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느니라.]”-에베소 4:17, 18.
1. 다음 기사들의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세계의 도덕 상태는 극적으로 악화하고 있읍니다. 몇해 전만 하더라도 소름이 끼치는 것으로 생각되던 오락물이 이제는 대중에 의하여 거의 보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읍니다. 그러한 영향은 그리스도인 회중에 까지 위협이 되고 있읍니다. 그러한 경향을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읍니까? 다음에 나오는 기사들은 얼마의 뜻있는 해답을 해 줄 것입니다.
2, 3. (ㄱ) 예수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무엇에 비유하셨읍니까? (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일반적인 평판은 어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의 개인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읍니까?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도덕적으로 캄캄한 이 세상에서 밝게 빛나야 합니다. ‘바울’은 “비뚤어지고 병든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추는 일”을 계속하라고 당부하였읍니다. 이들 초기 제자들은 예수와 사도들과 직접 연합한 사람들이었지만 역시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들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쉽게 “비뚤어지고 병든 세상”의 도덕적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며 순간적인 유혹으로 그들의 그리스도인 도덕성을 상실할 수 있었읍니다. 사실상 암흑의 세계로 완전히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읍니다.—마태 5:14; 빌립보 2:15, 「필립스 역」; 빌립보 3:18, 19.
3 현 시대에 있어서도 우리를 이 세상의 암흑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압력이 대단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얼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압력에 굴복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체적으로는 전세계에서 정직성과 도덕적 생활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빛의 자녀”들로 행하는 일을 중단하고 회중에서 제거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읍니다. 더는 그들의 행실이 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고린도 전 5:13; 에베소 5:8.
세상의 압력
4. 이 세상 도덕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인기를 얻고 있는 오락의 형태가 어떻게 이 사실을 증명합니까?
4 세계적으로 도덕적 분위기가 악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감각[도덕감, 신세] 없는 자”들이 되었읍니다. (에베소 4:19) 이 사실은 오늘날 번성하는 오락 형태로 보아 분명합니다. 오락만을 들추어 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 여가 시간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경향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유 시간 혹은 퇴근 후의 시간에 하는 일이 그의 사람됨을 상당히 알려 줍니다. 오늘날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나쁜 형태의 오락으로 판단할 때 오늘날의 세계의 도덕적인 질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저질의 도덕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읍니까?
5. 우리가 「에베소서」에 있는 충고를 고려하는 것이 왜 시대에 적절한 일입니까?
5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처음으로 도덕이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도덕감을 잃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의 유년 시절에 중동 지방의 도시인 ‘에베소’ 시에 살던 일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읍니다.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그 편지에서 그는 “빛의 자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충고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는 이 위급한 “마지막 날”에 아주 적절합니다.—디모데 후 3:1-7, 13, 새번역.
이방인들이 행하는 방법
6, 7. (ㄱ) 에베소서 4:17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권고를 받고 있읍니까? (ㄴ) 일세기에 이방인들은 어떻게 “행”하였읍니까?
6 에베소서 4:17에서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생각, 새번역]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읍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어떻게 “행”하였읍니까? 일세기에 살던 한 목격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읍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어디에서나 짜낼대로 다 짜낸다. 타락 행위는 제한이 없다. ··· 우리는 건망증이 심해서 존귀한 것이라고는 기억하지를 못한다. 사람이 ··· 지금 웃음거리와 경기를 위하여 살해되고 있다. ··· 사람이 시체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장관이다.”a
삶에 있어서 순수한 목표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락이 전부요, 어디에서나 쾌락을 짜내는 것이 전부였읍니다.
7 고대 ‘에베소’는 오락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알맞는 곳이었읍니다. 거기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야외 극장과 얼마든지 즐거운 구경을 할 수 있게 해 줄 운동장 혹은 육상 경기장이 있었읍니다. 이러한 시설들은 그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의 산물이었읍니다. 한 역사가는 그 당시 ‘로마’를 이렇게 묘사하였읍니다. “이 제국의 도덕 상태는 참으로 어떤 면으로 볼 때 기록상 가장 소름끼치는 것에 속한다.”
굳어진 마음
8. (ㄱ) 에베소서 4:18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의를 이끌며, 원 희랍어의 뜻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그러한 상태는 갑자기 일어납니까?
8 ‘바울’은 사람들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 저희 마음이 굳어”진 것으로 묘사하였읍니다. (에베소 4:18) 그들의 마음은 감동을 받는 일이 없었읍니다. “굳어진” 이라는 희랍어는 대리석보다 더 단단한 돌을 묘사하던 시대가 있었읍니다. 이 단어는 서서히 관절에 형성되어 행동을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는 통풍석(痛風石)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었읍니다. 서서히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돌처럼 둔해지고 굳어졌읍니다. 이런 일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고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락의 선택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직접적인 영향이 되었읍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9, 10. 일세기에 가장 인기있던 오락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읍니까?
9 그 당시 가장 인기를 끌던 오락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고 있읍니까? 흔히 사람이나 동물과 사활을 겨루는 검투 시합이었읍니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경기장은 수천명의 관중으로 꽉 차 있읍니다. 호화 찬란한 비단 차일 밑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우아한 음악과 통로를 흐르는 향기로운 내음의 물이 죽음의 소리와 냄새를 가리우는 유쾌한 배경이 되게 합니다. 갑자기 온 군중이 일어나 미친 듯이 외칩니다. “죽여라! 쳐라! 찔러라! 칼을 왜 그렇게 비겁하게 쓰느냐? 왜 그렇게 힘이 없이 치느냐?” 이처럼 조직적인 도살 행위가 자행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시합을 구경한 한 관객은 “재미있고, 웃기고, 상쾌한 일”이라고 말하였읍니다.
10 이러한 폭력적인 시합을 구경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한 핏덩이를 보고 만족해 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형태의 오락은 싱겁게 보였읍니다. 한 역사가는 그것이 “짐승과 달리 사람에게만 있는 고통에 대한 동정 신경을 파괴”하였다고 요약했읍니다.
11. 다음 대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말하십시오. 오늘날에는 검투 시합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오락이 ‘굳어진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없다.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아마 믿을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검투 시합이 없어진지 오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신문 기자의 경험에 유의하십시오.
“죽여라! 한번 더 쏘아라! 신호 아래 사격수는 그 여자를 쏘았다. 그 여자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 총격을 명령한 사람들—극장 내 뒷좌석에 앉은 세 사람들은 어디로 보나 보통 영화 ‘팬’들이었다.”
이것은 예외의 경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화와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흔히 그러한 폭력으로 특징지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한 오락이 무정한 사람, “고통을 느끼지 않”는 혹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였읍니다.—에베소 4:19, 왕국 행간 번역.
방탕하는 일
12. (ㄱ) 에베소서 4:19에는 이방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부가적인 묘사가 있읍니까? (ㄴ) “방탕”의 뜻은 무엇이며, 그 당시의 오락은 그것을 반영하였읍니까?
12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굳어진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부언하였읍니다. (에베소 4:19) 그는 또한 “음행”과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에 관하여 말하였읍니다. (에베소 5:3, 12) 일세기에 이러한 행실을 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경우에는 무대 즉 극장에서 행해지는 오락이었읍니다. 구경거리는 무엇이었읍니까?
“속은 남편의 모험, 간통 및 호색적인 이야기가 각색의 주부를 이루었다. 덕이란 조롱감이었다. ··· 거룩하고 공경하기에 합당한 것은 무엇이든지 욕이 되었다. 외설, 음담, 수치감을 범하는 전시물들, 이러한 구경거리들은 한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발레’ 댄서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반나체가 되어 춤을 추기도 하고 무대에서 전나가 되기도 하였다. 예술은 집어치우고 모든 것이 단순히 관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짜여졌다.”—‘게르하르드 울호른’ 저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차이」 120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그것이 바로 “방탕”의 모형입니다. 원 희랍어가 내포한 뜻은 무슨 쾌락이든지 빠져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것,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13. 비슷한 “방탕”이 오늘날에도 오락의 일종으로 널리 퍼지고 있읍니까?
13 오늘날이라고 다른 점이 있읍니까? 오락계에서 제공하는 성적 부도덕은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읍니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텔레비젼 스크리인’에서까지 외설 영화를 방영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그러한 것이 안방에 까지 들어오게 하고 있읍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이태리에서 ‘텔레비젼’에 외설 영화가 방영되자 “그 시간에 전 시내가 정지 상태가 되었”읍니다.
14, 15. (ㄱ) “욕심”(에베소 4:19)은 무엇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오락도 그러한 욕심을 갖게 합니까? (ㄴ) 헌신한 그리스도인들도 성적 부도덕의 특성을 가진 영화 등을 관람할 때 영향을 받을 수 있읍니까?
14 많은 영화의 내용과 사람들의 태도에 관하여 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새로운 영화의 대부분은 나체의 성장면—이성 성교, 근친 성교, 동성 성교—이 줄거리로 ··· 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읍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욕망과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고, 무엇이든지 허락되고,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사회 상태가 되었다.”
15 그러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묘사한 바와 같이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더 가지려는”, 왕국 행간 번역) 즉 어떠한 도덕적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정한 욕망을 만족시키고 감정을 만족시키려는 탐욕입니다. (에베소 4:19) 그러한 타락한 내용을 구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종류의 영화를 몇가지 구경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한 장면[성적 부도덕을 묘사한 것]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본 것을 하고 싶어하게 된다. ··· 그 영화는 내가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손해 보며 사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그러한 일에 호기심을 갖게 한다.”
모든 사람의 경험이 다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험성은 존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교묘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읍니다.
도덕적인 기적
16. 에베소서 1:6-8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풍부한 축복을 받았으며,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읍니까?
16 그것은 일세기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따른 사람들의 행로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들은 한 때 그 제도와 그것의 통치자인 ‘사단’의 영향 아래 생활했던 사람들이며, 그들의 본성은 ‘육체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의 고상한 진리는 생명에 대한 온전히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하였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자기 아들을 기꺼이 희생하셔서 그들의 죄의 무거운 빚을 용서받을 수 있게 하셨읍니다! 얼마나 고귀한 값입니까! 얼마나 인자하고 과분한 친절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는 [과분하신 친절] 그[하나님]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의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또한 일상 생활 문제를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총명”이 주어졌읍니다.—에베소 1:6-8; 2:1-5.
17. (ㄱ) 그리스도교가 능력의 종교였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ㄴ)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능력이 어떻게 예시되었읍니까?
17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능력의 종교였읍니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를 세상 모든 권위보다 훨씬 뛰어난 자리로 높이셨읍니다. 이제 같은 그 “능력”이 ‘믿는 그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읍니다. (에베소 1:19-21) 이들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 왔읍니다! 도덕적인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일세기 그리스도교의 능력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성적 부도덕을 보통으로 생각하였읍니다. 초기 ‘로마’ 필자인 ‘시세로’는 이렇게 호소하기까지 하였읍니다.
“젊은 사람이 절대로 매춘부를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지나치게 엄한 사람이다. ··· 그러한 일이 없었던 때가 있었는가? 그것을 흠잡는 사람이 있었는가?”
그러나 “빛의 자녀”는 그러한 행실을 타파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읍니다.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수행한 도덕적 기적을 따를 만한 것은 전혀 없읍니다.
빛의 자녀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18. 초기 제자들은 그들이 “성도”의 신분임을 인식하고 있음을 어떠한 행실로써 나타내야 하였읍니까?
18 이들 제자들이 달해야 할 표준은 높은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충고하였읍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은] ···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에베소 5:3) 다만 그러한 것을 멀리할 뿐 아니라,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위하여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일도 없어야 하였읍니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 ‘실제로 부도덕한 행실을 하지 않는 한, 오락으로서 구경하는 것이나 이야기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19. 2세기와 3세기에 살던 그리스도인 필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읍니까? (ㄱ) ‘부끄러운 연극과 야수적인 투기장’에 대하여, (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구경하는 것에 대하여, (ㄷ) “욕정을 불타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ㄹ) 사람은 어떻게 나쁜 짓을 배울 수 있읍니까?
19 이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락으로서 아주 일반적이었던 검투 시합과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였읍니까? 2세기와 3세기에 살던 일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필자들의 설명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그리스도인들]는 말이나, 구경하는 일이나, 귀로 듣는 일에 있어서 광적인 ‘서어커스’, 부끄러운 연극, 야수적인 투기장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 우리에게 다른 쾌락들이 있다고 해서 그대들의 기분을 상할 이유가 무엇인가?”—‘터툴리안’.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그를 죽이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므로 단연 그러한 구경[검투 시합]을 하지 않았다.”—‘아데나고라스’.
“부패한 무대의 영향은 아직도 더욱 오염되고 있다. 희극의 제목은 처녀들을 경시하거나 기생들을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 부끄러움 없이 그런 짓들이 행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구경하는 것을 볼 때 청년들이나 처녀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훈계하는 것이고, 욕정으로 불타게 하며, 특히 구경하는 것만으로 흥분하게 한다.”—‘락탄티우스’. [‘고딕’체는 본지에서]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악을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므로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왜 욕정을 상징하는 것에서 ··· 쾌락을 발견해야 하는가? 사람은 구경하는 것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보는 것은 즉시 우리에게 익숙해지게 마련이다.”—‘사이프라이안’.
20. (ㄱ)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타락한 오락을 피하였읍니까? (ㄴ) 그들의 행실이 눈에 띄게 달랐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이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보다 여러 해 후에 살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들은 그러한 타락한 오락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암흑에서 나와 높여진 사람들이 즉, 생활 가운데서 음담과 폭력, 부도덕을 멀리 한 사람들이 일부러 앉아서 그러한 것을 오락으로 구경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행위임을 이해할 수 있었읍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바울’의 충고를 청종했읍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의 그들의 순결한 일상 생활은 이방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책망’이 되었읍니다. 이들이 불경건한 세상에서 “사람의 원수”라는 낙인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읍니다. 이들 제자들은 육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이웃 사람들보다 더 나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기꺼이 나타냈읍니다. 그들은 “정신에 작용하는 힘 안에서 새롭게 되”었음을 전시하였읍니다. 그 “힘”은 얼마나 다른 것이었읍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빛의 열매”를 나타내든지 혹은 이방 사람들처럼 행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에베소 4:23, 신세; 5:9, 11.
21. 어떠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오락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까?
2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오락 선택에 관하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또는 우리의 자녀가 ‘텔레비젼’을 켜거나 영화관에 가서 구경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경하기로 선택한 것과 ‘부끄러운 ‘로마’의 연극 및 야수적인 투기장’ 사이에 실제로 다른 점이 있읍니까?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습관적으로 구경하는 것의 영향을 받아 나타내졌고 부도덕에 말려들어간 실제 경우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22. (ㄱ)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자녀들로서 걷는 일이 쉬운 일이었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읍니까? (ㄴ) 대답을 요하는 어떠한 질문들이 또 있읍니까?
22 이와는 반대로, 그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도덕적 힘을 전시하였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무디어져서 그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치감과 예의라는 것을 통째로 잊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들은 계속 정신을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칭찬할 만한 것, 덕이 있는것, 기림이 있는 것’에 집중시킬 수 있었읍니다. (빌립보 4:8) 부도덕한 분위기 가운데서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힘을 유지하였읍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단순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들도 기본적으로 오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들의 “다른 쾌락”이란 어떤 것이었읍니까? 우리는 어떻게 “빛의 자녀들”의 그러한 가치있는 본을 더욱 더 밀접히 따를 수 있읍니까? 이러한 것들이 다음 기사에서 고려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각주]
a ‘루시우스 세네카’(기원전 4년?—기원 65년) 서한 95의 3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