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하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10.
1. 언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내 생전에 그 끝이 오지 않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여러 세기를 통해 사람들은 그 끝이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오지 않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기대한 바가 실현되지 않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때였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6:40; 11:24) 오늘날의 “마지막 날”이 오기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사람이 어느 시대에 살든지 간에, 세상의 끝이 가깝든지 멀든지 간에 그의 생애는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디모데 후 4:8; 히브리 11:4-38.
2. (ㄱ) 물질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우리가 죽을 때,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있읍니까? (ㄴ) 그러므로 어떤 교훈이 적절합니까?
2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전도 5:15) 물질에 관한한 죽은 자는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지고 갈 수 있는 지속적 가치가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지금 살아있는 동안 노력한 하나님 앞에서의 좋은 이름입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 있는 동안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 때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시간을 사십시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특히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이 사물의 제도의 끝인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활동에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그렇게 할 때입니다.—전도 9:10.
3. 어떠한 정확한 지식이 중요하며, 그것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읍니까?
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두 가지 면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즉 나쁜 일과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나쁜 일을 중지하고 옳은 일을 행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일에 힘쓰고 있읍니까? 틀림없이 정신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바울’은 “이 사물의 제도를 본받지 말고, 여러분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12:2, 신세) 그는 에베소서 4:23에서 이 방식을 반복하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정신에 작용하는 힘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하였읍니다. (신세) 그 힘이 골로새서 3:9, 10에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읍니다. “옛 성품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성품을 입으시오. 그것은 정확한 지식을 통해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읍니다.” (신세) 우리의 정신에 작용하여 정신을 변화시켜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도하는 그 힘이 그분의 말씀인 성서의 정확한 지식입니다.
4. 나쁜 일을 중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금지된 일을 중지하려고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중지하는 데 일시 동안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의 비유로 이 점을 예시하셨읍니다. 한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의 “집”을 떠났는데 후에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비어 있으므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옮겨 왔으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읍니다. (마태 12:43-45) 악한 영을 내어 쫓아 집을 비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좋은 것으로 채워 놓아야 합니다. 나쁜 일을 중지하고 텅빈 상태로 두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옳은 일을 행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선행에 전념함으로 악행을 쫓아 내도록 하십시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야고보 4:7, 8) 게으름은 ‘사단’을 유인해 들이는 것이고 진리로 정신을 채우는 일은 보호가 됩니다.—빌립보 4:8, 9.
지도를 받아야 할 필요성
5.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왜 어려우며, 19세기 전에 살던 한 사람에게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읍니까?
5 오늘날 종교와 철학계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상충된 견해로 혼란에 빠져 있읍니다. 그들은 연구 과정에서 성서를 읽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그들이 처음이 아닙니다. 19세기 전에 병거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던 한 ‘에디오피아’ 사람이 있었읍니다. “‘빌립’[복음 전도자]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니라]” ‘빌립’이 병거에 올라타 같이 가면서 그를 지도하였읍니다.—사도 8:26-35; 21:8.
6. 우리는 현대 ‘빌립’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나, 어디에서 찾을 수 없읍니까?
6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얻게 하는 행로를 성서로부터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자격을 가진 오늘날의 ‘빌립’은 어디에 있읍니까? 어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스도교국의 존경받는 기성 정통파 종교 가운데는 없읍니다. ‘빌립’은 뛰어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모욕과 비방 그리고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읍니다. 역사적 교훈에 의하면, 공인된 기성 종교 제도는 종종 인간 철학에 빠져들어갔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시키는 죄를 범하였읍니다.
7. (ㄱ) 고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시켰읍니까? (ㄴ) 그리스도교국의 일부 현대 교회와 그 성원들은 어느 정도로 ‘이스라엘’을 모방하며, 어느 성귀들을 범하여 그렇게 합니까?
7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숭배에 숲속 산당에서 행해지는 ‘바알’ 성숭배의 추잡한 우상 숭배를 부가함으로써 그들의 숭배를 혼합시켰읍니다. 이 혼합에 대해 역대 하 33:1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백성은 저희 하나님 야훼께 바친다고 하면서도 계속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공동번역) 참과 거짓의 이 혼합에 도전하여 ‘엘리야’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참]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찌니라.” (열왕 상 18:21, 신세 참조)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회 성원들은 외설 서적, 부정한 성 영화, 혼전 성, 간통 및 동성애에 대해 관대하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런 일들을 용인하고 자행하기까지 합니다.—로마 1:26, 27, 32; 고린도 전 6:9, 10; 계시 21:8.
8.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자, ‘유다’ 민족은 어떻게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시켜 무효케 하였읍니까?
8 이러한 음탕한 일로 인하여 ‘유다’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읍니다. 포로에서 돌아오자 마자 ‘유다’는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시켰읍니다. 이번에는 우상 숭배적인 성숭배가 아니라 인간 전통과 철학을 더함으로 그렇게 하였읍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종교 제도를 단죄하셨으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읍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태 15:3, 7-9.
9. ‘바울’은 어떻게 강력하게 불충실한 종교인들을 사기적인 포도주 상인들과 비교하였읍니까?
9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철학으로 더럽힌 것을 공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 하[였느니라].” 그 당시 사기적인 포도주 상인들은 그 분량을 늘리고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값싼 액체나 심지어는 물까지도 포도주에 섞었읍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취향에 더 맞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 전통과 철학을 첨가하였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읍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린도 후 4:2; 2:17.
10. 사도 ‘바울’은 어떠한 경고를 하였으며, 그것이 거짓 경고가 아님이 어떻게 증명되었읍니까?
10 ‘바울’은 그리스도교가 배교로 인하여 변질될 것을 경고하였으며, 기원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을 통하여 추악하게도 그렇게 되었읍니다. (사도 20:29, 30) 그 결과 그리스도교 ‘애굽’ 및 ‘바벨론’에서 유래한 삼위일체, 영혼불멸, 지옥불,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염주의 사용 등의 악귀 숭배의 교리들과 혼합되었읍니다. 이런 교리들은 성서에 근거한 것들이 아니고, 소위 그리스도교 교회 신조 가운데 통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읍니다. 더우기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국의 현대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혼합시켰읍니다. 교회들은 성서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는 고등 비평과 하나님이 천지와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부정하는 진화론의 비과학적 이론을 첨가시켰읍니다.
11. 안전하게 지도하는 자들로서, 어떠한 상이한 특성과 확신이 현대 ‘빌립’을 식별케 합니까?
11 그러면 안전한 지도가 되는 현대 ‘빌립’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임을 믿으며, 성서를 자기들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받아들이며, 성서에 아무 것도 보태거나 그것에서 빼지 않으며,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참되다 하며,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증거하기 위하여 온 땅에’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일에 바친 사람들입니다. (디모데 후 3:16; 시 119:105; 신명 4:2; 로마 3:4; 마태 24:14, 신세) 그들은 성서를 권위로서 사용하며, 듣는 사람들이 성서를 조사해 보도록 격려하며, 자기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들이도록 권합니다. (사도 17:11)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하여는 그러한 충실한 지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여러분이 가진 희망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새번역, 베드로 전 3:15; 골로새 4:6.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
12.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12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하여는 연구하여 대답할 것을 배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지식을 스스로 적용시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치 고대 ‘이스라엘’의 초상집에 간 사람처럼 ‘그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전도 7:2)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 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심지어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로마 2:21, 22; 고린도 전 9:27) 그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떠한 사람인가?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베드로 전 3:4; 베드로 후 3:11.
13.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사무엘’의 생각을 어떻게 조정하셨읍니까?
13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는 우리의 외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이새’에게 가서 그의 아들 중 하나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붓게 되어 있었읍니다. ‘사무엘’은 건장한 맏아들에 좋은 인상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 상 16:7.
14. 외관이 기만적일 수 있음을 나타내는 어떠한 다른 증거들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4 외관은 기만적일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의로왔지만 속은 썩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3:3, 27, 28)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적 표인 할례라고 생각하였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 (로마 2:28, 29) 그리고 ‘바울’은 그가 할 수 있었던 큰 일들을 열기한 다음에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부언하였읍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하여야 합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느니라].”—고린도 전 13:1-3; 예레미야 17:10.
15. 우리는 마땅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15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명령된 일들과 금지된 일들을 상당히 길게 열거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시오.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시오. 열심을 내는 데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지며 주를 섬기시오. 희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에 참으며 꾸준히 힘써 기도하시오.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아 주고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시오.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복을 비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시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며 낮은 사람들과 같이하고 자기 지혜를 과시하지 마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써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두시오. 성서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보상하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시오.”—로마 12:9-19, 21, 새번역
16. 우리가 피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추구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6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잘못을 저지를 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도움의 큰 원천이 있읍니다. 즉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시킨 간음하는 자와 같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을 멀리 하십시오. “내 백성아, 이 여자에게서 떠나라. 너희는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재난을 받지 않도록 하라.” 이 여자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양심은 화인맞아서 죄의 감각이 없읍니다. 실제적인 음녀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그러합니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연합함으로써,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잠언 13:20; 고린도 전 15:33; 계시 18:4, 새번역; 잠언 30:20; 히브리 10:25.
지금은 우리의 때이다!
17, 18. 지금 우리는 무엇에 노력을 집중해야 하며, 이 일을 지연시켜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사단’의 악한 제도의 끝이, 가까와 옴에 따라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는 일에, 우리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 성품을 입는 일에, 그리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날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는 일에 우리 노력을 집중합시다. (전도 7:1) 또는 지상 낙원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죽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수도 있읍니다!
18 그러나 아마 당신은 그 끝이 이미 왔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주께서 오시는 일을 지연시키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는 중대한 일에서 손을 늦추기 시작했거나 심지어 좋지 않은 품행에 휘말려들었읍니까? 그 끝이 언제 오는가에 관계없이, 지금이야말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일 살아 있을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시드는 꽃송이와 같고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욥 14:1, 2; 야고보 4:14) 전도서 9:12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19, 20. (ㄱ) 도덕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하는 외에 또 무엇이 요구됩니까? (ㄴ) 지금 행동해야 할 긴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께 질문한 청년보다 더 나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읍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께서는 “와서 나를 좇으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읍니다. 예수가 본이 되십니다. (마태 19:16-22; 베드로 전 2:21) 예수께서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동 규범을 잘 지키셨을 뿐 아니라 “왕국의 좋은 소식”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읍니다. 그분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셨으며,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읍니다. (마태 4:17; 9:35) 군중들이 그분을 더 오래 머물게 하려 하거나 만류하려고 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영적으로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던 무리를 보셨을 때 그분은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셨읍니다. (누가 4:43; 마태 9:36; 마가 6:34)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전파하도록 내보내셨을 때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하라고 교훈하셨읍니다.—마태 10:7, 8.
20 우리는 지금 ‘사단’의 제도의 위험한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읍니다. “때가 단축되어 있읍니다.” 지금은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할 긴급한 때입니다. (고린도 전 7:29; 9:16) 지금은 ‘끝’이 오기 전에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된 때입니다. (마태 24:14, 신세) 여호와께서 이 악한 제도에 끝을 언제 가져오시든지 간에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있읍니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지금, 예기치 않는 죽음이 임하기 전인 지금,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참여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우리의 때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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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느 때에 살고 있든지 간에 그 때가 좋은 이름을 위해 노력할 때이다