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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하나님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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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하나님을 믿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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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3
파73 4/15 171-174면

왜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믿는 이유를 설명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왜 하나님을 믿는지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명을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부모가 믿으니까, 또는 현재 살고 있는 지방에서 그러한 믿음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도록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칭 그리스도인의 자녀들까지도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한가지 이유는 신자들이 신앙을 확신있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데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압력을 받을 때에 그 믿음을 고수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인 믿음이라면, 우리가 지성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사실들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고대 필자 한 사람이 말한바와 같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요한 1:18) 그러므로 그분의 존재를 확신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관찰된 다른 것들과 개인적인 경험들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이지력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굴의 믿음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창조물의 원인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별이 반짝이며 끝없이 보이는 하늘을 바라볼 때에나 지상의 가지 각색의 생명체를 볼 때에 당신에게는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당신은 이러한 것들의 근원에 대해 추리해 보게 되는가? 이것을 “결과”로 “원인”을 찾는 추리라고 한다. 현존하는 “결과”인 창조물에 대해 추리해 보면, 그 배후에 어떠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 원인이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맹목적인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자, 그러면 우리의 체험은 무엇을 알려 주는가? 시계는 분명히 원인 곧 만든 자가 있다. 그리고 정교하게 설계된 시계는, 설계할 능력이 있는, 질서있는 지성의 산물이라는 사실 곧 그 원인에 관해 알려 주지 않는가? 그것은 지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지구상에서 인상깊은 천체에 따라 시간을 맞춘다. 천체의 규칙적 운동과 지상에 있는 어떤 원자의 규칙적 진동은 오늘날 사람으로 하여금 극히 짧은 순간까지도 시계를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창조물에 나타난 이 특출한 설계도 지성을 시사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인격체를 떠나서 지성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인과의 법칙은 창조물이 그들을 만든 지성있는 인격자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 자체는 어떠한가? 당신은 생명이 생명아닌 근원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려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순한 질문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들은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도 당황케하는 다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할 볼란드’는 그의 저서(The Enduring Pattern) 가운데 그러한 질문을 제시하였다.

“생명의 기원을 원소의 우연한 결합—그들은 오늘날의 상태하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없음을 자인한다—으로 설명하는 자들은 무의식적이나마 그 우연한 결합을 초래한 어떤 힘을 인정한다. 그 힘은 무엇인가? 생명이 먼 우주의 어떤 곳으로부터 원시의 바다에 나타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다른 곳에 생명이 존재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어디에 어떻게 하여 존재하게 되었는가? 생명의 근본을 핵산까지 추적하고 또 유전자가 분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유전자 또는 그 핵산이 어디서 생명력 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형을 받았는가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힘, 그 모형이 어디에 있는가? 만일 그 미묘한 원소들의 결합 방식 자체에 있다고 한다면, 왜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결합하였는가? 질문은 끝이 없고 대단히 어렵다.”—(1959년) 244면.

우리의 지식을 근거로 한다면,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오로지 살아 있는 창조주만이 생명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양심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양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 문제를 간단히만 살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자기의 행동을 지도하는 내재적인 의식—도덕법 또는 자연 법이라고도 불리운다—이 있어 왔다. 이 사실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교’의 ‘피. 알. 콜레만 노르톤’의 말을 들어 보자.

“자연의 법[또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의식]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보편성,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모든 민족에게 항상 동일하기 때문; (2) 필요성, 그것이 인간의 이성적인 본성에 필요하기 때문; (3) 불변성, 그것은 모든 인간 권위에 대해 독립적이기 때문.”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 양심에 따라 어떤 행동을 전적으로 “옳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전적으로 “나쁘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인 자연의 법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기본적인 악행을 일관성 있게 단죄한다. 인류학자 ‘엠. 에프. 애실리 몬타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살인은 전세계적으로 범죄로 간주되고 있으며, 살인자가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면 형벌은 일반적으로 사형이다. ··· 근친 상간 규정은 범세계적이다. ··· 사유 재산은 세계적으로 존중받고 있다. 부동산이든, 동산이든, 무형의 재산이든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는 모든 부자유한 사회에서도 존재한다.”—「인류학과 인간 본성」(1957년), 58, 63, 64면.

살인과, 가령, 정당 방위와의 한계가 사회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마치 “근친 상간”의 정확한 한계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농업 사회에서는 절도를 규정하는 법이 공업 사회와는 약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 행동은 언제나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성서 로마서 2:14, 15과 비교.) 이전 ‘런던 대학교’ 교수 ‘알. 더불유. 퍼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당연하다.

“많은 점에 있어서 원시적인 도덕률이 복잡한 문명 사회의 도덕률과 상당히 비슷하다.”

사실상, 현 이십세기 “복잡한 문명 사회”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뉴렘베르그’에서 어떤 ‘나치’ 전범들은 양심의 법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자기들이 단순히 ‘나치’의 법과 자기네 정부의 상관들에게 순종한 것 뿐이라고 항변하였지만, “더 높은 정의라는 자연의 법”을 따랐어야 할 일이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중공에서도, 국가적으로 매음과 같은 행위를 일소하려는 조치를 강구한 것을 보면 강력한 도덕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범세계적인 자연의 법, 도덕의 법 곧 양심의 법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입법자가 없이 생기는 법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또한, 인류 사회에 분명히 유익하고 그 사회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그 자연의 법을 만드신 분은 특출하게 도덕적인 분이 아니겠는가? 그 도덕적인 분이 하나님이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

성서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왜 그러한가?

성서에는 자세한 예언 혹은 예고들이 많이 들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한가지 예를 들면, 성서는 어떻게 미리 수백년 전에, 예수께서 어디서 나실 것인가? (미가 5:2; 마태 2:1-6) 어느 혈통에서 나올 것인가? (창세 22:15-18; 49:10; 사무엘 하 7:8-16; 마태 1:1, 2, 6) 언제 메시야로 나타날 것인가? (다니엘 9:24-27) 등을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 자신이 이러한 점들을 조정할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들이나 성서에 들어 있는 이와 비슷한 수백가지 다른 예언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멀리 내다보는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으로서는 미래를 그렇게 내다 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

또한, 성서가 그 원칙을 실제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 대조적인 사례를 보면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인류에게 직면해 있는 문제들이 수없이 많다. 지속적인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과학자는 대단히 보수적인 잡지인 “사이언스”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가 1980년까지 살아 갈 가능성은 50-50의 비율도 못된다. ··· 때가 짧은 것은 우리의 문제거리들이 수 없이 많고 또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 무기 팽창, 범죄 및 가정 파탄 등에 관해 당신 자신이 신문에 읽어본 내용도 이 과학자의 연구 결과를 확증하지 않는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200여 나라와 섬에서 150만이 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자기 생활에 관계될 때에 거기에 성서 원칙들을 적용하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그럼, 몇 가지 실예를 고려해 보자.

인종 문제가 세상 나라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개선되어가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각 대륙 마다 인종적 증오심이 심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된다.

“그들이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경하는 점에 대해 나는 충격을 받는다. 인종적 형제 관계라는 교리를 입술로만 떠벌이는 어떤 사람들과는 달리 증인들은 그들의 사회에,—탁월한 지휘자의 직책에 까지도—피부색과 특징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성서와 종교 지」, ‘지. 노르만 에디’

사람들은 수천년동안 노력을 해서도 전쟁을 막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현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기가 더 많이 쌓여 있지 않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 이사야 2:2-4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정하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었다. 국가적 장벽이 그들로 증오하고 서로 죽이게 하지 않는다. 1965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맨토 유니온」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온 세상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조에 따라 살아간다면 유혈과 증오가 사라지고 사랑이 왕노릇하리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구나, 세계 각처에 범죄가 증가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의 준법적 행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뉴저지’ 주 「피스카타웨이 크로니클」지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1950년에 [대회를 위해] 이곳에 있을 때에 그들과 직접 접촉해 보고 그들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도시의 모든 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혼과 청소년 범죄가 매일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예절바른 가정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특징이다. 「크퍼벨트의 크리스챤」이라는 책에서는 ‘아프리카’ 각처에 있는 증인들의 가족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왙취타워’ 부모들은 자기 가정에서 어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한다. ··· 우리가 아는 ‘왙취타워’ 가족은 예외적으로 잘 조화되고 행복하게 보인다.”

그렇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러한 모든 문제들과 기타 많은 문제들에 대해 효과를 내는 해결책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어느 인간 전문가도 진정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였다. 증인들의 성공은 오직 그들이 성서를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가장 영리한 사람보다도 더 높은 근원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다.

믿음은 인생에 목적을 부여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호와의 증인들이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케 하는 또 다른 강력한 논증을 알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인간 생애에 만족할 만한 목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죽음과 고통에 대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인생에게 무슨 “만족할 만한 목적”을 주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음을 당신은 아는가? 그와 반대로 성서 첫째 책에서는 사람이 자신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음을 알려 준다. 또한 성서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악한 상태가 계속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 안가서 그것을 없애시고 이 지상에 낙원을 회복시키시겠다고 알려 준다. 죽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로 다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그러한 기쁨을 주는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창세 3:3, 17-19; 전도 7:29; 요한 5:28, 29; 계시 21:3, 4.

한편, 당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당신은 수천년간 계속되어 온 악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자녀의 할머니나 어린 친구가 죽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 어린애에게 왜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납득할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안믿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본 사람들은 「시카고 트리뷴」지의 한 필자가 말한 바와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인간을 허공에서 떨어져 나온 생물학적 우연으로 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대한 견해가 냉정하고, 허망하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렇게 하면 인생이 목적을 갖게 된다!

물론, 하나님과 이 지상의 상태에 대해 궁금히 생각되는 다른 질문들도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서를 펴서 설명해 주는 바를 고려해 보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 만일 당신이 사는 지방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날 수 없다면 ‘왙취 타워’ 협회로 편지를 하라. 그러면 어떤 사람이 당신을 찾아 가도록 주선할 것이다. 그 봉사는 무료이다.

[172면 삽화]

시계는 지성 있는 제작자가 만들었다. 시계는 천체에 맞추어서 만들었는데 천체는 만든 자가 없겠는가?

[174면 삽입 성구]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에게 밝히 나타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 주셨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말하자면 그의 영원하신 힘과 신으로서의 성품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핑계할 여지가 없읍니다.”—로마 1:19, 20,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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