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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숭배—성공을 얻게하는 생활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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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숭배—성공을 얻게하는 생활의 도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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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파76 7/15 325-329면

참 숭배—성공을 얻게하는 생활의 도

“이 율법책을 ··· 주야로 ···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8.

1. (ㄱ) 대부분의 종교는 어떤 종류의 숭배를 중심으로 하고 있읍니까? (ㄴ) 참 숭배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부분의 종교들은 숭배면에 있어서 의식(儀式)을 강조하며, 숭배는 생활의 도(道)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입으로 섬기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 활동을 보면 주기적인 의식적 “예배”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러한 의식적 숭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값비싼 시설 비용을 위하여 돈을 간청하는 것이 수반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참 숭배는 의식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숭배자들과의 정기적인 연합이 관련되어 있지만 또한 기타 모든 생활면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그것은 생활의 본 곧 생활의 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서(聖書)는 참 그리스도교를 “도(道)” 그리고 “진리의 도”라고 합니다.—사도 9:2; 19:9; 베드로 후 2:2.

2. (ㄱ) 예수께서는 숭배가 의식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말씀하셨읍니까? (ㄴ) “영으로” 숭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 예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 참 숭배를 생활의 도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읍니다. “참된 예배(숭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 그에게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 4:23, 24, 새번역) 예수께서 “영으로 숭배”하는 것을 “진리로 숭배”하는 것과 똑같이 강조하신 사실은 숭배에 있어서 또다른 중요한 면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숭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그러한 숭배를 산이라든가 도시와 같은 보이는 것들을 보조물로 사용하는 숭배와 대조하셨읍니다. (21절) 참 숭배자는 보거나 접촉해야 하는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장소나 그의 주위에 있는 것들에 관계없이 숭배로 가득찬 “영”, 또는 영적으로 숭배 혹은 숭배의 영을 유지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으로 숭배합니다. 그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신에 있는 불변의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을 섬길 마음을 갖게 됩니다.—고린도 후 5:7.

3.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숭배받기를 원하시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었읍니까?

3 이것은 숭배가 원래부터 그러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목적하신 방법과 일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완전하게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하여 어떠한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주로 창조주의 뜻을 충실하게 행함으로써 창조주를 숭배 혹은 섬기게 되어 있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뜻”을 그들에게 알려 주셔서 그들이 생활에 관한 실상 혹은 진리와 일치하게 살 수 있게 하셨읍니다. (창세 1:28, 29; 2:16, 17, 19-25; 마태 19:4, 5) 때가 흐름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들의 지상의 집과 가족과 활동 범위를 적당히 확장하는 데 필요한 부가적 진리를 그들에게 알려 주실 의도를 가지셨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충실하게 순종하는 것은 참 숭배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첫 인간 부부가 이 길을 택하였더라면 이러한 진리들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위한 생활의 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의 도는 성공을 얻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 곧 여호와의 주권적 지위와 생명을 수여하시는 능력을 포함한 사물의 실상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므로 실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숭배에 부가된 것들

4. 숭배에 의식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그러나 죄와 불순종이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참 숭배는 인류가 직면하게 된 새로운 사실에 부합하도록 얼마의 새로운 특징이 필요하게 되었읍니다. 얼마의 의식(儀式)이 포함된 이들 새로운 숭배의 특징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임시적인 것, 비유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읍니다. 이제 불완전하게 된 타락한 인류와 완전하신 창조주 사이에 장벽이 있게 되었읍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새로운 관계를 분명히 의식해야 하였으며, 이 장벽을 제거할 하나님의 방법이 명백히 알려져야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들 곧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있게 된 사물의 실상을 예시하기 위하여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희생과 제사직 및 성소가 등장하게 되었읍니다.

5. (ㄱ) 성서는 율법 아래 있던 의식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ㄴ) 그것들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끝났읍니까?

5 그러나 이 모든 마련은 다만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히브리 10:1) 그러므로 의식과 희생 자체가 온전한 진리가 아니었읍니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마련들은 “때”가 되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 뜻이 명백해질 때,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가 되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이 장막은 현 시대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 장막의 규례를 따라 예물과 제물을 바칩니다만 그것이 예배하는 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다만 ··· 개혁의 때가 오기까지만 적용되는 육적인 규칙(법적 요구, 신세)들입니다.” (히브리 9:9, 10, 새번역) 그리하여 예수께서 오심으로 “법적 요구”가 완수되었을 때 의식에 따른 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폐하여지게 되었읍니다. 이제 그러한 숭배는 본체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하였읍니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그 본체는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2:16, 17) 그리하여 예수 자신이 ‘길과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요한 14:6; 1:17.

불변의 진리는 언제나 요구되었다

6. 언제나 참 숭배의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었읍니까?

6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이러한 “법적 요구”가 얼마 동안 필요하기는 하였지만 여호와의 숭배에 있어서 주로 강조된 것은 언제나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었읍니다. 믿음, 의, 공정, 피흘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 진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에 순종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신임장이었읍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참이었읍니다. (시 24:3-6; 15:1-4; 잠언 3:32) 진리의 이러한 기본적 원칙들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존속해 온 생활의 도입니다. ‘미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호세아 6:6; 사무엘 상 15:22.

7. (ㄱ) 여호와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ㄴ) 우리가 ‘자연히’ 여호와의 길에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독단적인 것이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피조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동료 인간에 대하여 해야할 일입니다. 진리의 길에서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첫 조상을 창조하실 때 넣어 주신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로마 2:14, 15) 이 양심 곧 선악에 대한 내적 감각은 자연히 진리의 도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람 속에 남아있는 유전적 양심의 흔적에 옳게 들리고 옳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읍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참이 아닌, 거짓말)을 버리고 ···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린도 후 4:2; 5:11; 6:4-10.

성공을 얻게 하는 생활의 도

8. 진리와 억측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8 생활의 도로서 진리를 행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가치있는 혜택을 상으로 받게 됩니다. 진리는 실제로 성공합니다. 과학자들이 과학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는 먼저 실험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제적인 방법 즉 기구의 설계라든가 질병의 치유 같은 성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활 면에 있어서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실행 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성인들, 철학자들 및 종교 지도자들은 이 실험에서 실패하였읍니다. 그들의 주장이나 집필 내용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읍니다. 그것이 아마 설복력있는 언어로 묘사되었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논증으로 뒷받침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활에 관한 그들의 이론의 대부분은 진리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이론은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철학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를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읍니다.

9. 참 숭배는 성공을 얻게 하는 생활의 도가 된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9 이와는 반대로 고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확신과 목적을 가진 생활에 관한 성서의 기록과 오늘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참 숭배만이 참다운 성공을 얻게 하는 생활의 도임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참 숭배자들을 그들의 동시대의 사람들과 구별해 주었읍니다. 이미 전 기사에서 고려한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 안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적인 모습’에 충실히 고착하는 면에 있어서 그 당시 매우 뛰어나 있었읍니다. (로마 2:20, 새번역; 여호수아 1:8; 느헤미야 9:13) 제1세기 그리스도교 역시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활의 도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읍니다. 유명한 역사가 ‘존 로오드’는 그의 저서 「고대 로마 세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참 승리는 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로 만드는 데서 보게 된다. ··· 우리에게는 그들의 흠없는 생활과 나무랄데 없는 도덕, 선량한 시민이 된 일, 그리스도인의 은혜의 증거가 있다.”

“진리의 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성공하였고 오늘날에도 그것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서 성공하고 있읍니다.—베드로 후 2:2.

진리가 성공하는 방법

10, 11. (ㄱ) 많은 종교 교직자들은 생활의 도로서의 성서의 도덕 표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ㄴ) 그들의 견해가 효력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10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신 도덕”을 옹호함으로 성서의 참 표준을 약화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음행과 간음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나쁘며 죄라고 알려 줍니다. (고린도 전 6:18; 데살로니가 전 4:3; 출애굽 20:14) 그러나 교직자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은 ‘미시간 대학교’ ‘성 마리아 교회’의 ‘가톨릭’ 교목이 대학교 조언난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을 미루어 왔고 “때때로 동침한 일이” 있는 약혼한 남녀에 관하여 이 사제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음행자들이라고 부르고 쉽게 그들을 그러한 부류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 엄격한 법적 견해로서 그들은 법조문을 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법이 간직하고 있는 가치를 범하였는가? 그들은 간통자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 우리 중에 마음 속의 고독의 외침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그리 옳지 않은 방법으로 만족을 느끼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 사제와 그외에 그와 같은 종교 교직자들의 인도를 받는 많은 사람들은 틀림 없이 “그리 옳지 않은 방법으로 만족을 느끼는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의 도는 성공을 얻고 있읍니까?

11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나 있는 진리의 도는 결코 조롱을 받을 수 없읍니다! 사람이 만든 그러한 사고 방식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혼, 가정 파탄, 만연한 성병, 기타 존귀한 결혼에 충실하지 않을 때 오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거두게 됩니다. (갈라디아 6:7, 8; 히브리 13:4) 이 점에 대한 한 국면을 예시하는 것으로 「의학 세계 뉴우스」지에 기고한 한 의사는 엄격한 성적 태도로부터의 해방은 “꼭 자유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 하더라도” 질병으로부터 자유와 같은 “다른 자유의 희생”이 수반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도덕은 흔히 건강의 문제”라고 확언합니다.

12, 13. (ㄱ) 흡연과 (ㄴ) 수혈에 있어서 진리를 생활의 도로서 적용할 때 왜 성공을 거두는지 설명하십시오.

12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그리고 오염되지 않게 유지하는 데 관한 성서 원칙을 적용하는 것 역시 진리가 실용적으로 효력을 나타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참 숭배자들은 신체에 가져오는 담배의 불결하고 해로운 영향을 피합니다. (고린도 후 7:1; 로마 12:1) “온 영혼”과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그들의 욕망은 노예와 같은 담배의 상용으로 그들의 수명을 짧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가 12:29, 30; 로마 6:19) ‘미국 국립 마약 남용 연구원’ 이사 ‘로버트 듀폰드’ 박사는 최근에 담배를 “아마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치사적인 마약”이라는 낙인을 찍었읍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끊기 어려운 습성 때문에 “‘히로인’ 사용자들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폐암과 구강암, 인후암 및 관상병의 높은 위험성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최근 연구는 흡연을 위궤양 및 뇌일혈과 확정적으로 연관을 짓습니다. 흡연모의 아기는 더 작고 무게가 가볍고 정신적으로 느립니다. 그들의 선천적 심장 장애와 만삭이 가까울 때의 사망의 가능성이 크게 증가하였읍니다. “진리의 도”가 훨씬 더 성공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13 수혈의 위험성과 무혈 수술의 이점에 관한 지식이 점점 증가하여 “피를 멀리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입증해 줍니다. (사도 15:20, 28, 29) 그러한 외과 수술의 성공이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세인트 바나바스 병원’의 두 외과 의사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그 방법의 이점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더우기 수혈로 인하여 ‘알레르기’성 혹은 혈액 분해성 반응이나, 심장 활동 중지, 간장염 같은 병발증에 관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만족할 만한 일이다.”—‘뉴우요오크’ 주 「의학지」

참으로 진리의 도는 실제로 성공을 얻게 합니다!

14, 15. 군사적 충돌에 대한 참 숭배와 거짓 숭배의 성공을 대조하십시오.

14 실험을 통하여 증명된 또 다른 진리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관련된 결론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마태 26:52; 요한 13:35) 그러나 「신 가톨릭 백과사전」(1967년판)은 “정의의 전쟁과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 모순”도 없다고 주장함으로 다른 도가 있음을 말합니다. “정의의 전쟁은 행악자보다도 행악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다. ··· ‘가톨릭’ 신자들은 확실히 정당화될 만한 상태가 이루어질 만한지 여부에 대한 독자적 견해를 가질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지침이 실제로 어떠한 효과가 있읍니까?

15 양차 세계 대전 중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편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진리의 도와 반대되는 ‘그들 자신의 (상반된) 견해를 가졌’읍니다. 결과는? 성공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들은 수백만에 달하는 동료 ‘가톨릭’ 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죽였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며 진리 안에 있지 않음을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증명하였읍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나찌’의 박해」라는 책에서 역사가인 “제이. 에스. 콘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교회들의 추종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광신적인 점(죽음)까지 교의상 반대를 유지하였다. 그러한 반대는 전혀 희귀한 일이었다. ···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성서의 계명을 근거로 그들은 무기를 잡는 것을 거부하였다. ··· 친위대의 횡포의 그 무서운 힘 앞에서 그들과 같은 결의를 나타낸 교파는 전혀 없없다.”—196, 198, 199면.

역사상 가장 심했던 이들 두가지 돌발 사건 후 다만 누구만이 진리의 도로 따랐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16, 17. (ㄱ) 정부에 관한 성서 진리는 어떠함이 증명되었읍니까? (ㄴ) 하나님의 왕국 정부는 왜 성공적입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6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 쟁점인 세계 정부에 관한 성서 원칙도 진리임을 증명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였으며,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 오래 전에 언급된 진리입니다. (전도 8:9; 예레미야 10:23) 인간의 실질적인 생활 상태는 인간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우월한 정부를 요구합니다. 수천년간의 인류 역사는 이 점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였읍니다. 최근 「뉴우요오크 타임즈」지의 ‘뉴우스’ 분석가가 다음과 같이 슬퍼한 바와 같습니다. “지도자들의 어느 곳에서든지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였음은 명백하다. ··· 모든 종류의 나라들에 있는 모든 종류의 정부들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들은 자국 국민을 가장 염려케 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그들의 능력을 신뢰하도록 일깨우지 못하기 때문이다.”—1974년 5월 15일호 2면.

17 모든 다른 정부들이 실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공을 거두고 있는 한 정부가 있읍니다.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만든 또다른 하나의 정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제 지상에 진리의 도를 위하여 들어서는 시행 기관인 하나님의 왕국 정부입니다. 200여 나라에 있는 2백만명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그 왕국의 정책을 자진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옹호합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 왕국의 헌법과 법률(성서)은 도시와 같은 지방 회중을 통하여 지상의 어떤 정부의 법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이행되고 있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은 순종하도록 도움이 되거나 진리의 도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진리의 기둥과 터”의 역할을 합니다. (디모데 전 3:15; 고린도 전 5:6-13) 이 왕국 정부의 백성들은 세계 10대 ‘베스트 셀러’의 반을 넘는 교과서를 통하여 진리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있읍니다.a 이 왕국 정부는 성공을 거두고 있읍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성장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진리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의 열쇠

18. 생활의 도로서 진리의 이점 몇가지를 말씀해 보십시오.

18 진리를 생활의 도로 선택한 사람들은 사건들과 환경들을 실질적으로 대응합니다. 인류의 상태에 대한 진리를 이해함으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사랑을 나타내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의 가족 역시 가장과 자녀 교육에 대한 성서의 참다운 충고를 따름으로 오는 혜택을 반영합니다. (베드로 전 2:12; 에베소 5:33; 6:1-4) 그들은 성서 예언으로부터 장래에 대한 진리를 알므로 현재의 욕구불만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장래에 대하여 공포심 없이 확신과 즐거운 전망을 가지고 있읍니다.—잠언 3:25, 26.

19, 20. (ㄱ) 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알게 되었읍니까? (ㄴ) 여호와의 증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왜 또한 그들의 신조를 비난하며, 그러므로 비합리적입니까? (ㄷ)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9 때때로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생활의 도의 성공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기간에 이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한 관찰이 ‘와싱톤 디이. 시이’의 한 신문에 게재되었읍니다. 그 소식통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예의 바른 행실에 대한 그들의 강한 심려는 도시에 대한 상쾌한 강장제이다. ··· 그들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인류의 고통의 유일한 해결책인 성서와 그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한다.”

성공의 열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서인 하나님의 말씀이 “해결책”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읍니다.

20 “증인들은 매일 그들의 종교에 따라 생활하는 것 같다”라고 논평하기 전에 ‘뉴우요오크’ 주 ‘로체스터’ 시의 「데모크라트 앤드 크로니클」지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성서에 대한 그들의 해석 즉 증인들이 깊이 그리고 진실하게 지지하는 신조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흔히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또한 그들의 “해석”을 비난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실이 그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천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해석” 때문에 그러한 여호와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신조는 성서로부터 나온 진리이고 그들의 생활의 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실패하지만 그들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시편」 필자와 같이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기도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읍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리이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그 길을 행하는 자들에 관하여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시 86:11; 25:5, 12, 13.

[각주]

a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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