰 환난”을 통과하여 그 후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맞이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소식은 참됩니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의해 이 땅은 낙원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양날 가진 칼처럼 예리’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 마음 속의 생각과 의향이 어떠한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분을 섬깁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낙심’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이 주로 우리 자신을 편안하게 해 줄 어떤 날짜만 바라봅니까? (갈라디아 6:9) 우리는 여호와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 교제함으로써 받는 좋은 것들을 모두 깊이 인식합니까? 우리가 배운 내용들은 우리의 가정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읍니까? 우리는 진리를 배운 결과 얻게 된 참다운 벗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마가 10:29, 30.
11.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행로에 관하여 어떤 실수를 범하였을지 모릅니까?
11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중에 어떤 날 혹은 어떤 해에 특정한 일이 발생하리라는 그릇된 견해에 따라 자기 생활을 계획한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수행해야 할 일을 연기하였거나 등한히 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 연대가 특정한 날짜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사물의 제도의 끝에 관한 성서의 경고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12, 13. 누가복음 21:34-36에 있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권고하신 것이 아닙니까?
12 끝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하여 예수의 말씀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특정한 날을 예상하라고 하였읍니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하였읍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누가 21:34-36.
13 이 말씀은, 재정적인 문제와 세속적인 활동을 축소하여, 우리가 끝이 된다고 예상하는 특정한 날까지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뜻입니까? 우리의 집이 심히 부서져 있는데도, 그것이 몇 개월만 더 필요하다는 가정하에 그대로 놔두어야 합니까? 가족 중 한 사람이 특별한 치료를 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우리는 ‘이 사물의 제도의 끝이 매우 가깝기 때문에 뒤로 미루어야겠다’고 말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권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14. (ㄱ) 예수와 사도들이 마지막 때에 관하여 말하였을 때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태도를 권고하였읍니까? (ㄴ) 끝이 가깝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에서 큰 변화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14 그러면 예수와 사도들이 끝에 대한 징조에 깨어 있으라고 말하였을 때에, 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을 때에 무슨 의도로 말한 것입니까? 그들의 말씀은 그날이 여호와께서 목적하신 때보다 조금도 늦어지지 않을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라는 뜻이었읍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것을 생각하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도록 해야 하며, 우리가 성서 원칙에 따라 생활하는가 조심하고, 왕국 소식을 부지런히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긴급함을 확신시키라고 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3:11, 12)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대한 숭배에서 발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읍니다. 아마 우리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였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이 매우 가깝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으로 중대한 발전을 할 필요는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만일 현 제도에서의 헛된 활동으로부터 시간을 ‘살’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시간을 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었읍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에베소 5:15, 16.
15. 만일 어떤 사람이 특정한 날짜에 끝이 올 것이라는 견해에 따라 생활을 영위하였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날짜에 고착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이 보통 수행하는 일상적인 일, 즉 우리와 우리 가족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날”이 와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들의 책임을 전부 이행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은 결과로 실망하였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거나 그 말씀이 그를 속여 실망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릇되게 이해하였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를 조절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6. 만일 당신이 특정한 날짜를 중요시하였다면 그 입장에서 어떠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읍니까?
16 그러나, 만일 당신이 특정한 날짜를 크게 중요시하였고, 그렇지만, 칭찬할 만하게, 때의 긴급성과 사람들이 들어야 할 필요성에 주의를 집중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은 일시적으로 약간 실망을 느낀다면, 그러면 당신은 참으로 패배자입니까? 참으로 손해를 보았읍니까? 이 양심적인 행로를 따름으로써 이득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참으로 장성되고 이치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읍니다.—에베소 5:1-17.
17.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정확한 날짜가 우리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을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17 세상이 아주 갑자기 끝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누차 말합니다. 사도는 그 점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주[여호와]의 날[심판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 전 5:2)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이 ‘도적을 맞’지 않도록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 24:42-44) 예수의 이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날을 그 날이 실제 닥치기 전에는 결코 말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사실상 그 날은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입니다.—누가 12:39, 40.
나라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점에 속지 말라
18. “큰 환난”이 돌발하기 전에 각처의 모든 나라가 거의 아사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실제 경고하신 점에 유의하십시오. 예수께서는 “큰 환난”이 임박하면 세상 상태가 악화되어 각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거의 굶어죽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읍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때에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마음이 둔해질 위험이 있겠읍니까? 또한 예수께서 홍수 전 ‘노아’ 때의 상태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기 전 ‘롯’의 때의 상태를 예로 드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에 사람들의 생활이 정상적인 것 같이 보였음을 말씀하셨읍니다. 그들에게 갑자기 멸망이 닥친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였읍니다.—누가 17:26-30.
19. 설사 나라들이 일을 꾸려나아갈 수 있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입니까?
19 그러므로 우리는 “큰 환난” 직전에 이 세상 제도가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거나 거의 몰락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읍니다. 이 제도가 심각한 위기로부터 소생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그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날이 연기되는 것처럼 거기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제도가 무한히 계속될 것처럼 세상과 더불어 ‘재건’을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3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영감받은 말씀을 보면,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이르러’ 도망할 가능성 조차 없게 되기 직전에 이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칠 것입니다.
20, 21. (ㄱ) 우리가 대홍수 전의 상태와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집짓고 하는 일에서 무엇을 피하고자 합니까? (ㄴ) 데살로니가 전서 5:4-6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씀은 임박한 그 “날”의 위험을 피하도록 무슨 경고를 해 줍니까? (ㄷ) ‘바울’은 로마서 13:11-14에서 깨어 있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20 먹고 마시는 일,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일,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는 일 등이 나쁠 것은 없읍니다. 그러나 나쁜 것은 ‘노아’ 시대나 ‘롯’ 시대 사람들처럼 하는 것, 즉 그러한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의로운 표준을 망각하고 우리 생활에서 육체적인 것을 첫째로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로와는 반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데살로니가 전 5:4-6.
21 깨어 있고 또 우리가 어두움의 아들들이 아니라 “낮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울’은 로마서 13:11-14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2. 그 “날”이 언제인가를 모르므로 우리는 경계를 게을리해야 합니까?
22 그러니 우리가 “큰 환난”이 돌발할 시기를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의 천년 통치가 시작할 시기를 모른다는 사실이 오늘날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깨어 있고 경계하고 대비하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증가시키고 높여줍니다. 만일 정확한 때를 안다면, 우리는 아마 그 때가 가까와지면 대비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에서 느슨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 특히 하나님의 아들의 충고는 그 점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23. ‘바울’은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행로를 걸으라고 말합니까?
23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도의 충고는 우리에게 강력히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며 서로 덕을 세우시오.” (데살로니가 전 5:11, 새번역) 우리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형제들만이 아니라 회중 밖에 있는 사람들도 도와 그들이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도록 올바른 길을 가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21:36) 부모인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영적으로 인식이 깊고 깨어 있는 좋은 본을 보여 그들도 깨어 있고 우리와 함께 대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증가된 확신을 가지고 전진함
24. 끝이 가까운 사실에 대하여 연대는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읍니까?
24 성서 속의 연대는 좋은 목적이 없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대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 역사의 6,000년 끝에 살고 있읍니다. 이 악한 사물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 연대적 사실은 남은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더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강력하며 우리를 의로운 새 질서로 인도해 주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기초로서 이러한 이유들을 더욱 뒷받침해 줍니다.
25. 확신을 위한 굳건한 기초가 있으니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2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와 의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오늘, 그리고 매일 우리가 깨어 있고 영적으로 살아 활동함을 나타내야 하겠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장차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엄숙한 “말씀”을 주셨읍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실망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10:11, 신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을 풍성히 축복하시고, 당신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그분들을 계속 충실히 섬기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각주]
a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책(영문) 343-346면 참조,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1963년) 여기에 하나님의 예언이 역사적으로 성취된 사례가 많이 열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