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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건한 결혼 생활을 존중하라!
    파수대—1983 | 7월 1일
    • 혹 오늘날 ‘평판이 좋지 않은 집’에서 자행되는 매춘 행위와 관련이 있다.

      ‘포르네이아’가 종종 제한된 의미로, 미혼자(독신자)들 사이의 성 관계에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하나의 제한적인 용례가 고린도 전서 6:9[신세]인데, 거기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간음, 동성애와 같은 기타 성적 범죄를 자행하는 자들 외에 별도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바로 앞서 고린도 전서 5:9-11에서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단지 부도덕한 미혼자들 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6장은 간음과 동성애를 포함한, 금지되어야 할 광범위한 불법적 성 행위들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음행하는 자들”을 영원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자들로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유다서 7절과 계시록 21:8도 성 관계를 갖는 미혼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일 수 없다. 그리고 사도 행전 15:29에 나오는 바, “음행을 멀리할찌니라”는 ‘예루살렘’ 통치체의 결의 사항은 틀림없이 적용 범위가 넓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b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의 “음행”이란 명백히 마태 복음 5:32과 19:9에 사용된 바와 같이 결혼 생활 밖에서의 광범위한, 불법적이고 불의한 성 관계들을 말한다. ‘포르네이아’는 적어도 한 사람의 성기(들)를 (자연스러운 방법이든지 변태적인 방법이든지) 심히 부도덕하게 사용하는 것이 관련된다. 또한 이러한 부도덕에는 남자나 여자 혹은 짐승같은 또 한쪽의 연루자가 있었어야 한다.c 그러므로 자위 행위(이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영적으로 위험하기는 하지만)는 ‘포르네이아’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포르네이아’라는 말에는 성적 애정이 매매되는 매춘부의 집에서 자행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성 행위가 포함된다. 어떠한 종류의 성적 애정을 사기 위하여 매춘 행위를 하는 남자나 여자에게 가는 사람은 ‘포르네이아’의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다.—고린도 전 6:18 비교.

      결혼한 그리스도인들

      결혼의 띠 안에서 결혼한 부부 간에 행하여지는 성 행위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의 사생활을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장로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그들의 생활에 관여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성경의 지시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명백히 변태적인 성 행위를 포함하여 여호와 앞에 불결한 모든 것에 대한 미움을 배양하는 것이 좋다. 결혼한 부부는 그들이 “성령의 열매”를 발전시키는 데 부단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들로 깨끗한 양심을 갖게 해줄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갈라디아 5:16, 22, 23; 에베소 5:3-5.

      그러나 만일 배우자 한쪽이 남편 혹은 아내에게 명백히 변태적인 성 행위를 원하거나 심지어 요구한다면 어떠한가?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은 ‘포르네이아’에는 결혼 마련 밖에서의 불법적인 성 행위가 포함된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따라서 결혼의 띠 안에서 한쪽 배우자의 강제로 행하여진 구강 혹은 항문 성교와 같은 변태 행위는 재혼의 자유가 있게 하는 성경적 이혼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d 믿음 안에 있는 배우자는 그런 일로 인하여 괴로와하겠지만, 성서 원칙을 고수하려는 그의 노력은 여호와의 축복받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부부는 성 관계는 영예롭고 건전하며 부드러운 애정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하면서 그 문제를 솔직하게 논의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애정은 틀림없이 한쪽 배우자를 괴롭히거나 손상시킬 수 있는 여하한 행위도 배격할 것이다.—에베소 5:28-30; 베드로 전 3:1, 7.

      이미 말한 것처럼, 장로들은 회중 안에서 부부들의 사적 결혼 문제를 “감시”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어떤 회중 성원이 결혼의 띠 안에서의 변태적인 성 관계를 자행하고 있거나 혹은 공공연히 그것을 옹호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사람은 확실히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그런 사람은 장로나 봉사의 종 또는 ‘파이오니아’ 등의 특권에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행하고 옹호하는 것은 심지어 회중으로부터 추방되는 사태를 빚기까지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러한가?

      갈라디아서 5:19-21에는 ‘포르네이아’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하도록 인도할 수 있는 많은 비행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는 “더러운 것”(희랍어, ‘아카다르시아’; 음탕, 타락, 불결을 의미함)과 “호색”(희랍어, ‘아셀게이아’; 방종, 음란, 수치스러운 행위를 의미함)이 있다. 이러한 비행들도 심해지면 ‘포르네이아’처럼, 그리스도인 회중으로부터 제명될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인 이혼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충격적이고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성적 행위를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사람은 호색의 죄를 짓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심지어 ‘포르네이아’를 범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성경적 이혼의 근거가 있게 될 것이다.e 헌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모든 “육체의 일”을 피하고 저항하기 위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갈라디아 5:24, 25.

      여호와의 백성 모두는 결혼한 사람이든지 혹은 독신자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부도덕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결혼 제도를 포함한 여호와의 모든 마련을 충성스럽게 지지해야 한다. (시 18:21-25) 결혼한 사람들은 “한 몸”으로서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참다운 사랑과 존경심을 배양함으로써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창세 2:23, 24; 에베소 5:33; 골로새 3:18, 19) 그들은 다른 부면에서처럼, 이러한 부면에서도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낼 수 있다. 바로 이 세상을 ‘사단’은 부도덕과 타락의 수렁으로 이끌어 들여 왔으며 바야흐로 세상은 ‘그 정욕과 함께 지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두는 하나님의 존귀한 결혼 마련과 관련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요한 17:16; 요한 1서 2:17.

  • 우리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교훈
    파수대—1983 | 7월 1일
    • 우리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교훈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일부 나라에서는 국가가 우리로 그리스도인 양심에 거스르는 일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세상의 매력과 “지혜”가 청소년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수십년을 기다려 온 일부 사람들은 ‘‘아마겟돈’이 과연 올 것인가?’ 하면서 궁금해 할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면—사실,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성서에 들어있는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두개의 서한은 바로 당신에 대한 교훈이다. ‘베드로’가 그 당시 회중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아마 예수께서 사망하신 지 30년이 좀 지나서 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은 여러 세기가 지나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교훈은 지금도 그 당시 만큼이나 유익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교훈을 할 만한 훌륭한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자격을 구비한 목자

      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읽어보게 되면 사도 ‘베드로’가 된 ‘갈릴리’ 출신의 어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예수에 대한 그의 충성심에는 추호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충동적인 사람이라서 간혹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었다. 아마 우리는 ‘베드로’가 저지른 일부 과실들이 우리 자신에게도 얼마간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았을 때의 ‘베드로’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 그는 흥분하여 자기도 물 위를 걷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그는 겁을 먹게 되었고 구조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자기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던 때의 ‘베드로’를 상기해 보라. 그러나 몇 시간 후에 그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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